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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21)화 (21/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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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는 나를 연모하여 그랬다고 하면서 나를 무시하고, 속이고, 나의 상황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로지 너만을 보고 너만을 사랑하라 강요하는 것이. 그것이 너에게는 사모이더냐.”

황후는 황후의 위엄을 지켜 황제를 돕고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위해 때때로 총애를 얻는 후궁들의 방자함을 참아 주며 스스로 받는 상처를 모른 척하고, 후궁들은 서로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마음을 내리눌러 견디며 황제가 제게 주는 짧은 밤에 만족 하는 법을 배운다.

애초에 황제를 비롯해 그 누구도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자리까지 온 것은 아니었으나 이리 묶여버린 관계 안에서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고 배려하며, 개인의 욕망을 참아 누르는 것이 바로 이 황궁의 삶 인 것이다. 그리고 이한은 비록 사랑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황제를 배려하는 그들의 진심임을 잘 알고 있었다.

허니 나 하나만을 보아 달라 억지를 부리고 떼를 쓰는 연빈의 마음이 그들보다 더 진심일 것이라고, 황제가 어찌 그리 생각을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저는 이 황궁의 그 누구보다 폐하를 연모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폐하께서 저를 찾지 않는 밤을 견딜 수 없는 이유예요. 그것을 이해한다고 하는 다른 후궁들은 저만큼 폐하를 사랑하지 않는 것뿐이라구요!‘

점점 더 차가워지는 황제의 목소리에 다급해진 것인지 연빈이 다시 한 번 그 가련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으나 황제는 이제 이 모든 것이 너무 지겨웠다. 화도 내보고, 달래도 보았다. 정안궁을 찾지 않는 것으로 벌을 주어 보기도 하고, 때로는 그 입안의 혀처럼 굴며 타일러 보기도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 어떤 것도 연빈을 만족시킬 수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연빈은 끊임없이 황제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제가 가지길 바라며 행패를 부렸다. 황제가 오지 않는 날이면 보란 듯이 힘없는 아랫것들을 고통스럽게 하여 인질처럼 황제의 앞에 전시하기를 일삼았다. 마치, 이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건 전부 황제의 탓이라 선언하듯이.

'그 누구도 원하는 것을 다 얻으며 살 수는 없는 이 황궁에서 오로지 네가 얻고 싶은 것만을 내게 강요하려 든다면 네가 가장 연모하는 것은 사실 내가 아니라 너 자신이겠지. 아니 그러냐.‘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진 황제가 천천히 연빈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연빈이 울부짖으며 매달려왔으나 정안궁을 나서는 황제의 발걸음에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다.

황제는 이제, 연빈이 말하는 사랑을 믿지 않았다.


"폐하,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오늘은 이만 마치시지요.”

걱정스러운 오 태감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이한은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일에 집중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제야 뻐근함이 밀려오는 목 뒤를 주무르며 고개를 들자 어느새 어둑해진 밖이 보인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하루가 다르게 해가 길어지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로 꽤 시간이 흐른 모양이다.

여름은 언제나 골치 아픈 계절이었다. 황제의 자리에 있다 보면 사시사철 문제가 없이 지나가는 계절이 어디 있겠냐마는 여름은 특히나 변수가 많은 계절이다. 가뭄이 들지 않으면 홍수가 일거나, 태풍을 겨우 견뎌내었다 싶으면 더위 탓에 쉽게 역병이 돌기도 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에는 필연적으로 백성들이 굶주렸고, 그러다 보니 황제가 세심하게 두루 살피지 않으면 민심이 혼란해지는 지역이 적지 않았다. 이 시기를 잘 보내야 여름에 벌어지는 또 수많은 변수들에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황제는 겨울이 채 가기전 각 지역을 살필 이들을 미리 파견해 두었는데, 그들이 올려 보내는 보고들이 적지 않아 그것들을 살피고 적절한 대책을 논의하고 결정하느라 오늘도 정신없이 하루를 보낸 참이었다. 이한은 저녁때 잠시 황후궁에 들러 식사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청건전과 안정전에 머물며 정무를 보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폐하.”

이리저리 목을 돌려보던 이한의 움직임이 멈춘 건 그 순간이었다. 일에 파묻혀 애써 미뤄두었던 생각들이 오 태감의 말이 벌려놓은 틈을 타고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이한의 시선이 말없이 깊어졌다.

이제는 마치 습관이라도 된 것처럼, 오늘 아침에 황후궁에서 보았던 화운의 모습이 떠올랐다.

불과 며칠 전이기만 했어도 이한은 황후궁으로 가는 길에 그런 예상을 했을 것이다. 연빈이 다른 비빈들에게는 물론이고 황후에게까지 경우 없이 굴고, 그 행태에 화가 난 숙비가 지지 않고 맞붙어 말싸움이 벌어지고, 황후가 나서서 언성을 높이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는 그런 장면을 이한은 이미 보기라도 한 것처럼 생생하게 그렸을 테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한은 오늘 아침 황후궁으로 가는 길에 단아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 말이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화운의 창백한 얼굴을 떠올렸다. 모두가 경악하여 그를 믿지 못하는 가운데에서 홀로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 또한 제가 전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듯이 담담하고 고요하게 앉아 버티는 연화운을 이한은 저도 모르게 상상하고 있었다.

