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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24)화 (24/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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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벌써 몇 번이나 이한이 화운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러니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몇 번이나 그런 말을 하였는데.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황제는 몇 번이나 화운에게 그리 모진 말들을 내뱉었는데.

어째서 오늘, 이 밤에 흘러나온 이한의 목소리는 이토록 나약하게 흔들려 도무지 확신을 가진 목소리로 볼 수가 없는 것인지.

그 말을 듣는 화운의 안색은 이미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이한이 꿈을 꾸듯 몽롱하게 말을 꺼내는 와중에도 그의 손에 들어간 힘은 점점 강해져 이제는 화운의 손목을 아예 부러트리기라도 할 기세였다.

화운의 몸은 고통에도 좀처럼 면역력이 없는지 손목에서 전해지는 아픔에 숨 쉬는 것조차 쉽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화운은 제 손목을 빼려 안간힘을 쓰는 대신에. 아프다며 우는소리를 하여 황제에게 놓아 달라 애처롭게 매달리는 대신에.

붙들리지 않은 화운의 다른 손이 제 손목을 틀어쥐고 있는 황제의 손등을 덮었다. 마치 황제의 마음을 달래듯. 저를 아프게 하는 그 손길마저도 마땅하다는 듯.

떨리는 숨을 겨우 진정시키며 화운이, 고요히 입을 열었다.

“폐하. 괜찮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한 말이다. 방향을 잃고 좌초된 배처럼 격렬하게 흔들리는 황제의 눈동자를 부드럽게 마주 바라보며 화운이 말했다.

“폐하께서 베푸신 아량을 끊임없이 배신하고 밀어낸 것은 저였습니다. 어찌 몇 마디의 말과 몇 번의 행동으로 지난 모든 날을 없는 것처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의 황제는 다정한 분이셨다. 화운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것을 실감했다. 하운같이 천한 이의 죽음에도 그토록 마음을 써 주시던 분이시니 아무리 화운이 고약한 사람이었다고 한들 변하겠다고 다짐하며 머리를 조아렸던 이에게 그리 모질게 굴었던 것 또한 마음에 불편하게 남으셨음이 분명하다.

화운은 그것이 지금 황제가 제 앞에 서서 이토록 어지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화운이 다시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옳으십니다. 저는 응당 폐하께 받아야 하는 대우를 받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

“저는 아직 폐하의 믿음을 받을 이가 되지 못합니다.”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도 화운은 황제의 앞에서 달빛처럼 웃었다. 처음 보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화운의 그분은 이토록 다정하고 자애로운 분이시어서, 화운은 그분이 저를 경멸한다 하여 실망할 연유가 없었다.

허면 그 앞에서 화운이 하는 말들을 오롯이 듣고 있던 황제는 어떠했을까.

이한은 자꾸만 차오르는 숨을 꾹꾹 내리누르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모든 감정들과 싸우고 있었다. 하여 이한이 다시 입을 열어 제 마음과는 같지 않은 차가운 말을 화운에게 뱉으려 하였을 때.

“읏….”

화운의 몸이 살짝 앞으로 기울며 그의 입에서 다시 한 번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이한은 자신이 화운의 손목을 너무 세게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찌나 강하게 손을 틀어쥐고 있었는지 소매 밖으로 보이는 화운의 손끝은 벌써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마른 그의 손목에 이런 힘을 주고 있었다니 소매로 감추어진 곳은 피멍이 올라올 게 분명해 보였다.

그때까지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했던 행동 때문에 당황한 이한이 막 입을 열어 무어라 말을 하려는데 그보다 아주 조금 빠르게, 화운의 뒤쪽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아진이 화운의 신음을 듣곤 튀어나와 이한의 앞에 냅다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조아리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폐, 폐하… 저희 마마의 몸이 아직 미령하십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아진은 거의 바닥에 이마를 찧듯이 수그리며 읍소하고 있었다. 모르는 이가 아진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이한이 정말로 화운을 어떻게 하고 있는 줄 알 것 같았다.

“아, 아니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황제가 체통도 잊고 말을 더듬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주위에 누가 있나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이한은 다시 화운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그제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거의 피가 통하지 않고 있던 팔이 갑자기 풀리며 저릿한 아픔을 이끌어내자 화운이 순간적으로 저의 손목을 붙들고 입술을 깨물며 아픔을 삼켰다.

파리하게 질린 화운의 입술을 보며 이한은 주먹을 꾹 쥐었다.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행동도 많았는데 그중 이한이 정말로 선택해 할 수 있는 행동이 하나도 없어 자꾸만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어버렸다.

장담하건대, 성이한이 황제가 된 후로 이토록 어쩔 줄 몰라 당황한 것은 단연코 처음이다.

“…돌아간다.”

