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적막한 밤의 공기 사이에서 이리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화운은 문득 폭풍처럼 저를 스쳐 지나간 일들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자고 일어나면 깨어나겠지. 이 믿을 수 없는 일들은 모두 꿈에 불과하겠지. 그리 생각을 하며 잠든 밤들의 끝에도 눈을 뜨면 언제나 그는 연화운으로 다시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정말로 이것이, 연화운의 삶이 하운의 것이 되고야 만 것이다.
두렵고 불안하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이다. 하루아침에 타인의, 그것도 본래 살던 곳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던 이의 삶을 대신 살아야 한다는 게 누구에게인들 만만한 일일까. 화운은 때때로 모든 것이 자신 없어 불안했으며, 매순간 모두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과 싸우기도 해야 했다.
“…폐하께오서도 이 달빛을 보고 계실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의 끝이 그 한 사람에게 가 닿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낯섦과 불안, 두려움과 고독을 불현듯 가치가 있다 느끼게 만드는 이가 화운에게는 곧 황제였기 때문이다.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살아가는 삶에 만족하고 있던 하운으로 하여금 더 큰 욕심을 부려 황궁까지 들어오게 만든 것도. 비록 모두에게 경멸과 무시를 당하며 미움 받는 삶이라고 할지라도 누군가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을 수 있도록 만든 것도.
하운에게도. 화운에게도.
황제는 언제나 목적이자 이유인 분이었으므로.
“달빛이 이리 아름다운데… 폐하께서도 보신다면 참 좋을 텐데….”
“듣자하니 폐하께서는 오늘 늦은 시간까지 계속 안정전에서 정무를 보셨대요.”
화운이 황제의 얘기를 꺼내자 아진이 재빨리 제가 알아낸 소식을 주인에게 전했다. 이제 아진의 주인은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알아오라 윽박지르지 않았으니 이것은 오로지 아진 스스로가 제 주인을 위해 알아낸 것이었다.
폐하께서 늦게까지 고생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화운의 얼굴에 걱정의 빛이 드리워지는 걸 가만히 살피던 아진이 이내 눈치를 살살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마… 그러지 말고 안정전에 간식거리라도 준비해 보내 보시면 어떨까요?”
“간식?”
화운이 금세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진을 바라보았다. 상황과 어울리지도 않게 아진은 주인의 그 얼굴이 참으로 귀엽다고, 그런 방자한 생각을 하다가 이내 흐트러트리곤 말을 잇는다.
“예, 마마. 폐하께서 늦게까지 정무를 보실 때면 각 궁에서 폐하를 위해 간식을 챙기는 건 흔한 일이니까요. 그러니 마마께오서도….”
“…아니야. 되었다.”
하지만 아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운은 순간 초롱초롱 빛나던 눈동자를 갈무리하곤 고개를 젓는다. 화운의 시선이 이번엔 저의 발끝을 향해 푸욱 가라앉았다.
“안 그래도 일 때문에 고단하실 텐데 내가 보내드리는 간식을 보시면 어디 힘이 나시겠느냐. 괜히 마음만 더 상하시지.”
“마마….”
“황후마마나 다른 분들이 어련히 알아서 챙길 테니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을 거야.”
알면서도.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화운의 목소리가 점점 침울하게 바뀌었다.
정안궁의 시위로 있을 적에 화운은 이따금 저를 스쳐 지나가는 황제의 고단한 얼굴을 보았다. 황제의 자리에서 백성을 보살피고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화운은 전혀 알 수 없었으나 때때로 황제의 뺨에 어린 피로와 무겁게 내려앉은 어깨를 몰래 바라볼 때면 주제도 모르고 그분이 안쓰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곤 했었다.
그때는 황제의 곁에서 그분의 고민을 들어드리고, 그분의 건강을 챙겨드릴 수 있는 자리가 저도 모르게 부러워져 염치를 모르는 제 마음을 스스로 탓하여 내리누르곤 했었는데. 이제는 황제의 후궁으로 당당하게 황제를 살펴드릴 수 있는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가 없으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었다.
“마, 마마….”
곁에 선 아진이 다시 한 번 화운을 불렀으나 화운은 여전히 바닥을 본 채로 고개를 저을 뿐이다.
“내 말이 옳아. 나는 폐하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그분을 도와드리는 일이다.”
“그, 그게 아니오라… 마마….”
아진의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진의 목소리는 마치 겁을 먹은 것처럼 긴장한 채로 떨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아진의 변화에 화운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아진을 바라보려 하다가. 그렇게 고개를 들었다가.
그 순간 화운은 저만치 밖에서 정안궁의 정원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서 있는 한 사내를 보았다.
밤의 어둠에도 결코 잠식되지 않는 흑룡포를 입고 선 사내. 하늘 아래 둘이 없고 땅 위에 다시없을 존재. 온 나라를 이끌어가는 천자이자, 화운에게는 하나뿐인 사람인 황제, 성이한.
