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40)화 (40/167)

40

"연빈의 상태는 들었소?”

"예, 폐하. 심각한 것은 아니고 원체 약한 몸이 물에 빠진 일로 충격을 받은 데에다가, 최근에 줄곧 마음이 불안하고 편치 않아 기력이 쇠하여 그런 것이라 하였습니다. 자세한 것은 태의를 불러 하문하시지요.”

“심각하지 않다면 된 것이지, 무얼....”

황제는 겉으론 연빈의 상태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처럼 대답하였으나 다시 그의 얼굴을 살피는 황제의 얼굴엔 명백한 염려의 감정이 어려있다. 그 얼굴을 보며 잠시 입꼬리를 올렸다 내린 황후가 이내 침대에서 물러서며 말했다.

"폐하. 저는 이제 보아야 할 일이 있어 물러날 터인데....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연빈을 위하여 폐하께서 잠시 머물러 주시겠습니까.”

“...궁녀들이 어련히 알아서 챙겨 줄 것을 굳이 내가 있을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황후가 이리 마음을 쓰니 내가 잠시 있다 가지. 황후는 이만 돌아가 보아도 좋소.”

황제의 발이 또 한 걸음, 침대 가까이로 다가왔다. . 그는 마치 황후의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있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었으나 그 목소리에 담긴 솔직한 감정을 눈치채지 못할 황후가 아니다.

"허면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폐하.”

"...그래. 수고 많았소, 황후.”

“예, 폐하.”

황제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물러나던 황후는 문을 나서기 전 잠시 걸음을 멈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행동을 생전 처음 해보는 사람처럼, 화운이 누운 침대에 아주 조심스럽게 걸터앉는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삶이란 것은 본디 누구도 예상 할 수 없는 곳으로 향하기 마련이고 그것은 이토록 존귀한 황제라고 하여도 피해갈 수가 없는 모양이라고,

황후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걷는다. 정말로, 무엇도 예측할 수가 없는 날이었다.


"폐하께서 가셨다고?”

숙비, 비영의 물음에 맞은편에 앉은 정빈, 송현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회가 끝나자마자 서둘러서 바로 가셨다고 하던걸요.”

"흐음....”

평소 송현은 비영을 언니처럼 따랐고 비영 역시 송현을 친동생처럼 챙겨 주곤 했다. 두 사람의 궁은 제법 가까운 거리에 있어 평소에도 왕래가 잦았는데 , 오늘도 문후가 끝나고 돌아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송현은 냉큼 운화궁으로 걸음을 한 참이다.

송현의 말을 들은 비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최근에 폐하께서 지나치게 연빈과 자주 계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빈의 처소에 납신다고 하시어놓고 정안궁에만 들렀다 돌아가신 일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제는 연빈과 함께 수화원에 들렀다. 그러더니 오늘은 예전이라면 연빈이 아픈 것 따위 안중에도 없으셨을 폐하께서 소식을 듣자마자 정안궁으로 걸음을 하였다니. 황제가 연빈에게 이 정도로 관심을 두었던 일은 전에 없었다.

“....진짜 아픈 것은 아니겠지요?”

비영의 눈치를 살살 보며 눈동자를 굴리던 송현이 다소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영은 여전히 생각에 잠긴 눈으로 바닥의 어딘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런 수작이 어디 한두 번이냐. 이번에도 폐하를 모시고 싶어 그러한 것이겠지.”

가벼운 것처럼 말을 하면서도 비영의 표정이 여전히 풀어지지 못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하께서 정안궁으로 향하셨기 때문이었다. 모르지도 않으실 텐데. 꾀병을 부리는 일에 불과하다는 걸 누구보다 황제 폐하께서 가장 잘 알고 있으실 텐데. 그런데도 폐하께선 조회를 마치자마자 연빈을 보러 가셨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느라 비영은 갑자기 머리가 다 아파올 지경이다.

그때, 여전히 침울한 표정의 송현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치만... 연빈이 몸이 약한 건 사실이잖아요....”

비영의 시선이 송현의 얼굴로 향한 건 그 순간이었다. 동글동글한 얼굴이 수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한 비영의 눈동자에 당황한 빛이 어렸다. 비영이 입을 열었다.

“지금 연빈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야...?”

송현이 앉은 자리에서 크게 엉덩이를 들썩이며, 대답했다.

“예? 아니요! 그럴 리가요! 언니도 차암...! 제가 연빈에게 얼마나 무시를 당했는지 언니가 가장 잘 아시잖아요. 제가 어찌 연빈... 연빈 같은 걸 걱정하 겠어요! 절대! 절대 아니에요!”

“......”

“절대!”

양손을 연신 파닥거리며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아니라고 거듭 말하는 송현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아주 의심스러워 보였다. 비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송현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정말 아니라니까요......”

