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폐하. 혹시 손이 아프십니까.“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이한은 문득 곁에서 들려온 오 태감의 목소리에 허? 하고 멍청한 표정을 한 채로 고개를 돌렸다. 오 태감이 다소 염려스러운 얼굴을 한 채로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손을 바라보고 계시기에....”
“아....”
“태의를 부르라 이를까요.”
오 태감을 말을 듣고 나서야 이한은 제가 손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한은 대답을 잠시 미룬 채로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여전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들꽃처럼 가볍던 이의 손이 저의 손바닥 위를 간질이던 순간을 떠올렸다. 조금만 힘주어 잡아도 바스러질 것 같은 그 가냘픔이.
연화운을 가냘프다고 생각했던 날이 있었던가. 오늘처럼 살포시 그의 손을 잡았던 날은 또 있었다. 함께한 날은 수도 없이 많은데 이한은 이제와 마치 연화운과 처음 만나 처음 무엇을 해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가슴이 간질거렸다.
아니. 연화운뿐만이 아니다. 연화운과만 처음이 아니라 이한은 황후와도, 그 어떤 후궁과도 이러한 어색함과 간질거림을 느낀일이 없었다. 도무지 떠 날 줄을 모르는 감각을 손에 쥐듯 주먹을 꽉 움켜쥔 이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점점 더 무시하기 힘든 이 낯선 감정들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오진성.”
한참 만에 황제가 오 태감의 이름을 불렀다.
“예, 폐하.”
태감이 허리를 굽히며 대답하자 짧은 적막이 또 한 번 흐른 후, 이한이 말했다.
“정안궁에 전해라.”
“.......”
“앞으로는 수화원에 자유롭게 드나들어도 좋다고”
주먹 쥔 손 안쪽으로 서늘한 체온이 맴돌았다. 이한은 차마 그것을 떨쳐낼 수가 없음이었다.
"마마. 이게 무슨 뜻일까요?”
들뜬 마음을 애써 꾹 내리누른 목소리로 아진이 화운의 곁에 다가와 물었다. 화운은 막 내관 하나가 물러난 자리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안정전에서 사람이 다녀갔다. 황제 폐하께서 연빈의 수화원 출입을 친히 허하셨다는 전언이었다. 어쩐지 손끝이 저릿하여 화운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한 번 쥐어 보려니 아진이 다시 말을 잇는다.
“폐하께서도 이제... 마마를 믿으시는거 아닐까요?”
크기는 작았지만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 화운이 더 속상할까 겉으로 내색하진 않아도 폐하께 외면당하는 주인의 처지를 누구보다 가장 많이 걱정하고 있던 아진이었으니 갑작스러운 황제의 태도 변화에 저도 모르게 기대감이 차오르는 모양이다.
그런 아진이 귀여워 가볍게 미소를 지은 화운이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입을 열었다.
“믿으시기보다는... 어쨌든 노력하는 내 모습을 가상하게 봐주신 것이겠지.”
“으음....”
“본래 그런 분이 아니시냐. 물에 빠진 이후... 그 이후 내게 줄곧 모질게 구셨던 것이 마음에 걸리신 모양이야.”
말을 하며 화운은 오늘 수화원에서 함께하였던 황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제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고 가까이 다가와 영혼까지 꿰뚫어 볼 것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던 심연처럼 검고 깊던 눈동자를.
그 눈을 떠올리자 순식간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때에는 당황하여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 그 눈빛을 돌이키며 화운이 느끼는 감정은 설렘이나 기대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두려움에 가까다. 그때 마주한 황제의 시선은 당장이라도 제가 가진 모든 거짓을 낱낱이 밝혀내려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차가워진 얼굴을 하고 저를 바라보며 감히 연화운을 꾸며내고 있는 너는 누구냐고 묻는 황제의 목소리를 화운은 줄곧 상상하고 있었다.
“허나... 어쨌든 폐하께서 마마의 노력을 좋게 보셨으니 이런 말씀도 하신 거겠지요. 정말 잘되었습니다.”
“....그래. 그런 거겠지.”
“그럼요, 마마. 두고 보세요. 머지않아 폐하께서 마마를 다시 찾아 주실 것이에요.”
기뻐 들떠 있는 아진에게는 차마 다른 티를 낼 수 없어 다시 말없이 미소를 지어 주는 화운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은 밤이었다.
화운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초가 다 타버린 건지 사방이 온통 깜깜해 화운은 잠시 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애써 기억해내야 했을 정도였다. 눈을 깜빡이는 대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하운의 삶과, 죽음처럼 차갑던 그날의 감각과, 이후에 맞닥뜨리게 된 연화운의 삶들이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귓가에 다시 한 번 울음소리가 들려온 건 화운의 시선이 서서히 어둠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처음엔 그저 바람소리 같은 것을 잘못 들었나 하였지만 다시 들려온 소리는 더 이상 헷갈릴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한 사람의 울음 형태를 하고 있다.
