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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32)화 (3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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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못한 화운의 말에 아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화운을 바라본다. 화운은 연고를 바르느라 걷고 있던 소매를 내리며 말을 잇는다.

“아진 너도, 정안궁의 아이들도 어찌 그리 순진하고 착한지. 내가 너희에게 모질게 군 날들이 얼마인데 고작 이만큼 노력했다고 이렇게 나를 챙겨 주고 있으니....”

“그, 그건....”

“그러니 내가 이리도 네게 고마워하고 있는 거야.”

화운의 말에 아진의 눈동자가 또다시 일렁였다. 이대로 있으면 또 지난번처럼 부끄러움을 모르고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 괜히 코를 한 번 훌쩍거린 아진이 황급히 주제를 바꾸려 내도록 궁금했던 것을 떠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마마....”

“응?”

“마마께오서는... 그러니까 마마께오서는 이제....”

“무슨 말을 하려고 그리 망설여.”

화운은 아진의 마음을 조금 더 편하게 해주려는 의도로 시선을 마주치며 부드럽게 물었으나 오히려 그 탓에 말문이 막힌 아진은 잠시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마마께오서는 이제... 예전처럼 폐하가 좋으시진 않은 건가요...?”

이번에 놀라 말문이 막힌 건 화운이었다. 너무나도 생각지 못한 질문에 누가 귓가에 대고 아주 커다란 종을 울려댄 것처럼 생각이 먹먹했다. 아진은 어깨를 다소 움츠린 채로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예전처럼 폐하를 찾지도 않으시고... 오시지 않는다고 슬퍼하지도 않으시고... 잡지도 않으셔서.......”

“아....”

“물론 폐하를 거스르지 않으려 하시는건 잘 알고 있지만요. 그래도 혹시 심경에 큰 변화가 있으셨던건 아닌가 싶어서....”

사람은 누구도 큰일을 겪고 나면 변하기 마련이고, 그중에서 죽다 살아난 일은 아마도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일 중 가장 큰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연못에 빠졌던 사건이 화운을 이렇게까지 변하게 만들었다는 걸 이제 아진은 이해했다.

그래서 아진은 문득 궁금해진 것이다. 그 일이. 화운을 이렇게까지 바꾼 그 엄청난 일이. 혹시나 폐하를 향한 화운의 마음에도 영향을 끼쳤을까, 하고. 화운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전처럼 폐하께 집착하는 마음이 들지 않아서 그러 하였던 건 아닐까, 하고,

아진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마마의 속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무엇이라도 제대로 알아야 했다. 아진은 화운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사람이고 제가 화운을 속속들이 모두 알고 있어야 곁에서 그를 돕고 보호할 수가 있을 테니 말이다.

“나는....”

하지만 화운은 아진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하는 것이다. . 이 마음을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변한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연화운의 마음과 하운의 마음은 애초에 같은 것이 아니었음을. 제게 벌어진 일을 털어놓지 않고는 그 마음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이전의 연화운이 가졌던 마음이 연정이라고 한다면 화운은 지금의 자신이 황제에게 가지고 있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화운은 그분을 경외했다. 동경했고, 내도록 그리 워하기도 했다. 황제에게 조금이나마 가까워지고 싶어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 욕심을 부렸고 기꺼이 제가 가졌던 이전의 삶을 포기하고 완전히 다른 세계로 몸을 던졌다. 허면 이러한 마음을 연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동시에 화운은 감히 황제의 품에 안기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전의 연화운처럼 그분을 독점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만을 바라보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저를 외면한다고 하여 화가 나지도 않았다. 허면 이러한 마음은 또 연정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 가.

하운의 삶은 이전까지 계속 아주 작고 작은 우물속에 웅크리고 있던 개구리와 같아서, 감정에 익숙하지 않은 건 그 역시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한참 만에, 화운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다른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우선은 그저 폐하의 뜻을 성심껏 따르고 싶을 뿐이야.”

화운은 아진이 저의 말에 다른 의문을 품으면 어찌하나 잠시 긴장했지만 그 대답을 들은 아진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문득 비장한 표정이 되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네. 알겠어요, 마마. 그럼 저도 그리 알고 있을게요. 이제 어서 주무세요.”

다행히 아진은 화운의 감정에 대해 더 물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내 화운이 침상에 몸을 눕히자 아진이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런 아진의 모습을 보며 화운은 잠시, 제가 이리 깍듯하게 모시고 있는 이가 사실은 정말 제 주인이 아니라 저보다 못한 천민이라는 것을 알면 얼마나 배신감을 느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문득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침대 곁에 둔 촛불을 불어 끄다 말고 아진이 말했다.

“아까 말씀하신 거요.”

“응?”

“마마께서 고작 이만큼 노력하신 것으로 믿는 제가 이상한 거라고 하신 말씀이요....”

“아... 으응.”

어두워진 풍경 안에서, 따스한 시선 하나가 화운을 향했다.

