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황후는 잠시 그런 고민에 빠졌지만 이내 생각을 흩어내 버렸다. 연빈의 이 말과 행동들이 진심인지 아닌지, 그것은 황후에게는 사실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연빈이 지금처럼 일의 시비를 알고 본분에 맞게 행동해 주기만 한다면 진심이 어디로 향한들 무슨 의미일까.
“일어나거라.”
여전히 무거운 황후의 목소리가 연빈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연빈이 몸을 일으키자 황후가 말을 잇는다.
“폐하께오선....”
“폐하께오선 나라를 이끌 땐 강하고 용맹하며 담대한 분이시지만 사람을 대할 땐 다정하고 섬세하며 마음이 여린 분이기도 하지.”
황후의 그 말에 연빈은. 화운은 제가 겪었던 황제의 따스한 순간들을 떠올렸다. 한낱 천민 인 자신에게조차 건네지던 그 따스함을.
황후는 아주 곧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연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네가 진심으로 변했든, 혹은 폐하의 마음을 얻으려 거짓으로 꾸미고 있든 상관하지 않으마. 사람의 속을 다 알아낼 수도 없는 일이니 몇 번이고 묻는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다만 연빈.”
“예, 마마.”
“두 번 다시 폐하를 실망시키지 말거라.”
폐하를 실망시키지 말거라.
황후의 그 말이 엄청난 무게가 되어 화운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진심이라면 변하지 말 것이고, 거짓이라면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너의 마지막 기회라고 여겨라.”
마지막 기회, 감히 폐하의 곁에 가까이 머물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거짓이라면 들키지 말라는 황후의 말은 화운에게, 아니, 화운의 삶을 살고 있는 하운에게 너무나도 무거운 말이었다.
“폐하께서 또다시 네게 실망하여 마음을 쓰는 일을 본궁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니. 알겠느
냐.”
하운으로서의 진심을 가지고서도, 연화운으로서 거짓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가 이내 황후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예, 황후마마. 반드시 명심하겠습니다.”
폐하를 실망시키지 않는 것. 그것은 화운에 게도 너무나 간절한 일이었다.
**
“생각이 복잡해 보이십니다, 마마.”
아까부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황후, 자란에게 황후궁의 궁녀가 물었다. 그제야 깊어지던 상념을 떨쳐낸 황후가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연다.
“복잡하다기보단... 생각이 좀 많을 뿐이지.”
“연빈 때문이십니까.”
황후가 연빈이 돌아가고 나서 내도록 이런 상태였으니 내린 짐작이다. 자란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연빈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폐하 때문이기도 하다.”
“폐하요...?”
“그래. 폐하... 폐하 때문이지.... 선아. 너는 폐하를 어떤 분이라 생각하느냐.”
폐하 때문이라는 말에 잠시 의아한 얼굴을 하고 서 있던 궁녀, 선이 난데없이 제게로 떨어 진 감당 못 할 질문에 황급히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마마, 감히 소인은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하. 그래, 그렇지. 그럼 내가 답하마. 폐하는... 다정한 분이시다. 너도 알겠지만 황후 인 나를 언제나 깍듯이 존중해 주시고 비빈들 모두를 고루 챙겨 주시지.”
“하지만 선아. 그것은 다시 말해 폐하께서 몹시도 무정하신 분이라는 말과 다름이 없다.”
생각지도 못한 황후의 말에 선의 표정이 크게 굳었다. 선은 혹시라도 주변에 듣는 귀가 있을까 싶어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자란은 느긋하기만 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폐하께서 매번 내게 예의를 다하시고, 모든 비빈들을 공평하게 살피실 수 있었던 연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그, 그것이야 폐하께서 워낙에 성군이시 고... 또....”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로 흘러나오는 선의 대답에 자란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지. 물론 폐하께서는 좋은 분이시다. 하지만 이 일은 단순히 사람이 좋다고 하여 가능한 일이 아니야.”
“허면....”
“그것은 폐하께서 연모의 감정을 모르시기 때문이다.”
청량한 봄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올해의 봄은 유달리 향이 좋다고, 찰나의 순간 자란은 그런 생각을 해보며 말을 잇는다.
“진정으로 아끼는 특별한 이가 단 한 사람도 없었기에 폐하께오선 모두에게 다정하실 수 있 는 게야.”
“가장 총애받는 후궁으로 숙비가 꼽히고 있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숙비의 아비 또한 공신이니 그를 더 대우해 주시는 것뿐이지 폐하께서 숙비에게 특별히 더 끌려 그러한 것이 아니다. 어디 숙비가 폐하께 과분한 대우를 받은 적이 있더냐.”
선은 고개를 저었다.
“숙비를 총애하시어 나를 소홀히 대하신 적은?”
“.... 없습니다.”
“허면 모두의 앞에서 숙비를 대하는 태도와 정빈을 대하는 태도가 크게 다름이 있더냐.”
“아니요. 크게 다르시지 않습니다.”
"황제의 총애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게 술에 물 탄 듯 싱겁고 손에 잡히지 않게 흐릿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
"황제의 총애란... 누군가를 위해 궁을 지어 주는 것이다.”