우스운 일인 것을 안다. 이한 스스로도 그렇게 숱한 실망을 거듭해 왔으면서 아직도 그에게 속아 줄 마음이 남아 있는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었으니까. 그것은 분명 우습고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이한은.

'저는... 이제부터라도 폐하께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 목소리를 떠올리면, 단 한 번도 저에게 보여 준 적이 없는 얼굴과 음성으로 진심이 아니라고는 생각하기가 어려울 만큼 절절한 마음을 건네 오던 그날의 연화운을 떠올리면,

그토록 수많은 실망과 분노의 기억에도 이번은 정말인 것 아닐까, 이번만큼은 정말로 그가 완전히 달라진 건 아닐까 그런 헛된 마음이 들어와서. 그를 믿어 봤자 돌아오는 건 기만뿐이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최근 마주한 연화운의 얼굴은 자꾸만 그를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서.

"폐하, 어디로....”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를 향해 태감이 다시 물었다. 이한은 잠시 말이 없이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냥. 조금 걷자.”

피곤이 묻어나오는 황제의 등 뒤로 긴 그림자가 늘어졌다.


“마마, 춥진 않으세요?”

봄이라고는 하지만 밤에는 아직 날이 찼다. 아진은 얇은 봄옷을 걸치고 밖에 나와 있는 화운 때문에 걱정이 되어 입이 바싹바싹 말라 제가 주인의 어깨에 둘러 준 풍의를 더 단단히 고쳐 매며 물었다. 화운은 지금 정안궁 정원 한쪽에 놓여 있던 그네에 앉아 달빛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괜찮아. 오히려 가슴이 답답했던 것도 풀어지고 좋으니 너무 걱정 마.”

그러나 화운의 말에도 아진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입술을 쭈욱 내밀며 말한다.

“마마. 마마께오선 몸이 약하시다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찬 기운과는 상극이시란 말이에요. 게다가 폐도 안 좋으셔서 감기만으로도 크게 앓으실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해요.”

“그래그래, 알았다. 알았으니 너도 내 걱정은 그 만하고 여기 앉아 보렴. 달빛이 정말로 아름답구나.”

아진의 걱정은 듣는 둥 마는 둥, 화운은 고개를 들어 달빛이 곱게 펼쳐진 밤하늘을 연신 바라보며, 미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어 달빛이 어찌나 밝은지, 닫아놓은 창문으로도 밝은 달빛이 고스란히 느껴져 때마침 답답함을 느끼고 있던 화운은 그 빛을 쫓아 이 밤에 정원으로 나온 참이다.

하지만 화운의 말에 아진은 말이 없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진은 조금 전 화운이 저에게 곁에 앉 라 했던 말을 고장 난 사람처럼 계속 곱씹고 있는 중이다.

이 황궁의 어느 종이 감히 주인의 곁에 앉았다고 하던가. 제아무리 어질고 자애로운 이라고 하여도 어떤 주인이 저의 종에게 자신의 곁에 앉으라 자리를 내어 주었다고 하던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감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종은 주인이 의자에 앉으면 그 아래 엎드려 발 받침대가 되어드릴 순 있어도 그의 곁에 나란히 앉아 달빛을 감상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방금 저의 주인은 지난날, 궁인들 알기를 길바닥의 돌멩이만도 못하게 여겼던 바로 그 주인은 지금 여기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저를 향해 함께 달구경을 하자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정말로 아진이 사람인 것처럼, 저와 마찬가지로 숨을 쉬고, 살과피가 있고, 달빛이 아름다운 것을 느끼는 감정이 있는 사람으로 여겨 주는 것처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진은 이대로 화운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어버리고 싶었다. 지난날 겪었던 고초가 서러워서인지, 이제라도 달라진 저의 주인이 반갑고 좋아서인지 그것조차 구분할 수가 없을 정도로 모든 감정이 휘몰아쳐 차라리 도망쳐버리 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아진...?”

그런 아진의 침묵을 이상하게 생각한 건지 화운이 하늘로부터 시선을 거둬 옆을 돌아보며 묻는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부정할수 없는 염려의 눈빛이 가득해 아진은 코를 한 번 훌쩍, 하는 것으로 제 마음을 갈무리하며 화운을 향해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저는 마마의 곁에 서 있는 게 좋아요.”

“...이미 하루 종일 내 곁에 서 있지 않았느냐. 그러지 말고 같이 앉아서 보자.”

“아닙니다. 아니에요, 마마. 저는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정말로요.”

“너도 참....”

아진이 그렇게까지 극구 거절하니 더 강요하기도 무엇해진 화운은 허탈한 미소를 한 번 흘리곤 다시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았다. 본래 달은 사람의 마음을 기묘하게 일렁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하더니 바로 오늘 이 달이 화운에게는 그런 달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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