“폐하께서는 어쩌다 한 번 마마를 마주치실 뿐이지만 저는... 저는 마마께서 깨어나신 후로 줄곧 곁에 있었잖아요.”

“이리 변하신 마마를 저는 누구보다 가장 많이 보았으니까... 그러니까 저는 마마를 믿은 거예요.”

그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화운은 생각했다. 혹여 나중에 제가 감춘 일이 들통이 난다면, 사실은 제가 연화운이 아니고 하운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 다면,

“누구라도 저처럼 가까이에 있었다면 분명 마마를 믿을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설령 그게 황제 폐하시라고 하더라도요.”

그때에도 나는 과연 아진의 준 믿음을, 정안궁의 아이들이 내게 준 그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

과연 폐하께 지금만큼의 마음이라도 얻어낼 수가 있을까.

절대로 불가능할 것만 같은 생각들이 어둠을 타 고 마음을 어지럽혀서. 화운은 그저 아진을 향해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아침 문후를 하느라 비빈들이 모두 모인 황후궁에는 아주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최근 들어 언제나 그러했듯, 연빈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본래 남후궁의 의복은 다른 여인인 후궁들보다 자유로운 편이었다. 선대의 황제가 워낙에 몸이 약한 자신의 정인이 의복 때문에 불편하거나 힘들지 않게 남후궁의 의복에 관한 기준을 전부 뜯어고쳤기 때문이다.

안국의 남후궁은 원하면 겉으로 드러나게 바지를 입을 수 있었고 그 위로 앞뒤, 혹은 양옆이 트인 같옷을 치마처럼 덧대어 입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머리 장식 등에 대한 규정도 전부 바꿔버려 남후궁은 머리 위에 무겁게 올려야 하는 장식의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전부, 단 한 사람을 위해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당대에 이르러 남후궁만이 입을 수 있던 그 옷은 거의 볼 수가 없게 되었는데, 그것은 유일한 남후궁인 연빈이 그리 변형된 옷보다는 다른 비빈들이 입는 옷을 똑같이 차려입는 걸 즐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늘의 연빈은 이전에는 입지 않았던 남후궁의 복장을 하고 앉아있다. . 최근의 그는 늘상 새롭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완전히 달라진 의복을 입고 앉아 있는 모습은 또 한번 모두를 놀라게하기에 충분했다.

얇은 발목을 단단하게 묶은, 움직임에 따라 반짝 거리는 은실로 옅게 자수가 놓인 흰 바지를 안에 입고 서로 색의 깊이가 다른 청록색이 층층이 드리워진 하늘거리는 겉옷을 두르니 이전에는 느낄 수 없던 독특한 정취가 느껴져 절로 시선이 머물렀다.

황궁이 황제 이외에도 많은 사내들이 머물고 드나드는 곳이긴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이는 오로지 연빈 한 명뿐이다. 그는 얼핏 보면 고운 옷을 차려입은 미공자 같기도 했고, 동시에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후궁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다른 후궁들도 황후궁에서 연빈을 마주한 그 순간부터 자꾸만 시선을 돌려 그를 흘끔거리고 있는 것이다.

“연빈.”

그리 애매한 분위기가 가득하던 문후를 마치고 돌아서는 연빈을 부른 건 황후였다. 예상치 못한 부름에 다소 긴장한 얼굴을 한 화운이 돌아서며 '예, 마마. 하고 대답하자 명백한 부드러운 웃음이 담긴 목소리로 황후가 말했다.

“그리 입으니 훨씬 건강해 보이고 보기 좋구나.”

화운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잠시 제가 들은 말이 무엇인지 쉽게 인식이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들은 황후의 말은 하운이 연화운이 된 후로 정안궁 사람이 아닌 이들에게는 처음 들어 본 긍정적인 말이었기 때문이다.

놀란 것은 비단 화운뿐만이 아니었다. 저만치 물러나던 숙비와 정빈 역시 의아한 시선으로 황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황후는 그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감사합니다, 황후마마.’하고 인사를 올리는 연빈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여 줄 뿐이다.

저도 모르게 치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겨우겨우 끌어내리며 황후궁 밖으로 나온 화운이 이내 아진과 시선을 마주치며 참았던 미소를 얼굴 가득 터트렸다.

“황후마마께서 내게 보기 좋다고 하신 것, 맞지?”

“예, 마마! 소인도 똑똑히 들었어요!”

아진까지 덩달아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맞장구를 치자 화운의 표정이 더더욱 환해졌다. 특별히 제가 뭘 잘해서도 아니고, 그 한마디에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는 것도 아니지만 황제 폐하와 함께 가장 어려 웠던 황후마마께 이런 긍정적인 말을 들으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떴다.

그렇게 서로 작게 웃으며 걸어가고 있는 화운과 아진 앞에 한 사람이 멈추어 섰다.

"연빈, 아주 기분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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