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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몇 번이나 되묻는 주인을 바라보는 아진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그 태도에는 지난날 수도 없이 황제에게 외면당했던 기억들이 고스란 히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아진은 저를 향해 연빈에게서 구해 줄까, 하고 묻던 황제를 떠올린다. 아진은 황제의 그 물음에서 제 주인을 향한 황제 폐하의 복잡한 심경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 들었을 때 는 너무도 당황하여 왜 갑자기 폐하께서 제게 이런 것을 묻는지 이해할수 없었는데 시간이 흐르고 나자 아진은 황제의 그 질문이 진정으로 뜻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폐하께서는 혼란스러운 것이다. 제가 처음 주인의 변화를 마주하였을 때 당황하였던 것처럼, 믿지 못하였던 것처럼. 자꾸만 저도 모르게 화운을 향해 마음을 열게 되는 스스로가 두려 워 애써 의심하였던 것처럼 황제 폐하 역시 그러하신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아진에게 사실은 그리 물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가, 너의 주인을 정녕 믿어도 되느냐고, 절대로 믿을 수 없으리라 여겼던 사람을 연빈을. 너의 주인을 내가 정녕 내 마음이 가는 대로 믿어도 좋겠느냐고,
"마마....”
여전히 믿기 힘든 얼굴로 눈동자를 떨고 있는 화운의 손을 아진이 가만히 감싸 쥐었다. 차가운 주인의 손이 마음에 사무치게 아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진은 이 순간 저도 모르 게 자꾸만 웃음이 났다.
“정말입니다. 폐하께서는 아프신 마마를 걱정하셨어요....”
몇 번이나 밀려나고 또 밀려나도. 그 누구 하나 쉽게 믿어 주지 않아도. 그를 조롱하고 무시 하는 말들이 이 주안성에 차고 넘쳐도.
그래도 저의 주인은 이토록 올곧고 단단하게 버텨 제 마음을 열고, 정안궁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그리고 이제는 황제의 마음에 가 닿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더 좋아질 거예요, 마마.”
그러니 제가 그러했듯 머잖아 폐하께서도 정말로 화운을 믿고 아껴주시는 날이 올 거라고. 아진은 정말로 그렇게 확신했다.
“폐하.”
오 태감은 의자에 깊이 몸을 묻고 앉아 눈을 감고 있는 황제를 향해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황제께서 명하셨으니 감히 따르지 않을 순 없지만 내심으로는 이제야 겨우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 황제를 깨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황제는 그마저도 정말로 잠이 든 것은 아니었는지 거의 숨소리나 다름이 없던 오 태 감의 목소리에도 바로 눈을 떠 몸을 일으켰다. 피로가 가득 쌓인 얼굴을 하고서도 이한은 미루는 기색이 없이 입을 열었다.
“고하라.”
“....연빈마마께서 정신이 드셨다고 합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한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당장에 정안궁으로 달려가기라도 할 것 같은 이한의 걸음을 막아선 건 오 태감이었다.
“폐하. 마마께서 정신이 드셨다고는 하나 아직 미령하시고 정안궁의 말로는 약을 드신 후 바로 다시 누우셨다고 하니 폐하께서도 이만 쉬시고 내일 찾으시는 것이 어떠한지요.”
태감의 말에 걸음을 멈춘 이한이 잠시 숨을 고르다 묻는다.
“잠들었다고 하더냐.”
"거기까지는 소인이 알지 못하오나 약기운이 돌았을 테니 아마도 잠드셨을 겁니다.”
“그래...”
태감의 말에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쉬이 몸을 움직이지도, 다른 말을 꺼내지도 않고 생각에 잠겼다. 어쨌든 이한은 화운이 무사히 깨어났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뿐이고 원하던 답을 들었으니 이대로 안심하고 돌아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이다. 정말 그랬다.
그리하여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한이 말했다.
“정안궁으로 간다.”
“그냥 잠시... 잠든 얼굴이라도 보고 와야 나중에 할 말이라도 있을 테니.”
황제는 이제 그 누구도 의미를 찾지 못할 허울뿐인 핑계를 습관처럼 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 굳이 정안궁으로 가 제 두 눈으로 연화운을 보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도 낯설고 민망하여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사실은 그런 이유가 아닌 것을.
연화운이 어찌 제가 아픈데 한 번 찾아오시지도 않으시냐며 난리라도 피울까 그 성질머리 를 잠재우려 병문안을 하는 시늉이나 냈던 예전처럼 그리 성의 없이 한 번 들여다보겠다는 그런 마음이 아닌 것을.
이미 이한 그 자신도,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오 태감도 모른 척을 할 수가 없어서.
더 이상 제가 말린다고 어찌 돌릴 수 있는 걸음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오 태감이 허리를 굽 혔다.
