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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금껏 화운이 한 번도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던 정빈, 송현이었다. 묘하게 말끝이 날카로운 목소리에 화운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동글동글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정빈이 말을 잇는다.
“하기야. 어젯밤 제 처소로 오시던 폐하를 중간에 가로채 가셨으니 기분이 좋기도 하시겠지요.”
“마마….”
곁에 선 궁녀가 걱정스러운 듯 정빈을 불렀으나 잔뜩 뿔이 난 것처럼 보이는 정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빈을 노려보고 있다.
이전의 연빈과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은 후궁은 숙비였으나 사실 연빈에게 가장 무시를 당한 이를 꼽으라면 그는 단연코 정빈이었다. 품계는 같은데 집안은 한참 모자란 정빈을 연빈은 언제나 만만하게 보았다. 폐하의 후궁이 이리 적지 않았다면 상재나 겨우 되었을 것이 빈이 되었다는 폭언을 서슴지 않았을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 하랴.
허나 연빈의 기세가 하도 드세 평소 정빈이 먼저 시비를 걸어오는 일은 드물었는데 근래 화운이 보여 준 태도가 아무래도 영향이 있었는지 오늘의 정빈은 단단히 마음을 먹은 얼굴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전의 연빈이 아닌 연빈은, 화운은 영문을 알 수가 없어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정빈을 향해 물었다.
“폐하를 가로채었다니요…?”
“모른 척하지 마세요. 어젯밤 폐하께서 분명 제 처소로 차를 드시러 오시기로 하셨는데 연빈이 중간에 정안궁으로 가로챈 거 아닌가요?”
그제야 화운은 정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어제 갑자기 정안궁으로 찾아온 황제는 사실 정빈의 처소로 가던 길이었나 보다. 화운이 황급히 정빈을 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어제 잠시 정안궁에 들르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저에게도 갑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부러 제가 모신 게 아니에요.”
너무나도 평범하고 별것 아닌 대답이었다. 하지만 정빈은 바로 그 ‘평범하고 별것 아닌 대답’ 때문에 오히려 더 당황하고 말았다.
기세 좋게 따지고 들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 송현은 그에게 제대로 한 소리 들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네가 주제가 안 되어 폐하를 모셔가지 못한 걸 어디 와서 따지냐는 말 정도는 당연히 나올 줄 알았다는 말이다.
송현은 내심 요즘 주안성을 온통 소란스럽게 하고 있는, 연빈이 달라졌다는 말을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근래에 황후궁에서 마주친 연빈의 모습은 확실히 이전과 지나치게 다름이 있었으나 다른 이도 아니고 천하의 연빈을 쉽사리 믿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송현의 바로 눈앞에 있는 연빈은 목소리의 높이 하나 오르지 않은 태도로 담담하게 송현을 향해 말하고 있다.
“폐하께서는 정안궁에도 아주 잠시만 머물렀다 가셨습니다. 자세한 연유는 저로서도 알 수 없으나 심경이 매우 복잡해 보이셨으니 정빈의 처소에 가지 않으셨다면 아마도 급하게 생각나신 일이 있으셨던 것이 아닐는지요.”
“아니, 그….”
“게다가 아시다시피….”
너무도 번듯한. 너무도 그럴듯한. 정말로 너무나 이해가 가는 정상적인 말을 하는 화운의 대답에 송현이 당황하는 사이 화운은 지극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가로채고 싶다 하여 어디 정빈에게 폐하를 가로챌 수가 있겠습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다. 현 후궁들 중 황제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건 연빈이 유일했으니 아무리 그가 송현을 향해 별것도 아닌 집안의 보잘것없는 이라고 악을 쓴들 황제의 앞에서라면 연빈은 감히 정빈을 이길 수 없다. 누가 들어도 맞는 말이었다.
문제는, 그 말을 한 사람이 연빈이라는 점이다. 그 맞는 말을 한 게 다른 이가 아니라 연화운 그 자신이었다.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서러워하거나 분해 죽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담담한 목소리로. 마치 그 사실이 아무렇지 않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분명 폐하께서 다시 정빈을 찾아 위로하여 주실 것입니다.”
도무지 연화운의 것으로는 생각할 수가 없는 그런 말간 얼굴로 말을 하는 연빈에게 결국 놀라고 당황하고 심지어 순간적으로 자신이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어버린 송현이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그, 그리 말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연빈….”
옆에 선 궁녀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저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말싸움에는 영 소질이 없던 송현이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남았는가.”
연빈까지 물러간 곳에 멀뚱히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숙비를 바라보며 황후가 물었다. 숙비가 눈을 새침하게 뜨고 황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연빈을 대하는 황후마마의 태도가 심상치 않은 것 같은데… 저의 괜한 생각입니까?”
숙비의 말에 황후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내가 할 말인 것 같은데… 숙비야말로 오늘은 연빈에게 말 한 마디 붙이지 못하질 않았나?”