그가 달빛 아래 홀로 서 가만히 화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화운이 천천히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대인께서는 연빈마마가 걱정되지도 않으십니까.”
늦은 밤, 조용히 찻잔을 기울이던 자리에서 갑자기 흘러나온 부인의 말에 잔을 들던 연주원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가 이어졌다. 연주원의 부인, 원숙진은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말을 이었다.
“물에 빠져 죽다 살아났다고 하는데… 대인께서는 어찌 황궁에 가 한번 묻지도 않으셨습니까.”
“별다른 기별이 없는 걸 보면 괜찮으신 것이지. 달리 물을 말이 있소.”
“대인.”
“연빈마마는 이제 우리의 아들이 아니고 폐하의 사람이오. 폐하께서 알아서 챙겨 주실 것이니 부인도 마음을 놓는 것이 좋겠소.”
그 말에 부인은 입꼬리를 틀어 올려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린다.
“폐하께서 어디 그 애를 후궁 취급이나 하신답니까.”
“어허. 말씀을 삼가시오, 부인.”
결국 참지 못하고 흘러나온 부인의 적나라한 말에 연주원이 목소리를 높이며 노기가 어린 눈으로 저의 부인을 바라본다. 평소 같으면 조용히 입을 다물었을 숙진이지만 그 또한 오늘은 한계에 다다랐는지 말을 멈추는 대신 고개를 들어 주원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포악한 연빈이 폐하의 마음을 되돌리려 연못에 몸을 던지고도 박대를 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니 대인께오선 아주 흐뭇하시겠으나 아무리 못나도 자식은 자식인 법입니다. 폐하께오서 그 아이를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것이야 이해 못 할 일이 아니지만 하나뿐인 아비인 대인마저 그러시면 되겠습니까.”
“…부인은 어찌 말을 그리 하시오. 설마하니 내가 자식이 죽다 살아났다는데 그것을 흐뭇하게 여기겠소?”
주원이 불쾌한 심정을 감추지 않고 대답했으나 그 말에도 부인은 답지 않게 헛웃음을 흘린다.
“대인. 사람들이 그런다지요. 황제의 미움을 받는 연빈 하나가 앞길 창창한 연씨 집안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고요.”
“…….”
“그 아들이 황제의 총애까지 받았다면 이 황실에 감히 연씨 가문을 대적할 이가 없었을 텐데 연 대인이 과한 욕심을 부려 섣불리 되먹지 못한 아들을 보내는 바람에 일을 그르쳤다고. 그리들 말하더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과한 말도 아니었다. 만약 연빈이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면 아비와 아들이 안팎에서 황제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을 테니 연씨 집안을 적대할 수 있는 이들은 하늘 아래 그 누구도 없었을 터이고 그리되면 황제도 그들 집안을 더더욱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헌데 아들이 모든 일을 망쳤다. 황제의 총애를 받기는커녕 아비의 이름에 기대 겨우 황궁에 붙어 있는 꼴이 되었으니 어떤 이들은 승승장구하던 연 대인의 위치가 제 손으로 밀어 넣은 아들 때문에 흔들리게 될 거라 말하기까지 하는 실정이었다.
차가운 표정의 숙진은 계속 말을 잇는다.
“허나 대인. 저는 누구보다 대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대인께서는 화운의 성격을 잘 알고 계셨지요. 화운이 폐하의 후궁으로 들어가면 이리 될 거라는 걸 대인께서는 모르셨습니까?”
“…….”
“화운이 입궁하지 않았다면 막내인 송운이 가게 되었을 자리입니다.”
그랬다. 당시 황제의 후궁이 너무 적은 것을 염려한 태후의 명으로 공신 집안의 자식들이 간택을 받아 입궁을 하게 되었으니, 본래 연가에서는 막내딸인 연송운이 입궁하도록 내정이 되어 있었다.
헌데 그 자리를 화운이 욕심내자 주원이 친히 황제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았고 덕분에 송운 대신 화운이 황제의 후궁으로 입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정대로 송운이 폐하를 모시게 되었다면 그 애는 여인이니 대인을 기꺼워하는 폐하의 총애를 듬뿍 받아 머잖아 회임을 할 수도 있었겠지요.”
“부인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이오.”
“그러니 그 과분한 폐하의 성은을 대인께서 감당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대인께서는 세상천지 오로지 황제 폐하 한 분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시니까요. 감히 황제 폐하의 자리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자리까지 오르는 것을 대인께서 원하였겠느냔 말입니다.”
“입궁을 한 건 화운의 의지였소. 폐하의 마음이 멀어지도록 패악을 부린 것도 전적으로 그 아이가 한 짓이지. 부인은 그것을 두고 내 탓을 하고 싶은 거요?”
연주원이 차갑게 식은 눈으로 숙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숙진은 그저 담담하게 그 시선을 받아넘기며 절반쯤은 슬퍼하고, 절반쯤은 체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