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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30)화 (30/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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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궁으로 들어서기 전, 이한은 저도 모르게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정안궁에 처음 오는 것도 아닌데. 이미 지난날 수도 없이 드나들었던 그런 궁일 뿐인데 어째서 오늘은 마치 이곳을 처음 오기라도 한 것처럼 긴장이 되고 어색한지 모를 일이다.

봄밤의 공기를 가늠하며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걸음의 감각이 온몸을 가득 채운다. 지난번 정안궁을 바라보며 이곳이 마치 월궁과도 같다고 생각을 했던가. 지금 이한은 제가 걷는 길이 꼭 달로 가는 길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자꾸만 애꿎은 주먹을 쥐었다 편다.

가마에 오른 채로 정안궁 앞에 올 때까지 이한이 느끼던 감정은 화에 가까웠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이 자꾸만 이런 식으로 신경이 쓰이고 화가 나는지 도무지 연유는 알 수가 없었지만 어찌되었든 이한은 정안궁으로 오는 내내 화운을 떠올리며 짜증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정안궁에 당도해 가마에서 내렸을 때는 이상하게도 여기까지 오는 길에 느꼈던 짜증이나 화기 같은 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기묘한 박동만이 가슴 안에 남아 있어서. 죽음의 위협을 넘어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황제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그런 낯선 감정만이 제 안을 온통 채우고 있어서.

그것이 두려워 당장에 몸을 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한은 계속 내딛는 걸음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연빈, 연화운이 머물고 있는 처소 앞에 있는 뜰에 다다른 이한은 마침내 그곳에서 그를 본다.

봄밤 속에. 봄의 달빛 아래. 마치 달로 가는 길과도 같은 그 길의 끝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선 연화운

걸음을 멈추고 숨을 한 번 참았다. 그리고 내쉬었다. 달음질을 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숨이 차서 이번에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또 내쉰다. 그랬어도 비정상적으로 뛰어대는 심장의 박동은 어찌 막을 수가 없다.

이한의 발끝이 움찔거렸다. 다시 한 걸음을 걸으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쉬이 몸이 나가지를 않았다. .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앞을 막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그 스스로가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 않기도 했다. 마치 온몸의 감각들이 경고를 하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것 같았다.

한 발자국 내디디면 되돌릴 수 없을 거라고, 이 선을 넘으면 다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우스운 일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그깟게 뭐라고, 정안궁 따위 황제는 얼마든지 마음대로 드나들수 있고, 연화운 따위는 내키는 대로 얼마든지 보고 안 볼 수가 있는데 고작해야 몇 걸음 더 나아가 화운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할 연유가 이한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이한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걸었다. 원치 않으면 되돌아 나오면 그만이니까. 보고 싶지 않으면 다시 찾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뇌었다. 정말로 겁이 나지 않는다면 애써 그리 되될 필요도 없다는 것을 모르고, 그런 것을 모르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이한이 가까이 다가가자 계단 앞에 내려와 기다리고 있던 화운이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지난번 화운이 이렇게 인사를 올렸을 때 이한은 그를 바닥에 계속 꿇고 있도록 내버려 두고 그 위에 조롱과 모욕을 내뱉었다. 순식간에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을 외면하며, 이한이 입을 열었다.

“일어나라.”

그 기억을 떠올린 건 비단 이한 혼자뿐만이 아니었는지 목소리를들은 화운의 어깨가 일순 떨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허나 화운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일으키곤 이한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이 밤에 어찌 예까지 오셨습니까.”

“왜. 내가 못 올 데라도 왔나?”

저도 모르게 툭, 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튀어나간다. 그때 이한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는데, 이런 식으로 말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와 연빈의 사이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고, 이제와 그것을 변명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에 이한은 괜히 옆을 한번 돌아보며 딴청을 피운다. 화운이 말을 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혹여 무슨 일이 있으신 건지 걱정이 되었을 뿐입니다.”

"일은 무슨....”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안으로 들겠냐는 그런 물음을 할 때 화운의 목소리 끝이 미묘하게 떨렸다. 사실 화운은 아까 황제를 저만치에서 바라보는 순간부터 온몸을 몹시 떨고 있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한 보람도 없이 자꾸만 두 다리가 흔들거리고 목소리가 떨려왔다.

황제가 이대로 정말 안으로 들까봐 두려웠고, 동시에 이대로 몸을 돌려 돌아가 버릴까 봐 두렵기도 했다. 화운은 제가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무엇도 알지 못하는 건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으로 들고 싶은지 들고 싶지 않은지. 되돌아가고 싶은지 아니 가고 싶은지. 도무지 선명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이한은 잠시 말이 없이 화운을 바라봤다. 도대체 이 사람에게 이제와 제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이제는 절대로 되돌릴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조금 얌전하게 굴었던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하고 특별하다고 지금 그를 두고 이러한 번뇌를 하고 있는지 정말로 알고 싶어서.

