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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은 오래전부터 연화운의 미모는 특별할 것이 없다고 여겼다.
처음 입궁을 하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은 때까 지는 이한도 물론 사내가 어찌 저리 선이 곱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 신기하다고 생각하긴 하였으나 그것은 단편적인 감상에 불과했다. 이한은 애초에 비빈들의 외모에 큰 관심이 없었고, 여인인 다른 후궁들 역시 각자의 매력을 가지고 있는 미인들이었기에 화운이 가진 미색이란 한번도 이한에게 있어 유달리 큰 의미는 되지 못하였다.
이후엔 모두가 알다시피 외형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대단한 성질머리 탓에 더더욱 치켜세워 줄 것이 되지 못하였고 말이다.
이한이 황후를 비롯해 자신의 비빈들을 대하는 감정은 무엇도 그들의 미모로부터 비롯된 것이 없었기에, 연화운이 가진 미모는 그가 행하는 수많은 악행을 정당화시켜 줄 그 어떤 의미도 될 수 없었다.
그러니 이한은 이것을 두고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칭할 것이다.
연화운의 잘난 얼굴 따위 이미 질리도록 보아왔는데. 수없이 많은 날들을 지나며 이한에게는 이미 오래전에 무의미하게 변해버렸는데.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 왜 이제 와서..
가까이 다가서 들여다본 화운의 얼굴에 이다지도 동요하고 있는 것일까.
이한의 말 한 마디에도 세상이 전부 들썩이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댈 땐 언제고 최근엔 이한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 담담하기만 해 이한의 속을 심란하게 만들던 그였다. 그런데 지금 그 눈동자가 오로지 자신만을 가득 담은 채로 당황하여 떨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 한구석에서 기묘한 희열이 차올랐다. 단언컨대, 전에는 절대로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다.
궁금증이 일었다. 갈증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티 하나 보이지 않는 창백한 뺨도, 무엇을 발랐는지 촉촉하게 붉어진 입술도. 한 손에 쥐면 부러지기라도 할 것처럼 가느다란 목선에 흐르듯 늘어진 신비로운 색의 머리카락도 전부 이한의 호흡을 상하게 했고, 시선을 어지럽게 했다.
수화원을 가득 채운 꽃들로부터 요란스러운 향이 흘러나왔다. 아니, 어쩌면 꽃의 향이 아니라 누군가의 향일 수도 있었으나 이한은 그리 생각하지 않으려 자꾸만 애꿎은 입술을 깨문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하려 하는지. 선명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폐하...?”
온통 일그러지는 세상 속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흔들리던 이한의 정신을 일깨운건 의아함을 가득 담은 화운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한은 자신이 화운의 허리를 안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려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
누구보다 놀란 건 이한 그 자신이었다. 그는 황급히 손을 거두며 거의 품에 안다시피 하고 있던 화운을 밀어내었다. 갑작스러운 힘에 화운이 잠시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해 비틀거리자 이번에도 이한은 저도 모르게 그를 붙들려 손을 내밀었다가 황급히 거두어들인다.
자신이 가진 모든 감정과 행동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사이 다행히 넘어지지 않고 선 화운이 이한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이한은 화운을 향해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 이었다. 그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는 자신을 탓하는 대신 오히려 걱정하자 이상 하게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전에는 늘 쉽게 흥분하고 악을 지르는 화운을 진정시키기 위해 달래거나 화를 내는 건 전부 자신의 몫이었다. 그런데 근래 두 사람의 관계에서는 이한이 매사 제멋대로 변덕을 부리고 있고 화운은 그런 이한의 기분을 살피고 있었으니 그들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이 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오 태감을 부를까요, 폐하.”
화운이 이한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오며 물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 이한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뺨을 어르려 했던 일 같은 건 벌써 잊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한 팔에 안긴 연화운의 마른 몸을, 코끝에 흩어지던 숨결을, 옅은 색의 눈동자에 가득 담겨 있던 자신의 모습이나 저도 모르게 어르고 싶었던 뺨 같은것을 여전히 신경 쓰고 있는 건 오로지 성이한 그 자신 뿐인 것만 같아 마음이 쓰렸다. 이한은 애써 단호한 목소리를 꾸며 입을 열었다.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다. 나는 괜찮으니.”
이한은 괜찮았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 괜찮아야만 했다. 이한이 말을 이었다.
“.... 이만 가자.”
“폐하. 제게 따로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제게 이르고자 하신 말씀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따를 것입니다.”
굳은 표정으로 몸을 돌리는 이한에게 화운이 굳이 한 번 더 물었던 건 조금 전 마주했던 황제의 눈빛에 알아차리기 힘든 많은 감정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한 번뿐이 아니었다. 화운은 벌써 여러 번 더없이 혼란스러워 보이는 이한을 마주했다.
