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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26)화 (26/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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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 이리 다정하신 분이시니 연화운도 그리 이성을 잃고 폐하께 집착을 했던 것이지....”

고요한 방에 화운의 목소리가 조용히 흘렀다. 화운은 이전의 연화운이 벌였던 괴팍한 일들의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단 한 가지 이해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황제 폐하를 너무나도 연모하여 오로지 저만의 정인이 되어 주기를 바랐다는 점이었다.

황제란 본디 한 사람의 정인이 되어 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가 다른 후궁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심장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으리라. 어찌하여 저분은 오로지 나만 사랑하여 주실 수가 없는 분이신가 세상이 원망스럽기도 했겠지.

그것이 연화운이 보인 모든 악행의 면죄부는 결코 될 수 없었지만, 다만 화운은 한 가지를 이해했다. . 모든 이유를 막론하고, 그들의 황제 폐하는 너무나도 아름다워 마음을 드리지 아니할 수가 없는 분이었으리라.

마치 지금의 연화운이 그러한 것처럼.

이러한 상황에서도 아주 깊은 마음 한구석, 그분의 다정함을 저 역시 받을 수 있길 바라고 있는 것처럼. 감히 그것을 바라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지금처럼 밤이 깊어져 홀로 고요한 공기에 휩싸여 삶이라는 것을 돌아보고 있으면 불현듯 그분의 얼굴이 떠올라 하염없이 그분이 그리운 감정이 되고야 마는 것처럼.

주제도 모르고 그분에게 따스한 시선을 받고 온화한 손길을 받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받는 일은 과연 어떠한 기분일지 궁금해지고 마는 것처럼 과거의 연화운도 그렇게 황제를 향해 흐르는 자신의 마음을 어찌 막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화운은 쓸데없는 생각이 더 이어지기 전에 황급히 눈을 감았다. 인간의 마음이란 이다지도 어려운 일이었다.


“정안궁에서는 어젯밤 태의를 불렀다더냐.”

이른 아침 조회를 위해 청건전으로 향하던 황제가 가마 위에서 물었다. 그 일을 알아보라 미리 일렀던 것도 아니건만 오 태감은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대답한다.

“폐하, 정안궁에서는 태의를 부르지 않고 궁녀가 와 그저 연고 하나만을 받아 갔다고 하옵니다.”

“....그리 심하지는 않았던 모양이군. 당장 손목이 어찌 될 것처럼 엄살을 부리더니.”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이한은 꼭 무엇이 초조한 사람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화운이 결코 엄살을 부린 것이 아님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젯밤 화운의 손목을 쥔 상태로 제가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이한이었다.

살결 하나까지도 연약해 어디든 쉽게 붉어지고 흔적이 남던 이를 그리 무지막지하게 쥐었으니 그 가느다란 팔에는 온통 피멍이 올라왔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가 이한은 문득 속이 덜컥 내려앉았다.

화운의 살결에 흔적이 잘 남는다는 걸 이한이 알고 있는 이유는 전적으로 이한이 이전에 화운과 함께 하였던 잠자리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완전히 이런 사이가 되어 정안궁에서 머문 날이 까마득하게 되었으나 화운은 애초에 후궁으로 입궁을 하였으니 이한이 그와 잠자리를 가졌던 건 당연한 일이다.

이제 와서는 그 모든 기억들이 끔찍하기만 해서 기억조차 하기 싫었는데, 어제의 일로 이한은 제가 손을 대는 곳마다 선명하게 자국이 남던 화운의 몸을 새삼 자각하게 된 것이다.

불쾌하여야 한다. 불쾌해야 마땅했다. 심지어 황제가 마지막으로 화운의 처소를 찾았을 땐 또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악을 쓰는 화운의 모습에 완전히 질린 이한이 한밤중에 정안궁을 떠나버린 일까지 있었다. 그러니 이제와 그 옛날의 어느 밤이 떠올랐 다고 한들 이한이 느낄 감정은 불쾌감밖에 없어야 했고, 실제로도 한동안 이한은 그와 함께한 밤의 기억들을 소스라치게 꺼렸다.

하지만 이한은 지난밤 제가 그리 아프게 손목을 틀어쥐고 있었는데도 그 작은 신음소리마저도 꾹꾹 참으며 견뎌내던 연화운을 떠올린다. 만약 오늘 밤 자신이 정안궁을 찾아 머물면 그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단아하게 시선을 내리깔고, 밀려오는 감각들을 어떻게든 견디려 안간힘을 쓰며 자그마한 입술 사이로 열띤 숨소리만 겨우 쏟아내는 연화운을 저도 모르게 상상했다. 그러자 한번도 보여 준 적이 없는 태도와 가녀린 몸짓으로 황제가 주는 것은 어떻게든 더 받아들이고 감당하려 가느다란 두 팔을 제게로 뻗어오는 연화운이 그린 듯 눈앞에 떠올랐다.

