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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20)화 (20/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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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웃음을 조금도 감추지 않은 얼굴로 숙비가 연빈을 바라보며 물었고 황후는 한숨을 쉰다. 아무래도 오늘은 황후궁에서 큰 소란이 날 모양이다. 평소 안그래도 숙비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연빈인데, 이렇게 대놓고 무시를 당하였으니 천하의 연빈이 참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이윽고 연빈이, 모두의 기묘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바로 그 연빈이 숙비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부족하여 폐하께서 가르침을 주신 것뿐이지 달리 저를 욕보이신 게 아닙니다. 앞으로는 더더욱 몸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여 소란을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허나 연빈은 모두의 기대를 배반하고 그리 말하며 숙비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기까지 했다. 숙비의 입이 떡하니 벌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숙비라고 처음부터 연빈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그가 황후나 정빈에 비해 성격이 불같은 건 맞는 말이었으나 그렇다고 단지 후궁 이라는 이유만으로 시기와 질투를 일삼는 그런 생각 없는 여인은 결코 아니었다는 말이다.

다만 연빈이 제 아비의 이름을 믿고 황후에게조차도 안하무인으로 굴며 온갖 패악질을 일삼으며 저보다 지위가 낮은 이들을 쥐 잡듯이 잡아 시비를 붙여대니 숙비 또한 성질을 참지 못하고 맞부딪히는 일이 잦아져 이제는 아예 눈만 마주쳐대도 서로를 비꼬며 못 잡아먹어 안달인 사이가 되고야 만 것이다.

"너... 너.......”

숙비의 입에서 말의 형태가 되지 못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경악이라는 말도 지금 숙비가 느끼는 감정은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연빈이, 천하의 연화운이 숙비가 대놓고 저를 조롱하고 있는데도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을 한다. ? 그것도 제가 주의하겠다는 말씩이나 덧붙이면서??

숙비는 당장이라도 손을 들어 제 뺨을 때려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꿈이 아니고서야 이런 일이 벌어 질 수는 없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하여 숙비가 경계심을 담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연빈을 향해 물은 순간, 그들의 등 뒤에서 태감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 납시오~!“


황제는 부러 연빈이 앉은 자리에 시선을 두지 않고 걸어가 황후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저를 향해 인사를 올리는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제야 황제의 시선이 얼핏 저만치에 있는 연빈을 잠시 스쳤으나 이한은 그에게 잠시 머물려는 시선을 서둘러 돌려버렸다.

인사를 마친 황후가 반가운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황제의 옆자리에 앉으며 묻는다.

"폐하, 어찌 예까지 오셨습니까.”

“조회를 마치고 시간을 보니 마침 황후궁에 모두 모여 있을것 같아서 황후의 얼굴도 볼겸 잠시 들러 보았소. 내가 갑자기 와 불편하시오?”

황후와 시선을 마주친 이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농을 건네자 황후가 살며시 마주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저희 얼굴에 전부 꽃이 핀 것이 아니 보이시는지요.”

이번에는 황후가 농을 되돌려 주려니 다른 비빈들도 저마다 소매로 입술을 가리며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황제의 시선이 아주 잠시, 연빈을 향했다. 연빈은 그저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로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깊이 고개를 숙인 채다.

“황후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리 아침부터 폐하의 용안을 뵙다니 오늘 저희의 운이 지금 여기에 전부 쓰였나 봅니다.”

숙비가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황제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건 오로지 연빈 하나뿐이다. 이한은 마치 애초에 그를 바라본 적도 없는 것처럼 또다시 황급히 눈을 돌리며 이내 조금 무거워진 목소리로 입을 연다.

“내 황후의 얼굴도 보고, 또 특별히 당부할 일도 있어 들렀소.”

“말씀하시지요, 폐하.”

이한이 후궁들을 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춘궁기가 다가오고 있어 이맘때쯤이면 매년 백성들이 불안함에 떠는 것을 모두 알 것이다.”

