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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44)화 (44/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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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목소리는 아주 오랫동안 홀로 웅크린채 답을 찾아 헤매던 소년처럼 연약했다. 화운이 무슨 말로 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황제의 얼굴에 어린 너울을 애달프게 바라보고 있는 사이 황제는 말을 이었다.

“너는 절대로 변할 수가 없다고,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그저 네가 늘 해오던 거짓이고 기만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도....”

"그러다가도 문득 너를 보면... 너는... 너는....”

몇 번이나 망설이는 황제는 말을 고르고 있었다. 자신이 화운을 보며 느끼는 이 낯선 감정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헤아리는 중이었다. 이내 황제가 다시 말했다.

“그래. 문득 너를 보면... 이전에 내가 알던 너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는 것만 같다는 말이다.”

그 순간 화운의 어깨가 굳어버린 것을, 이번에는 저의 말을 고르느라 더없이 긴장한 황제는 보지 못했다.

“기억을 잃어서 그런 것인가.... 분명 너는 연화운인데. 머리부터 발끝 하나 무엇도 달라진 것이 없는 연화운인데.”

“그런데도 너를 보고 있으면 나는 연화운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어지러운 것이야.”

깨달아 변한 것과는 달랐다. 평범하게 이전의 일들을 반성하고 변하려 노력하고 있는 것과는 아주 미묘하게 궤를 달리했다. 어느 날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그리하여 지금의 화운은 마치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이토록 다정한 사람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보였다.

황제는 여전히 그런 일이 정말로 가능한지 알수 가 없어 눈앞의 존재가 너무나도 어지러웠다.

“폐하....”

그때, 지금껏 말이 없이 듣고 있기만 하던 화운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그것은 화운 그 자신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황제의 말을 듣는 순간 화운은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어찌 막을 수가 없었다. 황제의 시선이 온전히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을 느끼며 화운이 말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그것이 정말이라면....”

“......”

“제가 겪은 죽음과 가까운 경험이 저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든 것이라면....”

헛된 일인 것을 알았다. 그 자신이 사실은 하운이라는 걸 똑바로 밝히지 않는 이상 이러한 가정은 전부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걸 화운도 알았다. 다만 화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하게 바라게 되는 아주 작은 위안이 있었을 뿐이다.

“변한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른 사람이 된 것이라고 한다면.”

모든 사실이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저의 존재를 꺼리지 않을 단 한 사람을, 화운은 이토록 간절히 원했다.

"허면 폐하께오선 저를 어찌... 어찌 대하시겠습니까....”

네가 하운이어도 상관없다고, 네가 원하여 이리 된 것이 아니니 너를 탓하지 아니하겠다고, 화운은 누구라도 저를 향해 그런 말을 해 주기를 사실은 내 도록 바라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리기라도 할 것 같은 화운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던 황제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만 쉬어라. 아픈 사람을 두고 내가 괜한 말을 했으니.”

허나 황제의 말은 화운이 원한 그 어떤 대답도, 위안도 아닌 것이라.

저야말로 마음이 약해서 너무나도 쓸데없는 소리를 한 것 같아 마음이 더더욱 무거워진 화운이 그제 고개를 다시 한 번 숙 채 '예, 폐하.' 하고 대답 며 그러쥔 이불을 당겨 제 가슴 위로 끌어당긴다.

그사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화운을 향해 몇 번이나 손을 뻗었다 접기를 반복하다 결국 무엇도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일으킨 황제는 다가올 때보다 더 느리고 머뭇거리는 움직임으로 등을 돌려 걷다가. 마치 가고 싶지 않은 길을 억지로 가듯 그리 버겁게 몇 걸음을 간신히 옮기다가.

그림자를 앞으로 하고 멈추어선 황제가 화운을 돌아보며 말했다.

"...되돌아가지 말아라.”

그 순간, 우물처럼 깊어지던 화운의 서러움이 덜컥 멈추어 섰다. 떨리는 시선으로 황제를 바라본 화운의 눈에 여전히 혼란하고, 어려우며, 두려운 얼굴을 하고서도 말을 잇는 황제의 얼굴이 보였다.

“다른 사람이 된 것이라면, 네가 그러하다면.”

“.......”

“허면 지금의 너로 그대로 여기에 있어라.”

나는 지금의 네가 어렵고, 사실은 두려우며, 어찌 대해야 할지 여전히 막막하나 그렇다고 한들 너는 지금의 너로 그대로 여기에 있어라.

그 말이 자신도 모르게 화운의 마음을 다시 한번 구원하였던 일이 되었음을. 그 밤이 지나가는 내내 화운이 그 말 한마디를 마음에 품어 악몽을 물리칠 수 있었음을.

말을 마치고 도망치듯 정안궁을 벗어났던 이한은 알지 못했다.


“마마, 이제 괜찮으신 거예요?”

