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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34)화 (34/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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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고개를 돌려 볼까 하는 생각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이한이 생각할 때 황제가 되어서 안간힘을 써 고개를 돌리는 것보다는 이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이 들어서. 이내 이한의 입이 열렸다.

“내려라.”

“가마를 내려라!”

안 그래도 민망한데 굳이 목소리를 높여 제 명을 다시 한 번 크게 소리치는 오 태감의 얄미운 얼굴을 한 번 노려본 이한은 이내 천천히 바닥을 딛고 내려서서 몸을 일으킨다.

아직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쿵, 쿵 뛰었다. 단지 뒤에 그가 있음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감각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다. 이한은 저도 모르게 숨을 한 번 크게 쉬어 차오르는 감정들을 토해낸 뒤 천천히 뒤를 돌았다. 화운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느리게 화운을 향해 다가간 이한이 이내 그 앞에 서서 화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어나라.”

"감사합니다, 폐하.”

화운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몸을 일으켰다. 이한의 시선이 그제야 화운이 입고 있는 옷에 가 닿았다. 평소 화운이 입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생김새의 옷은 단번에 이한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당장 대나무 죽선을 펼쳐들고 풍류를 읊을 미공자 같은 행색이 이상하게 이한의 뱃속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말없이 화운을 한참이나 살펴보던 이한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꼴이 그게 무어냐.”

딴에는 또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해댈까 봐 마음을 꾹꾹 억누르고 억눌러 뱉은 말인데 그러다보니 이번에도 또 본의 아니게 아주 쌀쌀맞은 말투가 튀어나와 버렸다. 어째서 연화운의 앞에만 서면 이놈의 말이, 이놈의 행동들이 뜻대로 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이한이 속으로 자신을 탓하는 사이 화운이 대답했다.

"이렇게 입는 편이 제게는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 한동안 입지 않던 옷을 꺼내 보았습니다.”

“.......”

“...혹여 보시기에 불편하십니까, 폐하.”

차분하게 물었지만 속으로 적잖이 신경을 쓰고 있는 건 화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옷은 화운이 이전 연빈의 옷들을 보며 하도 더 수수한 것은 없냐 매번 묻자 불현듯 오래전 이런 형태의 의복을 가지고 있었음을 기억해낸 아진 덕분에 찾을수 있었던 옷이었다. 화운의 입장에서야 확실히 편하고 또 사내인 제게 맞는 옷인것 같았으며 법도에도 어긋나지 않는 옷이라 하여 냉큼 입었던 것 인데, 막상 황제의 앞에 서니 괜히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진의 말에 따르면 이전의 연빈은 입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몇번을 제외하곤 한번도 이 옷들을 입은 적이 없다고 했다.

보기 불편하냐는 화운의 질문에도 이한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것은 무어라 대답을 하기가 아주 어려운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불편하냐고 묻는다면 불편했다. 이상하게 눈에 거슬렸고, 낯설었으며, 영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과연 온전히 부정적인 느낌의 불편함이냐 한다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청아한 색의 옥관으로 붉은 기가 도는 머리카락의 절반을 올리고 비녀를 꽂아 끝에 살랑거리는 술을 달아 마무리한 것까지. 화운의 모습은 거슬리고,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만큼 색달랐고, 잘 어울렸으며,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불편하다고도, 좋다고도, 싫다고도, 잘 어울린다고도 대답할 수 없던 이한은 결국 고개를 돌려 주위를 한 번 둘러보는 시늉을 하고는 괜히 말을 돌리며 물었다.

“가마는 어디에 버려두고 걸어가는 것이지?”

“... 근래에 너무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아 일부러 가마를 두고 걸어서 황후마마께 문후를 드리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화운의 대답에 이한이 잠시 정안궁으로 가는 길을 돌아보고는 다시 입을 연다.

“.....황후궁에서 정안궁으로 오고 가는 길은 그리 짧지 않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 봄이라 날이 따스하고 오늘은 몸 상태도 좋아 무리는 아닙니다.”

“...뭐, 누가 더 힘들까 봐 그러는 줄 아느냐?”

“......?”

“괜히 길 한복판에 걸어가니까 내가 지나가다 리적거려 하는 말이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매에 힘을 주면서도 이한은 굳이 못난 말을 덧붙였다. 그리 말을 하였으면 당당하기나 할 것이지. 말은 해놓고 이상 하게 눈치는 보여 괜히 또 딴 곳을 보며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데 시야의 사각에 걸린 화운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이한의 말에도 하나 타격 받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 화운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들며 말했다.

“그러셨습니까, 폐하.”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고저가 없는 담담한 목소리가 마치 봄의 공기처럼 이한의 귓가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이한은 방금 전까지 널을 뛰듯 요동치던 제 안의 감정들이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주 묵직한 무언가로 바뀌어 심장의 바닥에 쌓이는 것을 느낀다.

이한은 그의 신경을 거스르고 싶어 부러 고약하게 말을 했지만 그는 황제의 말이 하나도 거슬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그런 주제에 이한은 그가 혹시 라도 상처 받았을까 눈치를 봤지만 그는 주의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상처는 조금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순식간에 무거워진 이한의 시선이 화운의 얼굴 위에 멈췄다. 바로 이것이다. 바로 이러한 담담함이 문제였다. 제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그저 전부 옳다는 듯 받아 넘기는 연화운의 바로 이러한 면이 이한을 미치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달랐으니까. 물에 빠지기 전의 연화운과 너무나도 다른 점이었으니까. 이한은 정말로 화운은 이런 모습이 낯설고 어려워 마음이 들끓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이한은 문득 이토록 낯선 연화운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속이라면 샅샅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가 보여 주는,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을 전부 다 알아내고 싶다고 말이다.

