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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31)화 (31/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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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늘 먹는 몸을 보양하는 약이었을 뿐 달리 아픈 곳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한의 질문에 화운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이한의 걱정과는 전혀 다르게, 화운은 황제의 물음에 어떠한 과도한 해석도 덧붙이지 않은 모양이다.

예전이었다면 폐하께서 이리도 저를 걱정한다며 들러붙었을 연화운이었다.

그래서 이한은 오히려 더 생각이 깊어졌다. 예전엔 하도 여기도 아프다 저기도 아프다 난리를 쳐 나중엔 그마저도 지겨워서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게 되었는데 괜찮다고 하니 오히려 슬그머니 마음이 쓰이고 마는 건 무슨 변덕인가 싶다.

이한은 이제, 제가 지난밤 아프게 붙들었던 화운의 손목이 괜찮은지 그러한 것까지 생각이 나 마음이 어지러웠다.

자꾸만 입술이 멋대로 움찔거렸다. 굳이 그런것을 물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입은 자꾸만 제 맘대로 움직이려 들었다.

괜찮으냐고, 내가 지난밤 아프게 하였던 손목은 괜찮으냐고, 많이 아팠느냐고, 멍이 심하게 든 것은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다. 걱정을 하고 싶었다. 사실은 내가 부러 그러한 것이 아님을 알리고 싶었다.

그것이 이제와 정말로 무서워져서. 막연하게 제 앞에서 저를 가로막던 제 안의 감각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이한을 두렵게 만들어서.

이한은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벌떡 일으킨다. 나가야 했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야만 할 것 같았다.

“... 있느냐!”

혹시나 화운이 저에게 더 무슨 말을 할까봐 이한은 재빨리 목소리를 높였다. 저만치 물러나 있던 오 태감이 곧바로 '예, 폐하.' 하고 대답을 해왔고 이한은 저와 함께 일어난 화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돌아간다.”

“...예.”

순간 오 태감은 잠시 시선을 올려 황제를 바라보았으나 흡사 겁에 질린 어린아이와도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이한의 표정을 확인하곤 그저 허리를 굽혀 대답한다. 이리 왔다가 또 이리 가버리는 일이 후궁에게는 상처가 되는 일이겠으나 정안궁에서는 처음 벌어지는 일도 아니니 굳이 말을 보태 보아야 의미가 없는 일이다.

“폐하.”

하지만 도망치듯 나서는 황제의 걸음을 잡은 건 화운이었다. 순간 황제와 오 태감, 그리고 아진까지 모두는 이렇게 한 마디 설명도 없이 다시 처소를 떠나려는 황제를 화운이 이전처럼 매달려 붙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였다.

한 걸음 차분하게 황제의 앞으로 걸어온 화운이 입을 열었다.

“제가 이리 여쭈어도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폐하. 혹여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것은 아니시지요?”

그리 말하며 시선을 살짝 들어 이한을 바라보는 화운의 얼굴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염려의 기색이 있다. 이리 멋대로 왔다가 차 한잔 들지 않고 멋대로 가버리려는 황제의 태도에 서러워하거나 모멸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화운은 황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어제도, 오늘도. 마음이 몹시 어지러워 보이십니다.”

어디에선가, 무엇인가가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에 오로지 이한 혼자서만 듣는 소리이다.

“이럴 때일수록 옥체를 강녕하게 하시옵소서, 폐하.”

별것도 아닌 말이다. 후궁이라면 누구든 응당 할 수 있는 그런 말이고 걱정이었다. 헌데 어째서 지금 연화운이 건네는 이 말은 이토록 낯설고 거대한 무게가 되어 이한의 귓가에, 코끝에, 마음에 와닿는 것일까.

“.....가자.”

그래서 이한은 다른 말을 더 붙이지 못하고 결국 몸을 움직였다. 등 뒤로 이한을 배웅하는 화운의 목소리가 들려와 돌아보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이한은 정말로 이 모든 것이 두려웠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하운은 객잔의 2층 가장 구석에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곳은 본래 객실로 쓰기엔 좁아 잡동사니들을 모아두던 방이었는데, 하운이 객잔에서 먹고 자며 일하게 되면서부터 쓰고 있었다. 낡은 침대에 잠시 걸터앉자 종일 쌓인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라 하운은 눈을 한 번 깊이 감았다. 떴다. 오늘따라 하루가 제법 고되었다.

하아,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며 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하운의 눈에 창문을 통해 달빛이 들어왔다.

잠시 그 달빛을 가만히 바라보던 하운은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바닥에 어린 달빛을 따라 걸으며 창가로 다가섰다.

이미 한참 전에 어두워진 밤의 하늘을 오직 커다랗게 떠오른 달만이 비추고 있다. 하운은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고는 창틀에 걸터앉아 제게로 불어오는 밤바람을 느끼며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된 것처럼 움직이던 하루의 끝에 비로소 사람이 된 감각이 손끝으로 퍼져 나갔다.

하운에게 삶이란 언제나 생존의 문제였다. 생존 이외에 다른 것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하운은 그저 제 한 몸을 굶어죽지 않게 하려 애쓰며 고된 날들을 버티고 버텼다.

