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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23)화 (23/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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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대인의 말씀대로 그건 그 아이가 스스로 선택했고, 스스로 잘못한 일입니다.”

“허면 어째서…!”

“그러니 스스로 뜻한 바는 아니겠으나 우리 연빈마마께서는 참으로 폐하께 충신이요, 대인께 효자인 아들이 아니겠습니까.”

부인의 말에 주원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화운은 사내의 몸으로 회임을 할 수 없고, 이제는 총애는커녕 후궁으로서의 최소한의 대우도 얻기 어렵게 되었으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르던 연씨 가문의 권력은 연빈으로 인해 멈칫거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연주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화운이 황제의 뜻을 거스르는 걸 알면서도 그를 타이르거나 혼내지 않았고, 황제에게 제 아들을 너그러이 봐 달라 청을 하지도 않았다.

아니, 애초에 주원은 화운이 후궁으로서의 자질이 없는 걸 알면서도 그를 폐하의 곁으로 보냈다. 그러고는 출가를 하였으니 이제 우리 집안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내세워 화운이 황궁 내에서 고립되고 외면당하는 것을 두고 보기만 하였다.

숙진은 이미 식어버린 찻잔을 다시 손에 쥐며 부드럽게 웃었다.

“제 말은… 폐하께서는 그것을 모르시더라도, 대인께서는 모른 척을 하시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

“아들이 남은 삶을 어떤 길로 걸어가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등을 떠미셨으니까요.”

태양은 저문 지가 한참이라 사방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숙진이 차를 전부 비우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주원은 그의 앞에 더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황제는 이것을 두고 누군가의 계략인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감히 황궁에 사술을 펼쳐 황제의 눈을 가리고 발걸음을 멋대로 이끌어낸 것이 분명하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스스로의 의지로 정안궁 앞까지 걸음을 했을 리가 없다고. 이한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저 잠시 걷고 싶었을 뿐이다. 이한은 일에서 눈을 떼자마자 득달같이 떠오르는 화운에 대한 상념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자꾸만 연화운에 대한 생각을 한다는 것이 곧 그의 계략에 넘어가는 일이나 다름이 없으니 이한은 정말로 느긋하게 밤길이나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자 하였다.

그러니 그때 이한이 느꼈을 황망함을 어찌 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눈앞에 보이던 정안궁을 마주했을 때 이한이 느낀 그 두려움에 가까운 당황스러움을.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도 모르게, 뜻하지 않게 이곳까지 걸어온 것이라면 돌아가면 되는 일이었는데. 돌아가자, 그 한 마디면 이미 황제를 쫓아 따라온 가마가 바로 앞에 대령을 하였을 텐데. 그러면 황제는 제가 직접 걷는 수고조차 하지 않고도 정안궁에서 멀어져 황후궁이든 운화궁이든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도 이한은 그러지 않았다.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이한은 주위를 모두 물리고 홀로 정안궁으로 발을 들이기를 선택했다.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연화운의 간사한 손아귀에 놀아나는 일이라고 그렇게 자신을 탓하면서도 이한은 달빛이 드리운 길을 따라 걷는 일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마주치는 모든 이들의 입을 단속하여 안에 이르지 못하게 하며 정원에 있다는 화운을 찾아 그저 걸었다. 그즈음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지난번처럼 예상치 못한 때에 갑자기 찾아가 그의 본모습을 까발리겠다는 알량한 핑계를 댈 수도 있겠으나 황제는 그게 진실이 아닌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황제가 이윽고 모든 혼돈 앞에서 그를 마주했을 때.

어렵고, 혼망하고, 얼핏 두렵기까지 한 감정 앞에서 저만치 달빛 아래 머물러 있는 연화운을 모습을 눈에 담았을 때.

‘나는 폐하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그분을 도와드리는 일이다.’

자조적으로 그리 말하는 연화운의 서러운 몸짓과 목소리를 들었을 때에.

그때 자신이 느낀 감정이 무엇인지 황제는 들여다보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았다. 괜찮을 거라고.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낙엽 더미에 머리만을 처박은 채 제가 다 숨었다고 착각하는 새처럼 황제는 그저 이 감정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리 되뇌기만 했다.

은은한 달빛이 드리워진 화운의 처연한 얼굴도. 진심으로 황제를 염려하고 있다는 듯 절절하면서도 애가 타던 그 목소리도. 그리고 그를 마주하여 처음 느껴보는 박동으로 뛰기 시작한 저의 심장도 전부 다 아무 의미도 없는 것들이라고. 그렇게.