그때 자란은 이 시간 연빈이 머물고 있을 정안궁을 떠올린다. 선대의 황제가 그의 정인이 라 손꼽길 주저하지 않았던 어느 남후궁을 위해 지어 주었다던 그 거대하고, 과시하길 머뭇거리지 않는 애정의 산물을.
“한 사람의 미소에 홀려 다른 사람의 눈물을 보지 못하는 것. 어느 한 사람을 위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 어느 자리에, 어느 누가 있어도 오로지 그 한 사람만을 눈에 담아 보는 모두가 그를 절대적으로 총애하고 있음을 알도록 만드는 것. 황제의 총애란 그런 것이야.”
“그러니 내가 폐하께선 무정하시다 하는게 아니겠느냐. 왕부에 계실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폐하께는 없던 일이니.”
“...송구합니다. 소인에게는 어려운 말씀입니다. 황후 마마.”
황후의 말을 듣던 선이 이내 다시 고개를 숙 며 사과를 올렸지만 살며시 미소 지은 황후는 더 대답이 없이 그윽한 시선으로 창밖을 바라볼 뿐이다.
순하고 담담한 얼굴로 제 앞에 꿇어 있던 연빈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좀처럼 제 앞에서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는 황제로 하여금 지난밤 그리도 어려운 얼굴을 하게 만들었던 이다. 허면 그는 과연 황제에게 다른 얼굴 또한 하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다른 어느 후궁도 이끌어낸 적 없던 황제의 분노를 홀로 오롯이 받았던 이가, 이제는 다른 유일한 감정을 끌어낼 수도 있을 것인가.
다정하게 손을 내미시되 누구의 선 안으로도 기꺼이 넘어간 적은 없는 분이 절절하게 애정 을 갈구하며 짓는 표정은 또 과연 어떠할 것인가.
자란은 가만히 턱을 괴었다. 아무래도 자신 이 너무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서북 지역의 이들은 성격이 호탕한 만큼 급하고 전투적이기도 하지. 매번 이 시기에 서북에서 분란이 벌어지는 일이 많았으니 각별히 신경 쓰도록.”
“예, 폐하. 폐하께서 특별히 지시하신 일인 만큼 허술함이 없이 살피겠습니다.”
이한은 저의 앞에 허리를 굽히며 대답하는 이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연주원.
그는 요즘 이한의 모든 번뇌의 주인공인 연화운의 아비였다.
조회가 끝난 후 이한은 그에게 따로 일러두었던 서북 지역의 관리에 대한 것을 묻겠다며 주원을 홀로 잡아두었다. 그런데 관련된 이야기가 문제없이 전부 다 끝난 후에도 무슨 연유에서인지 이한은 할 말이 몹시도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묵묵히 이한의 시선을 받고 있던 주원이 이내 입을 열었다.
“폐하. 달리 하문하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그때 이한은 마음속으로 엄청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혹시나 먼저 말을 꺼내주지 않을까 약 간의 기대를 했던 늙은이가 완전히 모르쇠를 하고 있으니 달리 방도가 없었다.
“흠흠. 그... 연빈이 얼마 전에 물에 빠져 죽다 살아난 것을 알고 있다.”
이한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꺼냈다. 아무리 아비라고 한들 후궁의 일을 먼저 입에 담기가 어려울 것 같아 나름대로 배려를 해 준 셈이다. 이한은 제가 그리 이야기의 물꼬를 틔워 놓으면 그다음은 주원이 알아서 말을 이어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곧바로 흘러나온 주원의 대답은 그런 이한의 기대를 산산이 조각냈다.
“예, 폐하. 소신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연빈마마께서 매사 행실이 단정치 못하여 폐하께 심려를 끼쳐드렸으니 소신 역시 면목이 없사옵니다.”
“.......할 말이 그게 끝인가?”
“....”
“자네 아들이 죽다 살아났다는데 할 말이 그것뿐이야?”
주원의 대답에 미간을 찌푸린 이한이 잔뜩 못마땅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연빈이 비록 사사건건 문제만 일으키는 황궁의 애물단지라고는 하나 주원은 그의 아비였다. 세상에 어느 아비 된 자가 아들이 죽다 살아났다는데 이리 덤덤하다 못해 야속하게 굴수가 있는가.
이한이 황좌에 앉은 채로 허리를 앞으로 당기며 주원을 바로 내려다보곤 말을 이었다.
“내 말은. 그래도 자네의 아들인데 걱정이 되지도 않느냔 말이야.”
“폐하께오서 다른 말씀이 없으신 것을 보면 연빈께서도 무사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건 그렇지만...!”
이한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려다 말고 심호흡을 한다. 하긴. 밖에서 새는 바가지는 안 에서도 냈을 것이 분명하니 연화운은 분명 사가에 있을 때에도 성격이 좋지는 않았을 터. 아 무리 제가 낳은 아들이라고 하여도 그런 성질 머리를 평생 마주하며 살았다면 오만정이 다 떨어졌을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건 아니었다. 그러니 저도 감당이 되지 않는 이를 대뜸 황제 에게 넘겨놓고 저리 발을 빼는 것이지.
하지만 아무리 그러해도 아들은 아들이질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