"모시겠습니다. 폐하.“
늦은 밤에도, 이른 새벽에도 저물지 않는 달이 있었다. 황제는 그저 그 달빛을 향해 걸을 뿐이었다.
화운이 불을 다 끄지 말아 달라 하여 두어개의 촛불만을 약하게 켜놓은 침소에서, 화운은 침대 맡에 기댄 채 홀로 앉아 있었다. 아진을 비롯한 이들은 그가 이미 잠든 줄 알고 물러간 상태였다.
화운은 흔들리는 촛불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깊이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누워만 있다가 이제야 겨우 묽은 죽과 약을 먹은 몸으로는 깊은 생각을 하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다만 화운은 그저 연화운으로 여기에 존재하지만 사실은 연화운이 아닌 자신을 연신 자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저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이 몸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무엇 하나 자신이 욕심을 부려 바란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화운은 제가 저지르지도 않은 과거의 일들에 대한 책임을 묵묵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고, 제게는 책임이 없는 일들을 책임지려 노력 중이다. 그러니 하운으로서는 그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화운의 마음 한편에서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생을 잃었는데 누구 하나 그를 잃었음을 알아주지 못하여 서럽게 울고 있던 연화운의 울음소리였다.
하여 또다시 심장이 쥐어짜듯 아파와 화운이 눈을 한 번 질끈 감았을 때 문득 문 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아진이 저를 살피러 온 건가 싶어 서둘러 어지러운 표정을 감춘 화운이 고개 를 돌렸다.
하지만 거기에 서 있는 이는 아진이 아니었다. 화운이 걱정되어 살피러 온 그 어떤 정안궁 의 궁인도 아니었다. 등 뒤로 달밤의 그늘을 지고 선 이는, 심해처럼 깊은 눈동자를 하고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는.
“........폐하?”
그는 화운의 황제였다.
"움직이지 말거라.”
너무 놀라 말도 잊고 눈만 깜빡이고 있다가 황급히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키려는 화운을 황제의 무거운 목소리가 막았다. 앉은 채로 황제 폐하를 맞이할 수는 없다는 걸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도 화운은 단 한 마디로 자신을 옭아매는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감히 움직이지 못하는 화운을 두고 황제가 천천히 걸었다. 위태로운 길을 걷듯 조심스럽고도 신중한 걸음이었으나 망설이지는 않았다. 화운이 이제라도 내려서서 인사를 올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마른손 끝으로 애꿎은 이불만 구겨 쥐고 있는 사이, 어느덧 바로 앞까지 다가온 황제는 화운과 마주 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조금도 예상치 못한 마주침에 화운이 시선을 내려 제 손끝만 애매하게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내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이제 괜찮으냐.”
봄의 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마주치기만 하면 한겨울의 살얼음처럼 날카롭게 내뱉던 이전의 목소리와는 달랐다. 화운은 행여나 자신이 그 다정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에 서러움을 터트리지 않도록 마음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별것도 아닌 일로 심려를... 폐하를 귀찮게 하여 송구합니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 말을 하려다 말을 바꾸었다. 제가 과연 황제에게 심려를 끼칠 수 나 있는 이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화운의 그 말에 이한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렸 으나 고개를 숙인 화운은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적막이 찾아들었다. 화운은 이번에는 제가 먼저 입을 열어 말을 꺼내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으나 아직까지는 버거운 몸 상태와 방금 전까지 하염없이 어지러웠던 마음 탓에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화운의 시선 안에 있던 황제의 손 하나가 위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화운의 시선이 덩달아 황제의 손을 따라 오르려니 이내 허공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이던 황제의 손이 화운의 이마를 덮었다. 커다란 손바닥은 이마는 물론이고 화운의 눈까지도 가려와, 갑작스러운 닿음에 놀란 화운이 숨을 급하게 들이마셨다. 황제가 말했다.
“열은 없는데... 오히려 몸이 너무 차구나.”
“, 괜찮... 폐하, 저는 괜찮... 괜찮습니다....”
몇 번이나 말을 더듬었는지 모른다. 단지 황제의 손이 이마에 닿았을 뿐인데 화운은 귓가 가 멍멍해질 정도로 심장이 거세게 뛰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할 지경 이었다. 덜컥 숨이 막혀오는 것만 같아 화운이 황제의 앞에서 꼴사납게 헐떡이지 않기 위해 애써 숨을 고르려 안간힘을 쓰는 사이 아주 느린 움직임으로 화운의 이마와 눈을 덮었던 손을 내린 황제가 말을 잇는다.
“나는....”
바람이 불고 촛불이 일렁였다. 촛불과 함께 일렁이는 고요한 빛과 그림자가 황제의 얼굴을 어지럽게 수놓는다. 그리고 꼭 그만큼 어지러워 보이는 목소리로 황제는 말했다.
“나는 여전히 너를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하고 또 거듭해 보아도 도무지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