그럴 자격이 없는 걸 알면서도 욕심이 났다. 제가 사실은 천민에 지나지 않는 하운이라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터무니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분이 눈앞에 있으면, 손을 뻗어 만질 수도 있는 거리에 있으면 화운은 저도 모르게 그분이 지고 있는 짐을 나누고 싶다는 허무맹랑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 황제를 만났던 그때에는 다만 아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만을 바랐는데. 비록 너무나도 드넓어 평생 스치지조차 못하더라도 그분이 머무시는 황궁 안에 머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할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감히 꿈도 꾸지 못할 그분의 후궁 자리를 차지하고 나니 자꾸만 더한 것을 꿈꾸게 되고 욕심을 내게 되고야 만다.
그것은 아마도 황제가 화운에게는 처음부터 지금 까지 유일하게 꿈꾸는 미래와도 같은 분이었기 때문 일 터였다.
그것을 참기가 힘들어서. 염치가 없다는 걸 알면 서도 도무지 참고 싶지가 않아서. 화운은 여전히 가라앉은 눈동자를 하고 있는 이한의 앞에 천천히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슨 짓이냐 하고 묻는 이 한의 목소리를 들으며, 화운이 입을 열었다.
“지엄하신 천자께서 지고 가시는 무게를 어찌 제가 짐작할 수가 있겠으며 어찌 그것을 제가 함께 나누어 지기를 바라겠습니까.”
“다만 폐하, 저는... 저는 폐하께서 혼자서 모든 것을 다 감당하려 하시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화운은 그것이 저에게 허락된 말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제까짓 게 감히 폐하께 드릴 수 있는 말이 아님을 알았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화운은 말하고 싶었다. 그분의 곁에는 능력 있고 좋은 분들이 많을 테니 황제께서 모든 일들을 홀로 다 떠안기보다는 조금이나마 그 짐을 나누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제가 굳이 말을 얹지 않아도 저보다 더 총명 하고 더 황제를 걱정하여 살피는 사람들은 차고도 넘쳐날 것이다. 제 말 같은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화운은 제 입으로 자신의 감정을 전하고 싶었다.
이한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화운은 여전히 꿇어앉은 터라 고개를 들어 이한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어 긴장된 숨만 참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황제의 차가운 목소리가 쏟아질 것 같았다. 네까짓 게 무언데, 분수도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느냐고 자신에게 호통을 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화운은 그런 목소리들 대신에, 너에게는 감히 그런 말을 올릴 자격이 없다는 말 대신에 제 앞에 내밀어진 손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황제가 꿇어앉은 화운에게 내민 손이었다.
당황한 화운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이한을 바라보았다. 화운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한의 눈동자는 여전히 더없이 깊기만 하여 어린 감정을 쉬이 짐작할 수 없었으나 그가 화운에게 내밀고 있는 손끝은 흩어지지 않은 채 여전히 거기에 있다.
홀린 사람처럼 화운이 황제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가만히 얹었다. 황제의 손은 크고 또 뜨거웠다. 희고 자그마한 화운의 손이 올라가니 뼈마디가 도드라진 황제의 손은 홀로 있을 때보다 두 배는 더 커보였다. 그 손이 자신의 손등까지 감싸 쥐자 화운은 마치 심장이 옥죄어오는 것 같은 감각에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천천히 화운을 일으킨 황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화운은 그 말을 어서 듣고 싶기도 했고 영영 듣고 싶지 않기도 하였는데, 어떤 것이 진심인지는 스스로도 알 길이 없었다.
몇 번이나 숨을 참고 내뱉기를 반복한 황제가, 이윽고 말을 꺼냈다.
"그만 돌아가자.”
그것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한 대답은 결코 아니었으나 황제께서 자신의 말을 무시하거나 비웃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심이 되어 화운은 저도 모르게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돌아가자. 그 말이 너무나도 평범하고 아무것도 아닌 말이라 문득 가슴이 벅차오르기까지 했다.
돌아가자.
황제에게 이 아무것도 아닌 말 한 마디를 듣기까지 화운은 너무나도 많은 일들을 겪어왔다.
“예, 폐하.”
조금만 더. 아주 잠시만 더. 그렇게 밀려오는 마음을 꾹꾹 내리누르고 손을 거두며 화운이 대답하자 황제는 잠시 이제는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몸을 돌린다.
오 태감을 비롯한 궁인들이 대기하고 있던 곳까지 걸어가는 동안 두 사람은 더 말이 없었으나 각자 의 마음에 품은 세상은 고요하게 진동하고 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