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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35)화 (35/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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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과 화운 사이에 정적만이 흘렀다. 이한은 화운의 대답이 하도 어이가 없어 그랬고, 화운은 이한이 무슨 소릴 하는지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내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먼저 입을 건 이한이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어서 정안궁으로 돌아가서 수화원엔 얼씬도 하지 말거라.”

“나는 지금. 수화원으로, 혼자서 갈 터이니.”

일부러 내 속을 터지게 하려고 그러는 건지 뭔지. 진지하게 그를 마주하여 내 마음속에서 몰아내고 말겠다고 다짐했던게 불과 직전인데 도무지 도움을 주지 않는 연화운 때문에 또 마음이 이리저리 어그러져 버렸다.

그래. 이런 식으로 계속 불편하게 내 마음에서 안 나가겠다는 것이지. 이한은 이를 갈며 화운을 두고 그대로 수화원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정말로 화운이 정안궁으로 돌아가 버릴까 봐 뒤통수가 자꾸 따끔거리긴 했으나 여기서 돌아볼 정도로 가벼운 황제는 아니었다.

“...연빈마마.”

저만치 성큼성큼 멀어지는 이한의 등을 영문 모를 얼굴로 바라보던 화운을 부른 건 어딘지 모르게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의 오 태감이었다. 화운이 고개를 돌려 태감을 바라보자 그가 말했다.

"폐하의 뜻은... 연빈마마와 함께 수화원을 둘러보시겠다는 뜻입니다.”

“나와 수화원을?”

오 태감의 말에 너무 놀란 화운이 순간 목소리를 높여 되물었다. 태감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마.”

“하지만 폐하께서는 나를....”

말끝을 줄이는 화운의 눈동자에 지난번 수화원에서 황제를 마주쳤던 날의 기억이 어렸다. 그 날 우연히 마주친 일을 가지고도 황제는 그토록 불쾌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는데 정말로 이대로 그분을 따라가도 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화운은 저만치 가마도 타지 않고 제 발로 걷고 있는 황제의 등을 다시 바라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공에 흔들리는 청흑색의 용포가 햇살 아래 반짝였다. 이유도 없이 입술이 말라 화운이 마른침을 한 번 삼켰을 때, 오 태감이 슬그머니 몸을 옆으로 열어 길을 내어 주며 말했다.

"어서 따르시지요.”

화운은 여전히 이게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하였으나 오 태감은 폐하의 곁에서 오래 머물며 누구보다 성심을 가장 잘 아는 이일 터였다. 달리 거절할 명분이 없던 화운의 걸음이 이내 이한이 먼저 걸었던 길을 조심스럽게 따라 걷는다.

하늘거리는 청록색 옷자락이 이윽고 황제의 용포 곁에 섰다. 황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연화운의 걸음으로는 감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앞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우선은 오 태감 혼자만이 알고 있기로 했다.


“어? 저기에 가시는 분이 폐하 아닌가?”

근무 교대를 끝내고 식사를 하기 위해 관사로 돌아가던 길, 서천은 도명의 말에 고개를 돌려 저만치 길의 반대편으로 멀어지고 있는 황제를 보았다.

정안궁이 아니면 기껏해야 외궁을 전전하는 이들은 황궁에 있어도 좀처럼 황제를 볼 일이 많지 않았다. 때문에 도명은 이미 저만큼 한참이나 멀어진 황제를 조금이나마 더 보기 위해 고개를 잔뜩 세우고 있었으나 서천은 황제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서천이 시위로 황궁에 들어온 건 조금 더 안정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일 뿐, 다른 특별한 욕심이 있던 건 아니었다. 원하면 궁 안에서 먹여 주고 재워 주기까지 한다니 먹는 것과 자는 것이 모두 특별히 고단한 서천과 같은 이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 ”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하운이 떠올랐다.

하운은 황궁으로 들어온 이유가 돈도 명예도 무엇도 아닌 오로지 황제 폐하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서천은 아주 재밌는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크게 웃음을 터트렸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 웃어?' 하고 묻는 하운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 곧바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만 했었다.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서천이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지도 모르고, 도명은 이제 아주 미간까지 찌푸려가며 여전히 그들의 뒤를 시선으로 좋으며 중얼거렸다.

황제가 아니었다면, 황제가 그날 너의 앞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그러면 너는 여전히 황궁밖의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었을까.

멍하니 도명의 옆에 서서 그런 생각에 빠져들고 있던 서천의 귀에, 그 순간 한 이름이 들려왔다.

“...연빈마마이신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아주 날카로운 칼이 귀를 찌르고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격통에 숨 쉬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호흡을 잃어버린 물고기처럼 고통스럽게 가슴을 들썩이며 서천이 도명이 바라보고 있던 곳을 함께 바라본다.

