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25)화 (25/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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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중 제일 먼저 아진에게 다가온 서서의 물음에 아진이 침울하게 눈꼬리를 늘어트리며 말했다.

“괜찮으시긴, 손목이 벌써 붓고 파리한 기운이 온통 올라와서 내일이면 전부 피멍이 들것같아.”

아진의 말에 곁에 있던 궁인들의 표정도 죄다 시무룩해진다. 안 그래도 심란할 주인의 마음을 생각해 화운의 앞에서는 굳이 더 말을 붙이지 않았던 아진은 한 번 말을 꺼내니 또 속에서 열불이 치솟는다는 듯 씩씩거리며 말을 잇는다.

"폐하께선 도대체 갑자기 왜 그러신 거라니? 우리 마마께오선 그냥 달구경이나 하고 계셨을 뿐인데 그게 뭐 그리 큰 잘못이라고 이 야밤에 예까지 오셔서는 마마를 아프게 하시느냔 말이야.”

실로 방자하고 불경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더 듣는 이도 없는데, 아진은 이런 말조차 하지 못하고 참으며 속병이나 자리에 드러누울 판국이다. 안 그래도 속이 상해 죽겠는데 정작 제 주인은 그것도 전부 다 제 탓이라고만 하고 있으니!

아진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의 얼굴이 더더욱 어두워졌다. 이전의 그들은 언제나 제 주인이라면 치 떠는 황제 페하를 감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으나 오늘 일을 마주한 그들의 마음은.

그래. 확실히 예전과 같지 않았다.


“황후.”

이한은 정말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황후가 손수 준비한 차는 입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황제가 황후궁에 발을 디딘 그 순간부터 황제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음을 눈치채고 그저 조용히 그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던 황후, 자란이 부드러운 시선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예, 폐하.' 하고 대답했다.

“황후는....”

이한은 말을 머뭇거렸다. 사실 이한 그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어 그랬다. 어딘가에 이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데 도대체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이것을 무어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정안궁에서 가마에 올라 황후궁까지 오는 내내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는지 몰랐다. 가마를 멈추라고 하고 싶어 벌어진 입을 다문 건 또 몇 번이었다.

황제는 또다시 선명하게 떠오르려 하는 달빛 아래 화운의 모습을 지워버리려 습관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으나, 마치 누군가가 강제로 머릿속에 새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이한은 좀처럼 그의 모습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황후는 연빈에 대해....”

한참을 머뭇거리던 황제가 다시 황후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말은 온전히 끝을 맺지 못한다.

사실 이한은 황후에게 연빈에 대해 묻고 싶었다. 그가 요즘 달라지겠다며 벌이고 있는 그 이상한 행동들에 대해 말이다.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연빈은 변하지 않았고, 변할 수 없으며, 지금 보여 주는 모든 행동들 역시 전부 거짓된 모습이라고 누군가 말해 주길 바랐다.

“아니. 아니오. 그나저나 내가 너무 늦은 시간에 와서 황후가 피곤하겠소.”

하지만 황제는 물을 수 없었다.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한은 지금 그 어떤 대답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후가 제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지 않을까 겁이 났다. 저가 보기엔 연빈이 정말로 변한 것 같으니 그를 한번 믿어 보시는 게 어떠냐, 그리 말을 할까 봐 망설여졌다. 이한은 안 그래도 연빈 때문에 복잡한 마음에 더 큰 번뇌를 얻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한은, 황후가 제 뜻에 동조 할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그러한 대답을 바라고 묻는 거면서 원하던 대답을 얻을까 봐 두렵다는 건 너무나도 모순적인 일이었으나 바로 그 모순이 지금 황제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연빈은 절대로 변하지 않았고 변할 수 없을 거라 고, 그가 지금 폐하께 보이는 모습은 또 한 번 폐하를 기만하려 드는 일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 황제는 황후가 제게 그리 말을 할까 봐 끝끝내 제가 묻고 싶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폐하께서 황후궁을 찾아 주시는 건 언제나 저의 가장 큰 기쁨인 것을요.”

이한은 황후의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보며 혼란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아주 잠시, 자신은 폐하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그분을 도와드리는 일이라 자조적으로 말하던 화운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화운의 말대로 그건 응당 그가 받아야만 하는 대우가 분명했으므로 황제는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정말로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었다.


"너 또 못 자고 여기서 이러고 있다.”

모두가 잠이 든 늦은 밤. 교대를 하고 돌아오던 길 관사 앞에 홀로 나와 높은 곳에 걸린 달을 바라보고 있던 서천을 발견한 동료 시위, 도명이 혀를 차며 다가와 물었다. 서천은 별다른 대답이 없이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도명의 말대로 서천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밤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도명은 서천의 앞에 서서 작게 한숨을 한 번 쉬고는 입을 연다.