이전에는 낯선 감정들이 겁이나 도망쳤다. 그를 마주하면 조롱하고 모욕하기만 했다. 당장의 혼란스러움을 피하는 데에는 그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지금 여기에서 이한은 다시한번 이 감정을 그저 모른 척하고, 없는척하고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그리하여서는 영영 이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이한은 깨달았다.

도망쳤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똑바로 마주 보고, 별것 아닌 것을 확인하면 그다음부터는 무시할 수 있는 일을 두고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쳤기 때문에 두려움이 자꾸만 힘을 키워 이한을 잡아먹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한은 이제 도망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닐 게 분명한 저의 감정을 똑바로 마주 보고자 했다.

한참 동안 말이 없이 화운을 바라만 보던 황제의 입에 천천히 열렸다.

“.... 나는 지금 수화원에 갈 것이다.”

이한은 제 말이 다소 뜬금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나 속내를 알아채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라 여겼다. 과연 화운은 이한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들었는지 눈을 한 번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예, 폐하. 걱정 마세요.”

“......?”

“저는 이대로 정안궁으로 돌아갈 터이니 지난번처럼 수화원에서 저를 마주치시는 일은 없으실 겁니다.”

저도 모르게 잠시 긴장을 하고 있다가 생각지도 못한 화운의 대답에 맥이 탁, 풀린 이한은 하도 어이가 없어 말했다.

“....너는 정말 눈치가 없느냐?”

옆에선 오 태감의 생각을 잠깐 빌어 말한다면, 물론 이한이 할 말은 아니었다.

“마마. 이제 그만 잊어버리세요.”

아까부터 침대에 철푸덕 쓰러지듯 누워 끙끙거리고 있는 정빈, 송현을 향해 그의 궁녀인 주아가 달래 듯 말을 꺼냈다. 그러자 송현이 끌어안고 있던 이불을 툭, 내던지며 몸을 일으켜선 통통한 볼따구를 시무룩하게 부풀리며 말했다.

“나 진짜 너무 멍청해 보였지.”

“...아니에요, 마마. 굳이 연빈과 싸워서 좋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잘하셨어요.”

주아는 분명 오늘 송현이 연빈에게 말을 걸기 전 굳이 연빈과 부딪힐 일을 만들지 마시라 말리긴 했으나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 그러게 왜 제 말을 듣지 않았냐 주인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괜히 잠자고 있는 연빈의 성질을 건드려 제 주인이 본전도 못 찾고 악담만 잔뜩 듣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잘 넘어갔으니 다행인 일이다.

물론, 본전을 못 찾은 게 아니라 송현이 아예 가진 것을 전부 제 손으로 고이 싸서 연빈에게 바친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했으나 그건 그냥 기분 탓으로 여기기로 하자.

주아가 달래는 말에도 영 시무룩한 표정을 풀 줄 모르던 송현이 말을 이었다.

“아니 근데... 거기서 연빈이 갑자기 나를 위로하는데... 이상하게 갑자기 우리 오라버니 생각이 났단 말이야.”

송현의 말을 들은 주아가 아, 하는 작은 탄성을 흘렸다. 이제야 송현이 왜 그 순간 그렇게까지 온순해졌는지 알 것 같았다.

막내인 송현에게는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오라버니가 한명 있는데, 그는 어릴 때부터 송현을 다정하게 챙겨 주어 서로 우애가 깊었다고 했다. 궁에 들어 와서도 부모님보다 오라버니가 그립다는 말을 더 자주 하였을 정도니 그를 향한 송현의 애착이 어느 정도인지는 더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송현이 자그마한 입술을 쭈욱 내밀며 중얼거렸다. 말대로 송현의 오라버니와 연빈은 조금도 닮지 않았다. 닮기는커녕 송현은 이전에 연빈을 두고 사내 같다는 생각조차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문득. 제가 시비를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더없이 온화한 표정으로 저를 보며 폐하께서 곧 정빈을 위로해 주실 거라 말하는 연빈을 보니 이상하게 갑자기 제가 심술을 부릴 때마다 저를 품에 안고 어르며 달래주던 오라버니가 떠올라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우리 오라버니가 얼마나 다정한 분이신데 어디 연빈에 비교를 해....”

처소로 돌아와 송현은 계속 그렇게 생각을 했다. 감히 연빈 따위를 소중한 오라버니와 비교하다니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그렇게 자신을 계속 다그쳤다.

그런데도 말을 멈추고 다시 생각에 잠기면 오늘 저를 바라보던 연빈의 얼굴 위로 제가 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줄 듯 상냥한 표정의 오라버니가 자꾸만 떠올라서. 이제는 마음대로 볼수 없는 오라버니 대신 마음만 먹으면 제 발로 달려가 볼수 있는 거리에 있는 연빈이 자꾸만 자꾸만 떠올라서.

송현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 그대로 다시 침대에 누워버렸다. 아무래도 가족이 너무 그리운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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