그래서 하운에겐 꿈이 없었다. 거창하게 바라는 미래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 하운은 그저 굶지 않고, 안전한 곳에서 잠을 자며 하루를 살아갈 수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무엇인가 대단한 목표를 이루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설령 그런 꿈이 있다고 한들 하운이 손에 쥘 수 있는 기회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였으니 하운은 정말로 제 몸 하나 건사하며 살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에 만족했다.

하지만 이따금씩. 아주 가끔씩.

하운은 꿈이 있는 삶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객잔에 오는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나누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다만 하루를 연명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꿈꾸는 사람들을 볼 때면 과연 그게 어떠한 기분일까, 먹고 사는 것 이상의 욕심을 가진다는 건 도대체 어떤 감각인 걸까, 하운은 아주 오랫동안 그런 것을 궁금해해왔다.

허나 이번 생에 하운에게 허락된 삶은 여기까지이다. 하운에게는 아마도 죽는 날까지 감히 제가 닿지 못할 더 높은 곳을 꿈꾸는 일 같은 건 없을 것이다. 하여 하운은 그것을 다만 제 마음속 작은 궁금증으로 남긴 채 한참 동안, 그저 달빛을 마주하며 밤을 보냈다.

이것은 하운이, 그날의 이한과 마주치기 전의 이야기였다.


이한은 눈을 똑바로 뜬 채로 누워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을 휙, 돌려 이번에는 왼쪽을 보며 누웠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다시 또 몸을 돌려서 오른쪽을 보며 누웠다.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제멋대로 뛰어댔다. 잠이 오지 않았다.

“도대체...!”

결국 이한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앉아선 허공을 바라보며 씩씩거린다. 정말 자신이 미치기라도 한건지. 정안궁에서 안정전으로 돌아온 이후 내도록 이런 상태인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도무지 진정될 기세가 보이지 않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정빈에게는 가지도 않았다. 어디 가지 않았다 뿐 인가. 이한은 원래 정빈에게 가려고 했던 일조차 완전히 잊어버린 채 안정전으로 돌아왔다. 이한이 그 사실을 깨닫기 전 오 태감이 알아서 기별을 한 상태였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기약도 없이 정빈을 기다리게 할 뻔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이지....”

마치 제 마음처럼 엉망으로 구겨진 이불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이한이 중얼거린다. 겪어놓고도 도저히 무엇인지 알 수가 없는 일들이, 감정들이, 이 하루의 밤에 너무나도 많았다.

연화운을 보고 있지 않으면 속이 심란했다. 괜히 짜증이 나는 것도 같았다가, 이유도 없이 막 분이 나기도 하고,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해서 나를 이리 불편하게 만드는 건지 탓도 하게 되어 얼굴을 마주하면 화를 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연화운을 마주하면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차라리 짜증이 나고 분이 오르는건 나은 일이었을 정도로 화운을 눈앞에 두면 감정은 더더욱 멋대로 날뛰었다. 그를 보며 느끼는 감정을 뭐라고 표현 하면 좋을지 알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저 혼란스러웠다.

수만 가지의 색이 뭉친 불덩이를 집어삼킨 것처럼. 처음이 어딘지, 끝이 어딘지를 알 수 없게 뒤엉킨 실타래를 풀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막막하고 어지러운 감정만이 거대하게 엉켜 내도록 이한의 심장을 쿵쿵 쳐대며 불편하게만 만들었다.

결국 이한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다시 자리에 털썩 누워버린다. 마음 같아선 당장 정안궁으로 다시 뛰어가 도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거냐 따지고 싶었으나 황제의 위엄을 생각하면 차마 그리 체통 없는 짓은 할 수가 없었다.

구겨진 이불을 제대로 덮지도 않고 이한은 벽을 향해 돌아누워 등을 웅크렸다. 이상하게 조금 슬픈것 같은 기분이 밀려들었으나 연화운 때문에 제가 슬퍼하는 건 절대로 벌어질수 없는 일이었으니 이한은 자신이 하나도 슬프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리 처량하게 누워 있는 것은 그럼 황제의 체통에 맞는 일인지 누군가는 의문이 들지도 모를 일이겠으나 아무튼 이한은 슬프지 않았다. 다만 잠이 오지 않을 뿐이었다.


“그래도... 별일 없이 지나가서 다행이에요.”

자기 전, 멍든 화운의 손목에 연고를 발라주던 아진이 쓰라린 상처도 아닌데 굳이 후후 입으로 바람을 불어 주다 말했다. 그런 아진의 행동에 소리없이 가볍게 미소 짓던 화운이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다행이라니, 뭐가?”

"폐하 말이에요. 혹시나 폐하께서 또 마마를 아프게 하실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다구요.“

아진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 황제가 오기 전에는 긴장한 화운에게 괜찮다고, 그저 폐하께서 오시는 것뿐이라고 그리 말을 하며 달래주더니 정작 속으로 저는 그런 걱정을 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 마음이 기꺼워 이번에는 작은 소리를 내어가며 웃음을 터트린 화운이 다시 말했다.

“별 걱정을 다 하였구나. 사실 이 손목도 폐하께서 원하셔서 이리 하신 건 아니야.”

“그건 알지만... 소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폐하께서 너무하신 것 같아요. 마마께서 이리 노력하고 계신데....”

“내가 노력한 날이 얼마나 된다고, 고작 그 정도의 노력에 나를 믿어 준 네가 이상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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