이한은 제 앞에 선 화운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가. 그리하여도 도무지 아무런 답을 얻을 수가 없어 대답도 아니 하고 다시 몸을 움직여 그대로 화운의 처소 안으로 발을 들인다.

이한은 이 모든 혼란의 해답을 찾고 싶었고 도망만 쳐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법이었다. 이한은 이제 정말 이 모든 어렵고 알 수 없는 감정에서, 연화운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진이 간단한 다과를 내와 탁자 위에 놓을 때까지도 마주 앉은 이한과 화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한은 마치 세상만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처럼 표정을 굳히고 방의 이곳저곳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화운은 그런 이한에게 제가 먼저 말을 걸어도 되는 건지, 말을 건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같이 입을 다물고만 있다.

물론 이한이 '지금 내가 말을 안 건다고 저도 말을 안 하고 입을 다물고 있어?' 하고 속으로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 것을 화운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잔뜩 심통 난 표정으로 화운의 얼굴을 다시 노려보듯 바라보던 이한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 화운의 한쪽 볼이 약간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는 것이다.

이한은 제가 방금 전까지 속으로 어디 먼저 말을 거나 봐라, 하고 벼르고 있던 것도 잊고 저도 모르게 불쑥 입을 열었다.

“볼이 왜 그러하냐.”

그러자 화운은 잠시 황제가 무엇을 묻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다가 이내 몹시도 당황하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까 화운은, 조금 전 약을 먹고 아진이 준 사탕을 여태 입에 물고 있었다.

갑자기 폐하께서 행차하신다고 하니 너무 놀라고 당황하여 뱉는 것을 잊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정안궁으로 걸어 들어오는 폐하의 모습을 보자 너무 긴장하여 그다지 크지 않은 사탕을 제가 아직도 입에 물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다. 화운으로서는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다.

화운이 음식을 다 올려두고 옆으로 물러서는 아진을 다급하게 바라보자 아진 역시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는 서둘러 품에서 저의 손수건을 꺼내 화운 에게 다가갔다. 화운은 황급히 몸을 돌려 황제에게 보이지 않게 손수건에 사탕을 뱉고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조금 전 탕약을 마셨는데, 폐하께서 납시는 것에 경황이 없어 약이 써서 먹은 사탕을 여태 뱉지 못하였습니다.”

“참나....”

화운의 말에 이한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며 화운을 내려다본다. 천하의 연화운이 제가 온다는 소식에 그리도 놀라 사탕을 뱉는 것을 잊었다니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차라리 너무 좋아 펄쩍펄쩍 뛰다가 잊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알았으니 일어나 앉아라.”

하지만 이한은 그것을 꼬집는 대신 우선은 그리 명했다. 조금전 약까지 먹었다는 이를 굳이 오래 끓려두고 싶진 않았다.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하며 몸을 일으켜 앉는 화운을 바라보다가 이한은 다시 그의 표정을 살핀다.

혹시 이것도 전부 계획한 일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조금 전 사탕 때문에 조금 볼록 해진 연화운의 볼이. 그것이. 이한이 이전에는 화운을 보며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조금 귀여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또 이한은 혼자 황급히 그 생각을 떨쳐버린다. 귀엽다니. 연화운이 귀엽다니 마치 절대로 달아 생각해서는 아니 될 생각을 함께 붙여둔 것만 같아 등골이 오싹했다. 아니지. 아니 될 말이지. 화운의 수작에 이렇게 넘어갈 수는 없지. 이한은 정신을 바짝 차리자고 자신을 그리 다그치며 화운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약은 무슨 약이었느냐.”

허나 자신을 다그친 보람도 없이, 말을 꺼냄과 동시에 이한은 또다시 자신의 입을 치고 싶었다. 자신은 굳이 화운에게 그런 것을 물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생각을 하기는 했다. 먹었다는 약이 늘상 먹 던 약인지, 아니면 물에 빠진 일로 상한 몸이 아직 완쾌가 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그도 아니면 제가 지난번 그를 아프게 한 탓인지. 그런 건지. 그것이 아주 조금, 정말 조금 궁금하다고 생각을 정말 조오금 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한은 맹세코 굳이 그것을 입 밖으로 내어 연화운에게 물으려는 생각은 없었다. 제가 한 마디를 하면 천 배 만 배 부풀려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멋대로 생각해버리는 화운을 이한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한은 정말로 제 입에서 왜 갑자기 생각이 멋대로 말이 되어 튀어 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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