떨어지지 않는 비영의 시선에 송현이 다시 한 번 눈썹을 늘어트리며 항변을 하였으나 누가 보아도 전혀 아닌 게 아닌 송현의 모습에 곁에서 있던 송현의 측근 궁녀인 주아만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

이한은 혹여나 제가 큰 소리라도 낼까 숨을 죽이며 조심스럽게 침대 끝에 걸터앉아 화운을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안궁으로 오는 내내 이한은 제가 이리 아픈데 어찌 이제야 오시냐며 제게 같잖은 투정을 부리는 연화운을 애써 상상해 보았으나 막상 마주한 화운은 황제가 온 것도 모른 채로 누워 있다.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입술까지 창백하여 핏기가 없는 것을 보자니 심장이 절로 무너져 내리는것 같았다. 이한의 기억속 어떤 연화운도 지금처럼 아파 보이진 않았다. 이한을 속이기 위해 부러 약을 먹고 앓았던 화운의 모습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만지면 바스라질 것처럼 생기가 없는 뺨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한은 문득, 조금 전 막 정안궁에 도착 했을 때 제가 보았던 장면을 떠올린다. 그러니까 황후가, 연화운의 뺨을 매만지고 있던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건 분명 화가 나는 것과 엇비슷한 감정이었는데 스스로 화를 낼 연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황제는 기척을 내려는 오 태감을 막아서며 잠시 그들을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황후 때문이었다. 이한은 그런 생각을 해본다. 아무리 그가 자신의 후궁이라지만 또한 사내이기도 한데 황후가 외간 사내에게 손을 대었기에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인가 하고,

“그래. 그럴 수 있지....”

누구에게 하는지도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이한의 시선은 여전히 화운의 뺨에 닿아 있다. 저도 모르게 손끝이 움찔거렸다. 황후는 어째서 저 뺨을 매만진 것인지 궁금했다. 아니, 그보다 그가 손끝으로 느낀 감각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보는 것만큼 부드러운가. 수척하게 아픈 이이니 피부가 상하여 거칠 것 인가.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사소한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밀려들어왔다.

“...... ”

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의 손이 아주 천천히 화운의 얼굴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태어나 처음 본 무언가를 마주하는 것처럼. 너무 겁이 나고 두려우나 더없이 신비로워 다가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를 대하는 것처럼.

황제의 손끝이. 태어나 처음으로 내밀어진 어떠한 마음이.

너무나도 조심스럽고도 서투른 무엇이, 이윽고 화운의 뺨에 닿았다.


연화운은 정안궁이 싫었다. 속을 모르는 이들은 황제의 애정을 조금도 얻어내지 못한 주제에 저리도 아름다운 곳에 머물고 있는 그를 두고 운이 좋다 이야기를 하겠으나 화운은 이따금 할 수만 있다면 이 궁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다.

정안궁은 어느 후궁을 향한 황제의 총애의 산물이었다. 황후도, 그 어떤 비빈들도 감히 꿈꿀 수 없는, 황제의 유일한 정인의 자리를 차지한 이를 위한 애정의 증표였다. 황제는 황궁의 어느 건물에도 뒤지지 않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궁을 지어 정인에게 바치는 것으로 그가 가진 연정의 깊이를 증명했으니 정안궁이 곧 황제의 마음이었다.

그러니 연화운은 때때로 이 공간이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는 말이다. 황제의 총애는커녕 마음 한 자락도 얻어내지 못했으면서 주제넘게 이곳을 차지하고 있다고, 연화운은 정안궁의 어디를 가든 그런 비웃음을 듣는 것만 같았다.

그런 날이면 누구든 괴롭혀 울음을 터트리게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감히 자신을 비웃을 수 없게, 무시할 수 없게 단단히 본때를 보이고 싶었다. 하찮기 그지없는 것들이 백성이라는 이름하에 황제의 연민을 사는 것도 싫었고, 그 천한것들을 괴롭혔다고 하여 자신을 탓하는 황제 역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무엇이라고, 주인이 원하면 죽음조차 당연한 이들이 도대체 무어라고, 연화운은 황제가 그들을 위해 자신에게 목소리를 높일 때마다 더더욱 악독하게 아랫것들을 다스렸다. 그래야지만 그들이 감히 황제의 동정을 등에 업고 자신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황제는 점점 더 정안궁에 걸음하는 날이 줄었으므로,

연화운은 정안궁이 싫었다. 드넓은 담벼락도, 수려한 정원도, 넓고 아름다운 연못도 죄다 꼴 보기 싫었다. 정안궁의 모든 것은 연화운에게 언젠가, 누군가는 손에 쥐었으나 저는 결코 얻지 못한 황제의 연정을 떠오르게 했다.

바로 그것이 정안궁의 그 어디에서도 연화운이 마음 편히 머물지 못했던 이유였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