화운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밤이라지만 사방이 너무 어둡고 고요했다. 보통은 새벽이라도 당직을 서는 아이들이 앞을 지키고 있기에 자다가 깼을 때 이 정도로 적막 한 기분을 느끼는 일은 거의 없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마치 한밤의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만 같았다.
“아진...?”
그 위화감이 어쩐지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어서 화운이 조금 목소리를 높여 아진을 불러 보았지만 밖에서 되돌아오는 소리는 없다. 보통 때라면 아진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화운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안으로 들어왔어야 하는데,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여 보아도 느껴지는 기척은 조금도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울음소리는 그 순간에도 계속 귓가에 들려오고 있다.
결국 더 기다리지 못한 화운이 이불을 걷어 천천히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바짝 다가온 여름은 아무리 밤이라고 하여도 추울 일이 없는 계절이었다. 헌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한기가 드는 것처럼 온몸이 시려와 화운은 몸을 살짝 움츠린 채로 천천히 침소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아진? 서서...?”
화운은 연신 정안궁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걸음을 옮겼다. 내실을 지나고 정안궁 전각의 밖에 다다를 때까지 대답하는 이는커녕 눈에 보이는 이 역시 아무도 없어 화운은 절로 긴장하며 두 주먹을 꽉 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구름이 짙은 밤인지 달빛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정안궁의 뜰은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울음을 따라 걸었다. 겁이 나지 않는건 아니었으나 이상하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누구의 울음소리인지, 무엇 때문에 울고 있는 건지, 위험이 있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화운은 그 소리를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쩌면 그 울음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져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누구의 것이라고 딱 확신하여 짐작할 수는 없었으나 이상하게 이미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불안하게 떨리는 화운의 걸음은 그렇게 저를 이끄는 소리를 따라 움직였고 이윽고 화운이 도착한 곳은. 화운이 저도 모르게 이끌려와 멈추어선 곳은.
그곳은 정안궁의 연못이었다. 연화운이 몸을 던졌고, 하운이 그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으며, 하운이 죽음을 맞이함과 동시에 연화운으로서 새롭게 살아가게 된,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되었던 바로 그곳.
화운은 눈을 살짝 찡그렸다. 저만치 보이는 연못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아까부터 듣고 있던 울음소리의 주인이 바로 그라는 것을. 화운을 깨우고, 여기까지 홀로 걸어오게 만든 울음소리의 주인이 바로 그라는 것을 단박에 깨달았다.
“....누구십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화운이 물었다. 겁이나 도망치 고 싶은 기분과 이대로 다가가 그를 위로하여 주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그는 여전히 연못가에 걸터앉아 고개를 숙인채 울고 있을 뿐 화운의 말에 대답이 없었다.
“무슨... 무슨 일인지 제게 알려 주시면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누구인지도, 무슨 이유인지도 지금은 알 수 없으나 이토록 어두운 밤에 홀로 저리 서럽게 울고 있다면 분명 그만한 힘든 이유가 있을 터였다. 화운은 자꾸만 겁이나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조금 더 그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하여 마침내 화운이 그의 형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가녀린 어깨를 떨며 서럽게 울고 있는 그의 모습이 정말로 너무나 눈에 익어 익숙하다는 생각을 막 하였을 때. 그때까지도 그저 고개를 숙인 채로 있던 이가 서서히 고개를 들어 화운을 바라보았다.
“.....!”
화운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을 뻔도 하였다. 순식간에 사방에 물이 차오른 것처럼 숨이 막히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온몸을 휘감았다. 화운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물에 빠져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사람처럼 헐떡이며 뒷걸음질을 친다.
누군가가 죽어버린 연못에 앉아 밤이 다 지도록 눈물을 쏟아내고 있던 이는 다름 아닌.
연화운.
하운이 아닌, 이제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이전의 연빈, 연화운이었다.
"아... 안 돼...!”
화운은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 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화운이 덮고 있던 부 러운 이불 위로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화운은 이미 어지러워진 이불을 두 손으로 꼭 부여잡고 허리를 굽히며 고통스러운 숨을 내쉰다. 마치 누군가가 심장을 뜯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연화운이다. 제가 꿈에서 본 것은 분명히 연화운 이었다. 지금은 같은 외형을 하고 있다곤 하나 화운은 제가 꿈에서 본 이가 지금의 자신이 아닌 과거의 연화운인 걸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