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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이 순간 따끔하여 이한은 순간 화운의 뺨에 무슨 문제가 있는 줄 알았다. 놀라 다시 손을 가져다 대보니 이번에는 따끔한 것이 제 손끝이 아니라 가슴 언저리인 것을 깨달았다. 화운과 닿은 곳으로부터 알 수 없는 감각이 돋아나 혈관을 타고 온몸을 돌아다니며 멋대로 찌르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화운의 뺨은 다소 건조한 것 같았으나 또한 부드러웠다. 자그마한 얼굴은 이한의 한 손에도 다 들어올 것만 같았다. 이한은 그게 뭐라고 더없이 조심스러워져 손을 펴지도 못하고 손끝으로만 가만가만 화운의 뺨을 매만지고 있었다.
서늘한 체온을 제 손으로 확인하자 이한은 자신의 마음까지도 덩달아 스산해지는 것을 느낀다. 순종적이고 담담한 태도로 제 앞에 있을 때에도 그 모습이 불편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이리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모습은 그보다 배는 더 불편하여 보기 힘들었다.
"무얼 잘했다고 앓아눕고 있는지....”
괜히 한 번 흘려내는 목소리에는 내용과는 달리 염려가 가득 담겨 있는 것만 같다. 차라리 전처럼 꾀병을 부린 거였다면 화는 났을지언정 지금처럼 속이 쓰리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화운이 전처럼 자신을 거짓으로 대하진 않았단 생각에 안심이 되기도 했다.
마음속이 온통 모순으로 가득 찼다. 이리 몸이 좋지 않았으면 어제 함께 있을 때 말을 하지 그러했나 싶다가도 그랬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졌을까 싶기도했다.
만약 어제 수화원에서 화운이 아프다고 말을 하였어도 이한은 딱히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을 터다. 모르는 척을 하거나, 믿지 않는 척을 했을 게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또 그런 거짓말로 내 관심을 끌려 하느냐 화를 내었을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을 거듭하다 이한은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화운 역시 그런 짐작을 했기에 아픈 것을 묵묵히 참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
그때,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히 누워 있던 화운이 살짝 몸을 들썩이며 입을 열었다. 여전히 화운의 뺨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던 이한은 놀라 황급히 손을 떼고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폐....”
이한은 화운이 깨어난 줄 알고 몹시 당황하여 일어선 채로 어쩔 줄 몰라 했으나 이한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화운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채로 잠꼬대를 하듯 입을 열고 있었다.
“폐하.......”
그리고 화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신을 부르는 말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이런 상황에서조차 화운이 이토록 간절하게 오로지 자신을 부르고만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이한은 심장이 미어지는 것만 같은 낯선 감정이 밀려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이토록 욕심이 없는 절박함을 이한은 몰랐다. 일생에 단 한번도 가진 적이 없고 받은 적이 없었다. 이전에 연화운이 저에게 보여 주었던 마음과는 완전히 다른 감정이었다.
아무리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고 한들 사람이, 사람에게, 이토록 변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다시 끙끙 앓으며 폐하를 찾는 연화운의 모습을 보며 제가 어찌해야 좋은지 짐작할 수 없던 이한이 막 그로부터 등을 돌려 침소를 나서려고 했을 때, 약을 들고 들어오던 아진이 황제를 보곤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폐하...! 벌써 돌아가시옵니까?”
“...그래.”
“소, 송구하오나, 폐하... 연빈마마께서 깨어나실 때 폐하께서 계셔주시면... 마마께서 많이 ... 많이 좋아하실 것이옵니다....”
황제의 위엄에 바들바들 떨면서도 아진은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을 꺼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주인을 위한 말이다. 감히 일개 궁인이 폐하께 건방지게 굴었다며 경을 칠 수도 있었으나 아진은 제 주인이 오매불망 그리던 폐하께서 조금이나마 오래 그의 옆을 지켜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비록 마마께서 변하신 뒤로는 전처럼 대놓고 폐하를 찾지는 않았으나 아진은 제 주인이 여전히 마음 깊이 폐하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제 앞에 꿇어앉은 아진을 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적막의 압박감에 아진이 저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었을 때,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원한다면 정안궁에서 나갈 수 있게 해주마.”
아진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너무나도 예상치 못한 말이라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는데 그렇다고 하여 폐하께 감히 되묻는 일은 또 할 수가 없어 고개만 조아리고 있으려니 황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사가에서부터 연빈의 곁에 있었다고 하였지. 그러니 네가 연빈의 곁에서 그 누구보다 많은 고초를 겪었을 것을 안다.”