"연빈... 이라고...?“

“얼굴은 잘 안 보이지만 머리카락에 붉은 기가 돌잖아. 옷도 궁에서는 처음 보는 형태고....”

도명의 말을 흘려들으며 서천은 고통 어린 시선으로 그의 뒤를 가만히 응시했다.

연빈.

연빈 연화운.

타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홀로 살아남은.

하운을 죽게 만든 장본인인 연화운이 저 멀리 황제와 함께 걸어가고 있다.

한 사람은 평생 황궁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살았을 하운을 이 황궁으로 이끌었고, 한 사람은 터무니없는 행동으로 무고한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으니.

서천은 피가 맺히도록 두 주먹을 세게 쥐며 두 사람이 아주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한과 화운은 적막한 공기 속에 함께 걷고 있었다. 오 태감이 주위를 모두 멀찍이 물린 바람에 뒤에 붙어 따르는 이도 없었다. 두 사람이 내딛는 발걸음 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 말고는 사위를 채우는 소리조차 없다.

지난번 갑자기 정안궁을 찾았던 밤에도 제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연빈이 떠오른 이한은 짐짓 무뚝뚝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너는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절대로 입을 열지 않기로 작정이라도 한 거냐.”

가만히 발끝을 보고 걷던 화운은 그제야 다소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이한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아, 하고 짧은 탄성을 내고는 황급히 말을 잇는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폐하께서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셔 저를 부르신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언제 너를 불렀나? 내가 수화원에 온다고 하니 좋다고 네가 따라온 것이지.”

이한의 대답에 화운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리며 화운이 이한을 쳐다보려니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 화운을 마주 본 황제가 대단히 뻔뻔한 표정으로 말한다.

“왜. 아니냐?”

물론 그리 말하는 이한은 얼굴에 조금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고, 슬쩍 민망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으나 하여간에 자신은 화운에게 따라오라 말을 한 적이 없고 멋대로 제 뒤를 따라온 건 그이니 자신은 당당하다고 애써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런 이한의 앞에서 화운이 가볍게 바람처럼 웃음을 터트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예. 맞습니다. 폐하. 제가 멋대로 폐하의 시간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화운이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그리 대답을 할 때, 이한은 화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곱게 휘어지는 눈매이며 부드럽게 호선을 그린 입술 따위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어 정작 화운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들리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연빈이 저를 향해 웃는 얼굴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폐하아, 하고 달라붙으며 눈웃음을 살살 치던 그런 얼굴은 이미 질리도록 많이 보았는데.

지금 저의 눈앞에 있는, 온전히 저를 향한 연화운의 미소는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어 이한의 그 얼굴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다.

그때 화운은 이것이 이한이 가진 다정함의 연속이라 생각하는 중이었다.

화운은 이미 그날 밤 달빛 아래에서 황제를 마주 했을 때 더없이 어지러웠던 그분의 얼굴을 엿본적이 있다. 연화운이 지난날 벌였던 과오 때문에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변하겠다고 다짐하는 이를 향해 쏟아부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황제의 마음에도 무겁게 남아 있음을 이미 짐작하였기 때문에 화운은 지금 이 순간 역시 그 다정한 마음의 연장선으로 여겼다.

황제는 지난번 수화원에서 저를 그렇게 쫓아내버린 것에 마음이 쓰여 오늘 자신을 수화원에 올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화운으로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그분의 다정함에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터져버린 웃음을 갈무리하려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다시 든 화운은 저의 코앞으로 바짝 다가온 황제의 얼굴을 마주했다. 무섭도록 굳어진, 서늘한 얼굴이다.

오 태감과 아진을 비롯한 궁인들은 얼마나 멀리 떨어진 것인지 볼 수가 없고 오로지 아득한 봄의 향기만 가득한 그 공간에서, 화운은 저의 코끝으로 흩어지는 황제의 숨결을 느낀다. 가까이 다가선 새카만 동공이 엄청난 압박이 되어 화운의 온몸을 휘어 감았다. 그가 저를 어디 붙들어 놓은 것도 아닌데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고 그의 시선을 피할 수조차 없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절대자의 위엄이었다.

“폐하....”

그것이 낯설고 어려워서. 감히 일개 천민이었던 신분으로는 그토록 높고 존귀한 시선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화운은 어깨를 움츠리며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황제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려고 했다. 물러서 무슨 연유인진 알수 없으나 황제의 기분을 상하게 만든 자신의 죄를 청하려고, 그리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화운이 채 반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황제의 손이 화운의 허리를 감싸 멀어질 수 없게 붙들어 당겼다.

오히려 더 가까워진 거리를 두고, 이한이 입을 열었다.

“물러나도 된다고 허락하지 않았다.”

황제가 코앞에서 드러내는 엄청난 기세에 화운은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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