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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42)화 (4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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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연주원은 문득 가슴이 답답하여 뜰에 나와 서서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은 밤에도 세상을 온통 비출 만큼 밝던 달빛이 오늘따라 구름에 가려 보이지가 않았는데 연주원은 꼭 그것이 저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실 그는 지난번 부인인 숙진과의 대화 이후 줄곧 이리 답답한 상태였다.

현 황제가 선대의 황제들에 비해 후궁이 적고 아직까지도 후사를 보고 있지 않은 이유를 두고 모르는 이들 사이에선 이리저리 말들이 많았으나 연주원은 그 연유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짐작하고 있는 사람이다.

지금의 황제는 황후의 적장자로 태어나 일찍이 태자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다른 형제들이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영민했고 총명했으며 가진 성정 또한 어질고 선하여 태자를 모시는 그 누구도 그가 장차 안국을 높이 이끌 성군이 되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일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선대의 황제가 더없이 총애하였던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2황자가 사실은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겉으로는 형님을 더없이 아끼고 존경하는 아우인 척을 하면서 뒤로는 제 어머니와 함께 다른 형제들을 꼬드겨 그를 태자 자리에서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를 차지할 계획을 짰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인 황제의 건강이 지병으로 갑작스럽게 악화되며 상황은 더더욱 좋지 않게 흘러갔다. 결국 지금의 황제, 성이한은 저의 자리와, 가족과, 이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제 손으로 함께 자라왔던 형제들을 쳐내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황제는 짐짓 이제는 그 일을 다 잊은 척하였으나 연주원은 그가 여전히 그 날들을 악몽처럼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황후에게서 아직 소생이 없으니 다른 후궁들에게서도 후사를 보지 않고 있는 것은 황제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상처와 또다시 그런 비극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일이 분명했다.

“…….”

안개가 가득 차올라 있는 듯 답답한 밤의 공기 사이로 한숨이 내려앉았다. 아무리 깊은 숨을 내쉬어도 꽉 막힌 가슴의 답답함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화운이 저를 입궁시켜 달라고 하였을 때. 막내인 송운 대신 자신이 황제 폐하의 후궁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그리 매달려왔을 때. 주원은 저의 아들이 입궁하면 겪을 일을 눈으로 보듯 훤하게 예상할 수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하게 태어난 화운은 그 때문인지 자라는 내내 제멋대로 엇나가는 성격을 도무지 고치질 못했다. 어미인 숙진과 자신이 번갈아 아무리 혼을 내고, 어르고 별짓을 다 해도 소용없었다. 그러니 그런 아이가 황제의 후궁이 된다면 황제 폐하의 앞에서 얼마나 안하무인으로 굴지는 이미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었고 아비가 된 이로서 그것은 분명히 막아야만 했다.

그런데도 그 순간 형제들의 피가 묻은 황제의 자리에 앉아 울음을 삼키던 어린 황제의 얼굴이 떠올라 화운의 등을 떠밀고야만 아비는 얼마나 비정한 이인가.

연주원은 제 손으로 아들을 후궁으로 만든 그날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안국의 관료이자 황제의 신하였고 그분께 평생의 충성을 다짐한 자였으니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황제 폐하를 가장 우선시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었다. 다시 돌아간다고 하여도 연주원은 그날의 선택을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깊은 밤이면 사무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응당 제가 감당해야만 할 몫일 터.

황제 폐하를 모실 수 있게 되었다며 웃으며 황궁으로 간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르면 그 아이에게 아비로서 사과를 할 수 있는 날도 언젠가는 오겠거니. 그 날이 다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아비의 밤이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정안궁에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느냐.”

한참 동안 보고서들을 살펴보느라 말이 없던 이한이 무척이나 피로한 얼굴로 미간을 문지르며 물었다. 근심이 가득한 오 태감이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예, 폐하. 아직이옵니다.”

“흐음….”

“폐하.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이만 침전에 드시는 게 어떨는지요. 정안궁에는 내일 아침에 다시 들르셔도 충분할 겁니다.”

늦은 밤까지 소식을 기다리고자 하는 이한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오 태감의 입장에서는 황제 폐하의 안위보다 중요한 건 그 무엇도 없었다. 안 그래도 새벽같이 일어나 누구보다 일찍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분이 아니신가. 이토록 염려에 가득 차 늦어지는 취침은 반드시 옥체에 무리를 주기 마련이었다.

허나 정작 그 염려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이한은 그런 것 따윈 걱정도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뭔가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여태 깨어나지 못할 연유가 무엇이야. 태의가 제대로 살피고 있는 것이 맞나?”