"더 이상 연빈을 모시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마. 다시는 연빈이 너를 괴롭히지 못하게 황명을 내려 줄 것이다.”
“그, 그것이....”
“앞으로 황후궁에서 황후를 모시게 된다면 감히 연빈이라고 하여도 너를 찾아내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니. 어떠하냐.”
황제의 목소리는 낮고 일견 너그러워 보였으나 또 한편으로는 몹시도 긴장하여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도 같았다. 너무도 당황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던 아진의 시선이 문득, 저만치 침대에 누워 있는 연빈을 향했다.
정안궁을 나가는 것. 연빈에게서 벗어나는 것. 그 것은 사실 아진이 살아오면서 줄곧 바라마지 않았던 일이다. 끝을 알 수 없는 악의와 멸시에 지쳐 목숨을 걸고 도망이라도 칠까 생각했던 날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 폐하가 친히 아진에게 묻고 있었다. 그토록 지긋지긋한 연화운으로부터 너를 구해 주겠노라고.
하지만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화운을 눈에 담은 그 순간 아진은 그가 제게 건네주던 고맙다는 말들을 떠올렸다. 너는 내게 더 귀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던, 그런 믿을 수 없는 말들을 해 주던 주인의 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저를 보는 따스한 시선이. 제가 하는 말 한마디 에도 감동 받아 일렁이던 눈동자가 그렇게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와 아진의 마음을 감싸왔다. 어느새 숨을 고르게 갈무리한 아진이 이내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폐하... 소인은 마마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 지금이야 연빈이 잠시 변한 척을 하고 있어도 언제든 다시 제 성질머리대로 돌아가 너를 괴롭힐 수 있다는 건 누구보다 네가 가장 잘 알 터인데.”
“예, 폐하. 소인이 어찌 그걸 모르겠습니까. 하오나... 하오나 폐하....”
이한은 언제나 연빈의 곁에 붙어 있는 이들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연빈이 아무리 제 앞에서는 본성을 감추고 대단한 연기를 한다고 한들 하루 종일 완벽하게 연기를 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이한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를 모시는 아진이라면 이 모든 것이 전부 거짓임을, 연빈이 조금 더 치밀하게 계획한 계략이나 다름이 없음을. 그라면 제게 증명해 줄 수도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한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아진은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소인은... 마마를 한 번 더 믿고 싶습니다.”
“비록 더없이 짧은 시간이지만 마마께서 소인에게 보여 주셨던 눈빛을. 제게 건네주셨던 마음과 배려 그 모든 것들을 소인은 도무지 거짓이라 치부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이한은 연화운이 제게 보여 주었던 눈빛을. 제게 보여 주었던 배려와 염려들을 떠올렸다.
“믿기 힘드실 줄을 압니다. 소인 또한 그러했습니다. 허나 폐하, 미천한 소인이 감히 폐하께 간절히 청하옵니다.”
이한이 아무리 무시하고 조롱해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제게로 묵묵히 보여 주던 연화운의 모습들이 아진의 목소리를 타고 자꾸만 이한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부디 한 번만... 딱 한 번만 마마를 다시 보아 주신다면 마마께오선 결코... 폐하를 다시 실망 시켜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연화운을 가장 믿지 못해야 마땅한 이가 이토록 간절하게 황제에게 화운을 믿어 줄 것을 빌도록 만드는 것이 과연 계획된 거짓으로 가능한 일일까.
이한은 다시 한 번 시선을 돌려 홀로 고통과 싸우 고 있는 연화운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주인을 잘 모셔라.”
“...... ”
"그리고... 연빈이 깨어나면 안정전으로 바로 사람을 보내도록.”
“...예? ...아! 예, 폐하! 바로! 바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하게 좋을 말이라고, 이한은 금세 환해진 얼굴로 몇 번이나 대답을 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아진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정안궁의 앞뜰에 내려서자 궁을 돌아다니는 어린 궁녀들이 이한의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겁을 집어 먹은 표정으로 행여나 연빈의 눈에 뜨이기라도 할까 몸을 웅크린 채 숨듯이 돌아다니던 지난날과는 달리 그들은 다만 얼굴에 걱정하는 빛을 드리운 채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이한의 발이 달라진 정안궁의 길을 걸었다.
혹여라도 이것이 시작일까봐. 행여나 앞으로 더욱 더 믿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기라도 할까 봐.
정안궁을 걷는 이한의 발걸음이 더없이 무거웠다. 이것은 곧, 마음이 무거운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