그 상상 속 연화운은 연화운이었으되, 동시에 연화운이 아닌 다른 누군가였다. 그건 황제가 단 한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고 이전이라면 화운과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으나, 이제 이한은 근래 의 화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치 그 모습을 실제로 본 것처럼 선명하게 상상할 수가 있었다.

“이런 미친...!”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저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아랫배가 뻐근해져 이한은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곧바로 태감이 ‘폐하, 어찌 그러십니까!' 하고 놀라 말을 걸어왔으나 이한은 서둘러 고개를 마구 저으며 신경 쓸 필요 없다 손사래를 칠뿐이다.

미쳤지. 정말 제정신이 아니지.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 이한은 머릿속으로 계속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렇게 연화운의 헛수작에 놀아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해놓고 난데없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제가 해놓고도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저만치, 여러 대신들을 앞에 두고 정무를 보아야 할 청건전이 보이기 시작하자 이한은 깊이 심호흡을 하며 저의 심신을 달래려 애썼다. 어차피 제가 방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테니 이한은 다만 제가 순간 느꼈던 이해할 수 없는 열망을 그저 없던 척 할 뿐이었다.


“연빈.”

“예, 마마.”

문후가 끝난 후 연빈 하나만 남으라 하고 모두를 물린 황후는 제 앞에 공손한 태도로 앉아 고개를 숙인 연빈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얌전히 눈을 내리깐 화운의 얼굴은 황후, 자란에게도 참으로 많은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의 미색이 대단하다는건 이전에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나 확실히 최근에 마주하는 화운은 . 뭐랄까.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단순히 치장하는 법이 너무 달라져 서라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고 얌전히 있기 때문에 그리 느끼는 것이 아니다.

이전의 그는 그저 화려한 미색을 가진 후궁으로만 보였다. 물론 사내이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도 특이하다고 여길순 있겠으나 어쨌든 다른 이들과 다른 특별함 같은건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 데 지금 눈앞에 있는 화운은 단지 아름다운 것뿐만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더 단단하고 바르고 단정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얼핏 보면 황제의 총애를 구하는 후궁이 아니라 다만 몸이 조금 연약해 보이는, 심성이 강직하고 대단한 미공자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다.

그것이 무척이나 생소하고도 기묘한 기분이라 황후는 한참 동안 화운을 그저 바라보며 저와 같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을 황제의 심경을 상상해 본다.

황후는 지난밤 황후궁을 찾아온 황제의 심경이 복잡함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 복잡함이 어디로부터, 누구로부터 비롯되는지도 알았다. 다만 황제가 더 말을 하고 싶은 기색이 아니었으니 모르는 척 넘어갔을 뿐.

황후란 내명부를 관장하는 자리이고 황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살피고 도와야 하는 정궁의 자리이다. 그것이 오늘 황후가 연빈을 저의 앞에 남으라 이른 이유였다. 황후는 부드럽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물에 빠지기 전 기억을 잃은 것을 본궁도 알고 있다. 허나 본궁과 너의 사이가 본래 그다지 수월치 않았음은 이미 알고 있겠지.”

“...예, 마마. 후궁이 되어 황후마마께 무례하고 방자하게 굴었던 점을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연빈은 앉은 채로 더더욱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 반성하고 있다고 대답하는 그의 몸짓이며 목소리에서 가식을 떤다거나 황후를 비꼬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 담백하게 예의 바른 태도에 황후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황스러운 감정이 들어 팔걸이를 힘주어 잡는다. 저도 이러한데 폐하께서 마주하고 있었을 당황스러움이며 혼란스러움은 얼마나 깊었을지 짐작이 되는 바였다.

“허면 굳이 겉치레하는 말 할 거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마.”

“예, 마마. 하문하십시오.”

"폐하께서 네게 모질게 구신다 하여 야속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황후의 물음에 연빈이 놀란 얼굴로 시선을 들어 황후를 바라보았다. 황후는 다만 무거운 눈빛으로 연빈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잠시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당황하던 연빈이 서둘러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황후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입을 열었다.

“마마. 제가 지금까지 후궁의 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의 은덕이 하해와 같음을 알고 있습니다.”

“.......”

"어찌 폐하께서 저를 마땅히 훈계하심을 모질게 구신다 할 것이며, 어찌 감히 야속한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과함도, 모자람도 없이 오로지 진심으로만 들리는 연빈의 답을 들으며 황후는 제 앞에 무릎 꿇은 연빈의 마른 몸을 바라본다. 내명부를 다스리며 연화운의 온갖 거짓과 변명을 모조리 들어왔던 황후조차도 일말의 거짓을 느낄 수가 없을 만큼 단단한 목소리이다.

과연 믿을 수 있는가. 아주 오랫동안 무슨 수를 써도 변하지 않았던 이를 믿어도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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