“폐하…?”

그때. 황제가 거기 서 있음을 깨닫고 그네에서 몸을 일으킨 화운이 이한을 곧장 바라보며 다가왔다. 황제가 한 발을 뒤로 내디디며 물러났다. 그는 마치 겁이 난 사람 같았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재해를 마주한 사람처럼. 제아무리 하늘 아래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황제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힘이 떠밀리는 것처럼. 황제는 그렇게 몸을 움츠려 자꾸만 뒷걸음질을 쳤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화운이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렸다. 이한은 쉬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겨우 손을 한 번 까딱거려 그를 일으켰다.

“폐하, 이 시간에 어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한낱 인간이 그토록 거대한 재해를, 운명을 피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이한은 거기에 서서 어느새 제 앞으로 다가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사내를 내려다본다. 숨이 막혔다. 아주 단단한 끈이 가슴을 칭칭 동여매 심장을 조여오는 것만 같았다.

황제가 무어라 답을 하지 못하고 저를 옥죄어오는 모든 감정에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을 때 이 모든 재앙의 원흉이 된 사내, 화운은 모순적이게도 더없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며 이한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선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폐하. 무슨…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우습게도 화운은 두려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파리하게 질린 황제의 안색에 그 역시 겁을 먹은 것이다. 여전히 자신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황제를. 그의 말을 믿지 않고 조롱하고만 있는 바로 그 황제를 화운은 걱정하고 있었다.

“어찌 태감도 곁에 아니 두시고… 폐하, 일단 잠시 들어가시겠습니까? 태의를 부를까요?”

언제나 그림자처럼 황제의 곁을 지키던 오 태감마저 보이지 않자 화운이 더더욱 초조한 목소리가 되어 묻는다. 화운은 지난번 황제가 저에게 얼마나 모질게 대했는지 따위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눈에 담긴, 도무지 거짓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애틋한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황제, 이한의 손이 천천히 움직여 화운의 손목을 붙들었다.

“폐… 하?”

갑작스러운 이한의 행동에 화운이 그제야 조금 당황한 얼굴로 이한을 바라보았고 이윽고, 이한이 입을 열었다.

“너는 무엇이냐.”

듣는 순간 화운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는 무엇이냐, 하는 물음이 화운에게는 마치 그의 거짓을 파내고자 하는 물음처럼 들렸다. 화운이 반사적으로 황제에게 붙들린 손목을 빼내려 당겼으나 이한은 손을 놓아주기는커녕 더더욱 손아귀에 힘을 주어 손목을 틀어쥐고 자신에게로 당기며 눈을 마주친다.

이미 가까웠던 두 사람의 사이가 이제는 숨결이 서로의 코끝에 닿을 수도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화운의 손목 정도는 한 손에 양쪽을 다 잡을 수도 있을 만큼 커다란 이한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화운은 감히 빠져나올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의 힘이다. 화운의 눈동자가 더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폐, 폐하….”

“연화운이 이럴 리가 없어. 이렇게… 네가 나에게 이렇게… 이렇게 할 수는 없다.”

황제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만 같았다. 차라리 지금 눈앞에 있는 화운이 그가 아니라 어느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변신을 하여 자신을 꾀어내고 있는 거라고 한다면 좋을 것 같았다.

“내가… 내가 너에게 이런… 이런….”

그것이 아니라면 이한이 지금 이 순간 화운에게 느끼는 감정을 설명할 수가 없었으니까.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폐하… 저는… 저는….”

화운은 몇 번이나 입안으로 넘어오는 수많은 말들을 감히 토해내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황제가 정확히 무엇 때문에 이토록 혼란스러워 불안해 보이는지 다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하운이었던 자신이 연화운이 되어 했던 모든 행동들이 그분에게는 이토록 거슬리고 불편했다는 것만큼은 틀리지 않은 사실이다.

“아…!”

순간, 화운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처음부터 강한 힘으로 화운의 손목을 붙들고 있던 이한의 손이 점점 더 억센 힘으로 화운을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너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어.”

그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는 이한의 말은 화운에게 전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에 가까웠다. 아마도 달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난히 밝게 드리워진 달빛이 하필이면 연화운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어 괜한 감상에 사로잡힌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성이한이, 어떻게 다른 누구도 아닌 연화운을.

어떻게 이대로 끌어당겨 품에 안아 보고 싶다고 생각할 수가 있을까.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그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이한은 생각했다.

“나는 너를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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