자연스럽게 정안궁 침소에 들여놓을 화병을 담당 하게 된 서서가 새로 꾸며온 화병을 탁자 위에 놓고 선 침대에 앉아 있는 화운을 보고는 슬그머니 다가와 침대에 붙어 바닥에 주저앉아선 화운을 올려보며, 말했다.

그날, 다른 이들의 등에 떠밀려 잔뜩 겁을 먹은 채로 화운의 앞에 섰던 어린 궁녀는 이제 아진 다음으로 화운의 애정을 받고 있다하여 다른 궁인들의 부러움을 받는 이가 되어 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트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서서를 본 화운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제 정말 괜찮아. 괜히 너희를 놀라게 만들었구나.”

“마마께서 일어나지 못하셔서 저희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르실 거예요....”

보통 황궁에서 일하는 이들은 주인 앞에서 쉬이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되었으나 정안궁의 궁인들은 다른 곳에서 일하는 이들에 비해 어려서 그런지 무엇이든 쉽게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는 편이었다. 화운은 비록 가진 형제가 없었으나 서서와 같은 궁인 들을 마주할 때면 꼭 그들이 제 어린 누이라도 되는 것 같아 절로 웃음이 나곤 했다.

“미안해. 앞으로는 조심할게.”

하여 화운이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서서의 동글동글한 머리를 한 번 달래듯 쓰다듬어 주자 그때 까지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던 서서가 얼굴을 화라락 붉히며 숨을 협, 들이마신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진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마마. 아이들에게 자꾸 그리 대하시면 버릇 나빠져요.”

“언니도 차암. 제가 어찌 마마께 버릇없이 굴겠어요?”

양 뺨을 발갛게 물들인 서서가 샐쭉한 표정으로 반박하자 아진이 그런 서서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콩, 때리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지금도 봐라. 마마의 침대에 이렇게 기대고 앉아서 애처럼 칭얼거리고 있는게 버릇없는게 아니고 무엇이니?”

“그, 그건... 그건....”

따지고 보면 틀린 게 하나도 없는 아진의 말에 서 서가 더 반박을 하지 못하고 서러운 표정으로 아진과 화운을 번갈아 바라보기만 하자 미소 가득한 얼굴로 둘의 대화를 바라보고 있던 화운이 이내 가벼운 웃음을 한 번 터트리곤 장난스러운 중재에 나섰다.

“그만 되었다. 정안궁의 너희들은 모두 내 사람이고 내가 허락하였으니 나에게 편하게 대한다고 한들 누가 무어라 하겠어.”

허나 가볍게 말을 하였던 화운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의 말이 끝났을 때 아진과 서서는 다소 굳은 표정으로 움직임을 멈추고 화운을 바라보았다. 화운으로서는 갑작스러운 적막에 영문을 모를 얼굴을 하곤 눈치를 보고 있는데 아진과 서서는 마치 둘만이 아는 무언가가 있는 양 비장한 표정으로 시선을 나누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이기까지 한다.

세상에 어느 높으신 분이 하찮은 어린 궁녀를 두고 친히 내 사람들이라 칭해 주실까. 대단한 심복도 무엇도 아닌, 주인을 위해 할 줄 아는 일이라곤 고작 해야 화병에 꽃을 꽂아오는 것이 전부인 궁녀를 두고 이리 스스럼없이 내 사람이라 칭해 주실 분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리 말을 해 준 분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들을 한낱 벌레와 다름없이 대하던 분이시라니.. 이제는 나름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렇게 문득 주인의 변화를 실감할 때면 이 모든 것이 정말로 꿈처럼 느껴져서. 절대로 깨어나고 싶지 않은 그런 어느 여름밤의 꿈처럼 좋기만 하여서.

“마마... 이제 저희가 얼른 자랄게요....”

어느새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은 서서가 말했다. 그저 서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것이 왜 갑자기 이런 분위기가 되었는지 모를 화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제 앞에 있는 서서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하여 차마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서서가 말을 이었다.

“지금은 저희 모두 아무것도 아닌... 너무 어리고, 모자라고, 보잘것없는 아이들이지만....”

정안궁의 궁인들 모두가 지금 당장 아진이나 서서처럼 화운을 전적으로 믿고 있는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화운에게 모질게 매질을 당한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으니 하루아침에 화운의 달라진 모습을 믿는 건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마마께서 이렇게 저희를 다르게 대해 주시고... 저희를 위해 주시고... 마마께오서도 미천한 저희를 위해 이렇게 노력을 해주셨으니까....”

하지만 서서는 아직 화운을 다 믿지 못하는 그 아이들조차도 이제는 예전처럼 겁에 질린 채로 발소리를 죽이며 돌아다니지는 않는다는 걸 알았다. 내일은 또 어떤 말도 안 되는 일로 매질을 당할까 두려워하며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는 밤을 보내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서서 그 자신이 그러하듯, 정안궁의 모든 이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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