“그래. 하운이 그렇게 가서 슬프다는 건 잘 알겠어. 우리 중에서도 너희둘은 더 각별히 친한 사이였으니.”

도명의 입에서 하운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서천의 표정이 더없이 날카롭게 변했다. 하지만 어둠과 그늘에 가려진 서천의 눈빛을 도명은 보지 못했고 그는 무심하게도 말을 이었다.

“우리라고 뭐 아무렇지도 않겠냐. 그렇게 좋은 녀석은 드물었는데.... 나도 마찬가지로 슬프고 허전해. 그래도 어쩌겠어, 산 사람은 잘 살아야지. 그래도 네 덕에 시신이 제대로 수습되기라도 했으니 넌 할 도리를 다한 거야.”

“내 말은... 내 말은 걔도 네가 이렇게 매일 걔를 그리며 슬퍼하는 건 바라지 않을 거라는 거지. 네가 제일 잘 알거 아니냐. 착해빠져선 남 걱정밖에 할 줄 모르던 놈인 거.”

당장 먹살이라도 쉴 듯 살벌하게 빛나던 서천의 눈동자가 하운 역시 네가 이러는 것은 원치 않을 거란 도명의 말에 순식간에 기세를 잃었다.

“그러니까 그만 청승 떨고 들어가 자. 먼저 들어간다.”

서천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쳐 준 도명이 이내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고 홀로 남은 서천은 다시 고개를 들어 저만치 밝게도 빛나고 있는 달을 바라본다.

도명의 말은 사실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하운과 그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절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기껏해야 황궁으로 들어와 함께 천민 출신인 시위가 되면서 친해진 사이였다.

그의 죽음은 비록 슬픈 일이긴 하였으나 서천과 같은 이들에게는 지나친 슬픔마저도 사치나 다름이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이미 죽어버린 사람은 잊고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옳았다. 서천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함께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의 죽음에 이토록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마음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하운아. 네가 참으로 좋아할 만한 달빛이다.”

서천은 이따금 달이 환하게 뜨는 밤이면 그와 함께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날들을 떠올리며 중얼거린다. 나란히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턱을 괸채 은은한 미소를 띤 얼굴로 밤하늘을 바라보던 하운의 얼굴이 그리움의 형태가 되어 눈앞에 덧그려졌다.

그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아서. 단 한 순간도 쉽게 살아온 적이 없으면서도 마치 세상의 때 하나 묻지 않은 것 같은 얼굴로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는 하운을 대하는 것이 좋아서 이전에는 관심도 없던 밤하늘을 좋아하게 되었던 서천이었다.

허나 앞으로도 서로 의지하며 이 밤들을 함께하자 약조를 하였던 벗은 한순간에 덧없이 사그라졌고 서천은 이토록 긴긴 삶에 남아 홀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니 생과 사라는 것이 어찌 이리 네게는 끝까지 잔인하기만 하였는지.

슬픔으로 가득한 밤이 깊어졌다. 서천은 오늘도 잠을 이루지 못할 터였다.


“아....!”

잠이 오지 않아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 아무 생각 없이 팔을 짚고 힘을 준 화운은 손목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고통에 작은 신음을 터트리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혹여나 아진이 저의 신음소리를 들었을까 잠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눈치를 보던 화운은 밖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자 그제야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곤 긴장했던 몸에 힘을 푼다.

자려고 눕기 전까지 화운의 손목을 붙들고 마치 제가 아프기라도 한 것처럼 울상을 짓던 아진의 얼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잔잔한 미소를 짓던 화운은 이내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고 팔을 들어 황제의 손에 붙들렸던 손목을 바라본다.

이미 푸르스름하게 멍이 올라온 자리는 내일이면 상태가 더 심해질 것 같았다. 그 상처를 가만히 바라보며 화운은 오늘 제가 마주하였던 황제에 대해 생각했다.

'너는 무엇이냐.’

황제의 그 물음은 지금의 화운을 아주 정확하게 관통한 물음이었다. 그는 연화운의 몸을 가지고 있으나 연화운이 아닌 이고, 하운이라는 이름을 가진 삶을 살아온 자였으나 하운의 삶을 모조리 잃어버린 이이기도 하였다.

화운조차도 지금 자신의 삶이 이토록 혼란스러운데 수년간 얼굴을 마주 대고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아야 하는 황제의 혼란이 어느 정도일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는 일이다.

'연화운이 이럴 리가 없어. 이렇게... 네가 나에게 이렇게... 이렇게 할 수는 없다.‘

황제의 목소리는 실로 연약했다. 길을 잃은 사람처럼. 그리하여 겁을 먹은 소년처럼. 황제는 비록 제 손목을 강한 힘으로 틀어쥐어 저를 아프게 하였으나 화운은 그것이 저를 아프게 하려 의도해 그리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다만 황제는 어려웠을 뿐이다. 연화운이라는 사내가 어느 날 갑자기 보여 주고 있는 변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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