그러자 숙비의 입이 대번에 삐죽 튀어나왔다. 숙비는 그대로 다시 황후의 앞으로 걸어와 본래 제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더니 투정이라도 부리는 듯 시무룩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말도 마십시오. 아무리 비꼬고 시비를 걸어도 저를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이며 예, 마마. 하고 순응하니 오히려 제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아 더 말을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황후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숙비가 말을 잇는다.
“어디 그뿐입니까. 성격이야 어떻게 그 불같은 속을 꾹꾹 내리누르며 참을 수 있다고 쳐도.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묘하게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단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라….”
“분명 생김새가 어디 달라진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황후마마께서도 그러십니까?”
숙비의 물음에 황후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진심이라면 변하지 말고, 거짓이라면 들키지 말라 일렀을 때 마주하였던 연빈의 더없이 무겁고 어둡던 표정이 일순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황후가 입을 열었다.
“숙비.”
순식간에 무거워진 목소리에, 가벼운 태도로 말을 하던 숙비가 이내 자세를 똑바로 고치고 고개를 숙이며 ‘예, 황후마마.’ 하고 대답한다. 비빈의 수가 워낙에 적은 탓에 평소 그들은 이전의 황후와 비빈들의 사이와는 다르게 제법 친근하고 친밀하게 지내고 있었으나 황후가 이토록 위엄을 담은 목소리로 입을 열면 누구도 감히 토를 달 수 없었다.
무거워진 공기를 사이에 두고, 황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네와 나는 이 황궁에서 가장 폐하를 잘 알고, 가까이 모신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
“…제게는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황후마마.”
“허나 앞으로 우리는, 이전에는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는 폐하의 모습을 마주할지도 모르겠어.”
이어진 말이 쉬이 무슨 뜻인지 알아챌 수 없어 다소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는 숙비의 얼굴을 바라보며, 황후가 다시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대단한 태풍이 닥칠 것 같으니 숙비도 괜히 휩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야.”
황후의 그 말을 듣는데 어째서 조금 전 보았던 연빈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지 숙비, 비영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저 앞에 가는 게 연빈 아니냐?”
아까부터 뭘 그리 찾는지 어가에 오른 채로 이리저리 목을 빼고 두리번거리던 이한이 저만치 앞에 걷는 이를 보고 냉큼 허리를 곧추세우며 말했다. 곁에 걷던 오 태감이 앞을 슬쩍 바라보더니 이내 대답을 한다.
“예, 폐하. 연빈마마이옵니다.”
“몸도 약한 것이 가마는 또 어디에 내팽개치고 걷고 있는지.”
아닌 게 아니라 지난밤에도 약이나 먹고선 파리한 안색으로 저를 맞이하던 이가 왜 멀쩡한 가마를 두고 걸어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리 춥거나 더운 계절이 아니라고 하여도 걸어가기엔 결코 짧은 길이 아니건만 하여간에 제멋대로인 이가 아닐 수 없다.
“멈출 것 없이 그냥 지나치자. 마주 대하는 것도 피곤하니.”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를 가늠하며 이한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 말에 고개를 숙인 오 태감은 감히 황제에게 들키지 않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왜냐하면 본래 황제는 지금 이 시간, 이 길로 굳이 지나가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청건전에서 안정전으로 가는 일반적인 길은 이 길이 아니었다. 물론 여길 지나서도 갈 수야 있으나 그리 되면 적잖이 돌아가게 되니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굳이 이 길로, 그러니까 황후궁에서 정안궁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이 길로 갈 연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황제의 가마가 지금 이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순전히 황제가 그리하자 일렀기 때문이었다. 그래놓고 마주 대하는 것도 피곤하니 그냥 지나치자 말하는 이한의 속내를 짐작하지 못할 오 태감이 아니다. 물론 황제에게 감히 그것을 지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연빈에게 가마가 다가서자 기척을 눈치챈 그가 뒤를 돌아보곤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올렸다. 이한은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곤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으나 눈동자가 자꾸만 한쪽으로 쏠리는 것까지는 막아내지 못했다.
“…멈춰라.”
그리고 가마가 연빈을 막 지나쳤을 때 저도 모르게 불쑥 입에서 튀어나온 말도, 이한은 막아내지 못했다.
이한의 가마는 잠시 동안 그저 가만히 멈춰 있었다. 가마를 멈추라고 말한 뒤 이한이 아무런 명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운은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였다. 황제의 가마가 완전히 지나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황제가 일어나라 명하지도 않았으니 화운 역시 섣불리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한은 팔걸이를 꾸욱 쥔 채 앞을 노려보았다가, 눈동자만 뒤로 빼꼼 굴려 보기를 반복한다. 가마가 연빈이 꿇어앉은 곳보다 너무 앞쪽에 있어서 눈동자를 굴리는 것만으로는 화운이 보이지 않아 속이 답답했다.
저도 모르게 멈추라고 말을 하긴 했으나 조금 전 그냥 지나치자고 제 입으로 했던 말을 떠올리면 영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그냥 다시 가자고 말을 하고 싶은데 바로 뒤에 연화운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또 도저히 그냥 가자,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