그래서 황제는 도망치듯 물러섰다. 괜찮으냐 물으며 그의 손목을 살피는 대신. 나는 지금 네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고 그리 변명 같은 말을 답지 않게 웅얼거리는 대신. 이한은 그대로 돌아서 연화운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이한은 오직 그것만이 지금 이 자리에서 후회할 짓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정안궁으로 들어갔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나올 때도 두 발로 걸어 나온 이한은 마치 아주 오랫동안 뜀박질을 한 소년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도무지 자신에게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을 홀리는 여우굴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정신이 온통 혼미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황제가 그리 숨만 몰아쉬며 미동도 없이 서 있으니 함께 표정이 굳어진 오 태감이 곁으로 다가와 묻는다. 이한은 대답이 없었다. 태감이 다시 물었다.

“가마에 오르시겠습니까, 폐하.”

그것은 곧 황제에게 이곳을 떠날 것이냐 묻는 것이다. 여길 떠나서 다른 궁으로, 다른 후궁의 처소로 가시겠냐 묻는 일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한은 여전히 이유 없이 차오르는 숨을 고르려 안간힘을 쓰며 고개를 돌려 제가 방금 돌아 나왔던 정안궁을 가만히 바라본다.

아주 미미하게, 발끝이 움찔거렸다. 어디로 가고 싶은가. 무엇을 보고 싶은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가.

밀려오는 내면의 물음에 이한이 입술을 깨문다. 무엇이라 대답하면 좋을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답을 하지 않으니 속으로부터 시끄럽게 터져 나오는 물음들은 늘어만 갔다.

다시 정안궁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다시 돌아가 연화운을 보고 싶은가. 돌아가서 그를 다시 손에 잡고. 다시 제게로 끌어당기고. 그리하여 나는 그를.

거기까지 생각한 이한은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바싹 차리려 애를 쓴다.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내가 그까짓 연화운을 다시 보고 싶어 할 리가 없지.

겨우 속으로 쏟아낸 대답들은 고작해야 그런 것들뿐이다. 그런 황제를 가만히 기다리던 오 태감이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

“폐하께오선 하늘 아래 가장 높으신 분이십니다. 이 황궁이 모두 폐하의 것이고, 이 황궁의 모든 사람들이 곧 폐하의 사람일진데 폐하께서 고민하고 저어하실 일이 무엇이옵니까.”

이한의 주먹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손안을 채워오던 화운의 가녀린 손목. 달빛 아래 빛나던 얼굴과 황제의 모든 애정을 체념하였던 목소리.

태감이 말했다.

“뜻대로 하시옵소서, 폐하. 필히 기뻐하여 반길 것이옵니다.”

누가 기뻐하고, 누가 반기는지 태감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한은 그가 지금 바로 뒤에 있는 궁의 주인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오 태감은 황제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오래 모신 이다. 그는 때때로 황제 자신보다 그가 원하는 걸 더 잘 알고 있었고 황제의 심기를 가장 잘 살피는 이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한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토록 영민한 사람이. 눈치가 빠르고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어째서 지금 자신을 정안궁에 머무르라 말하고 있는가.

나는. 나는 정말 그를 보고 싶지 않은데.

황제는 그 이유를 묻는 대신 걸음을 옮겨 가마에 올랐다. 오 태감은 그런 황제의 걸음을 모시며 더 말이 없다. 가마에 오른 이한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정안궁으로 향한다. 달빛 아래 고요하게 잠겨든 그곳은 꼭 월궁(*전설 속 달에 있다고 알려진 궁전)과도 같게 보였다.

“…황후궁으로 가자.”

이윽고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태감은 그저 황제의 뜻을 모실 따름이었다.


“아진 언니!”

연빈의 침전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고 있던 정안궁의 궁인들이 침소에서 아진이 나오기가 무섭게 달려들었다. 손에 연고통을 들고 있는 아진의 얼굴이 아주 울상이다. 그 얼굴에 덩달아 무거운 얼굴을 한 아이들이 황급히 다시 입을 열었다.

“마마께서는 괜찮으세요?”

요즘 정안궁의 모든 궁인들은 제 주인을 향한 호기심을 감출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딜 가나 화운의 모습을 아주 세심하게 지켜보기 바빴다. 무섭기만 하던 저들의 주인이 더없이 다정하게 변한 모습이 신기하여 눈을 뗄 수가 없었던 탓이다. 게다가 더 이상 괴팍하게 굴지 않는 화운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선인처럼 아름다우셨으니 눈이 절로 머무는 건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달구경을 하는 연빈의 모습 또한 주변에서 괜히 어슬렁거리며 몰래 힐끗거린 궁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 탓에 폐하께서 납시어 있었던 일 또한 지켜본 눈이 많아, 아닌 밤중에 정안궁은 그야말로 소리 없는 소란으로 난리인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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