황제의 얼굴과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 있었다. 제가 느끼는 피로가 문제가 아니었다. 일에 대한 짜증과는 결이 달랐다. 그는 정말로 온전히, 연화운의 상태가 나아지지 않은 데에서 오는 걱정으로 마음이 상하고 있었다.

“연빈마마께서는 그저 쇠한 기력을 조금 되찾을 때까지 잠들어 계신 것이니 이만 염려를 거두시지요, 폐하.”

“…….”

“…하오면 정안궁에 다시 사람을 보내 볼까요.”

오 태감의 물음에 이한은 습관처럼 손끝으로 탁자를 톡, 톡 치며 생각에 잠긴다. 지금 자신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걸 이한은 스스로도 이미 깨닫고 있었다. 황제가 되어서 어느 한 사람 때문에 이토록 사적으로 초조한 기분을 느낀다는 건 결코 좋지 못한 일임을 역시 알고 있었다.

문제는 알면서도, 그것을 알면서도 제 감정을 어찌 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살면서 이한은 이정도로 제 감정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한 일이 드물었다.

이한에게 있어 문제를 파악한다는 건 곧 그것을 해결한다는 뜻과 다름이 없었다. 삶의 어느 지점에서고 이한은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곧바로 그 자신을 돌아보고, 살펴보아 다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가 있었다.

헌데 이제 와 연화운 때문에.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는 존재 때문에 이한은 문제도, 답도, 그 무엇도 제대로 파악하지를 못하고 같은 자리를 계속 빙글빙글 돌고 있다. 이한이 생각할 때 이럴 때의 유일한 답은 잠시 동안 그에게서 완전히 멀리 물러서 신경을 끄고 가만히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 쓸데없는 상념의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이윽고, 이한이 입을 열었다.

“정안궁에 사람을 보내 상태가 어떤지 살피고, 아무리 늦은 시간이어도 상관없으니 연빈이 깨어나면 곧장 내게 이르라 다시 전해라. 만약에 내가 이미 잠들었다면 반드시 나를 깨워야 할 것이야.”

“…….”

“연빈이 깨어나면… 내가 바로 정안궁으로 갈 터이니.”

“…예, 폐하.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그러니 이미 내려놓은 해답을 눈앞에 두고도 그른 답을 쥐고야 마는 연유가 무엇인지. 이한은 착잡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눈을 감는다.

그 어떤 복잡한 생각들보다도, 지금은 그저 연빈이 깨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으음….”

“……? 마마? 정신이 드셨어요…?!”

화운의 침대 곁에 웅크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아진이 화운의 기척에 단번에 깨어나 다가오며 물었다. 오랫동안 깨지 않아서 아진은 물론이고 정안궁 궁인들의 속을 까맣게 태우던 화운이 이제야 간신히 눈을 뜨고 있었다.

“아진…?”

“예, 마마! 저 아진이에요! 저 알아보시겠어요…?”

화운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자 아진의 커다란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마마께서 어찌 이리 아프신 거냐고 훌쩍거리는 서서에게 왜 부정 타게 울고 그러냐 타박을 주며 침소에서 쫓아낸 아진이지만 정작 누구보다 울고 싶었던 건 그 자신이었던 모양이다.

몇 번 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방 안의 풍경과 아진을 번갈아 바라보던 화운이 이내 아진과 시선을 마주치며 힘이 하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알아보지… 어찌 너를 알아보지 못하겠어….”

“마마… 어디 아픈 곳은 없으시구요?”

“응. 이제 괜찮아….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어?”

사실 지금 화운은 속이 좋지 않았고 미미한 두통 역시 느끼고 있었지만 벌써 코를 훌쩍이고 있는 아진의 앞에 차마 어딘가 좋지 않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루를 꼬박 누워 계셨어요. 지금은 새벽이구요….”

“아….”

“갑자기 쓰러지셔서 얼마나 놀랐다구요.”

아진이 서둘러 부드러운 수건으로 화운의 이마에 맺힌 땀을 조심스럽게 닦아 주며 말했다. 그 손길에도, 목소리에도 어려 있는 진한 염려에 화운이 애써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으며 아진을 향해 미안하다 사과를 꺼내려 하였을 때.

다소 낮아진 목소리를 한 아진이 먼저 말을 이었다.

“황후마마께서 다녀가셨어요.”

“아… 마마를 괜히 귀찮게 해드렸구나.”

“그리고….”

“……?”

“그리고 폐하께서도요.”

갑자기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말을 듣고도 그 뜻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눈만 깜빡이던 화운이 이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다녀가셨다고…?”

“예, 마마.”

“나를 보러…?”

“예. 마마를 보러 오셨어요.”

“……혹여 다른 연유가 있으셨던 건 아니고? 나를 보러 오신 것이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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