이어진 황제의 말에 황후를 비롯해 모두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이전에 수확한 곡식들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는데 새로 곡식이 여물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은 춘궁기는 매해 백성들이 굶주리는 어려운 시기였다. 하여 이한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후 줄곧 이 시기의 백성들을 적절히 구제하려 노력을 다해왔다.

이한이 말을 이었다.

“밖으로는 적절한 시기에 구휼소를 설치하여 이때를 위해 황실에서 미리 비축해 두었던 곡식을 나누어 줄 예정이니 황후를 비롯해 여기에 있는 그대들도 당분간은 지출을 줄이고 자중하여 백성들의 고난을 마음으로 함께하도록.”

“예, 폐하. 명을 받들겠습니다.”

황제의 말이 끝나자 황후와 후궁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으며 한목소리로 말했다. 헌데 보통이라면 바로 일어나라 하였을 황제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후에도 일어나란 말이 없다. 제일 앞에 있던 황후가 의아함에 슬쩍 고개를 들어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황후의 뒤쪽 어딘가로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몹시도 어렵고 혼란스러운 빛깔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얼핏 경멸을 하는 것 같았다가, 애틋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가, 호기심을 가진 것 같기도 해서 무어라 한 가지로 설명할 수가 없는 감정이었다.

감히 황제로부터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해 볼 순 없었지만, 황후는 본능적으로 황제가 누구를 그리 바라보고 있는지 짐작했다. 순간 황후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스스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이 이는 것을 느꼈으나 황제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그러했듯 황후 역시 제 마음에서 이는 감정 또 한 무엇으로 명명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일어나라.”

이윽고 황제가 아주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들어와 애써 연빈으로부터 시선을 떼려 노력하였던 것이 전부 무색하게 황제는 어느 순간부터 연빈에게 고정된 저의 시선을 어쩌지 못했다.

간밤에 악몽을 꾸며 앓았던 것이 거짓이 아니었던지 하루 사이 연빈의 얼굴은 더더욱 살이 내린 것 같아 척 보기에도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이한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연빈에게 닿아 있는 시선은 좀처럼 거둘 수가 없다.

모진가. 내가 그에게 모질게 굴고 있다.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이한은 서둘러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지, 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 간 연화운이 해왔던 행동을 생각한다면 이한이 그에게 모질다는 말은 누구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허면 자신은 어째서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가. 어째서 마치 속이 상한 것처럼, 그의 얼굴에 마음이 아픈 것처럼 이리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가.

“그럼 일이 남아 먼저 가 보겠소.”

이한은 간신히 황후를 향해 그 한마디를 내어놓고는 천천히 저를 두고 양쪽으로 물러선 후궁들 사이를 걸었다. 중간의 어디쯤에서 발끝이 아주 잠시 멈칫거리긴 하였으나 이한은 멈추지 않았다.

“황제 폐하를 배웅합니다.”

등 뒤로 들려오는 수개의 목소리 중 궁금하지도 않은 이의 음성 하나를 가늠해 보며, 황제는 황후궁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이 이야기를 지금 여기까지 와서 할 필요는 없었음을, 황제는 굳이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저는 폐하를 사모하여 그런 것입니다......! 폐하! 정녕 제 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날, 황제는 제 앞에 엎드려 읍소하는 연빈을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백한 낯빛의 연빈은 비록 눈물을 흘리고는 있었으나 조금도 주눅이 들거나 죄스러워하는 모양새는 아니다. 그 뻔뻔함에 황제는 정말이지 헛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지난 며칠 동안 황제는 밤마다 정안궁을 찾았다. 연빈이 크게 아파 시름시름 앓으며 오로지 황제만을 찾으니 황제가 차마 그를 외면할 수 없어 찾아와 위로해 준 것이다.

헌데 알고 보니 그 또한 거짓이었다. 연빈은 황제가 저를 쉬이 찾아 주지 않으니 부러 몸에 탈이 나게 하는 약을 몰래 먹고는 아프다는 핑계를 들어 황제를 제 옆에 묶어 두었던 것이다.

폐하를 사랑하여서 그랬다고. 그 모든 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탓이라고,

이미 수도 없이 들은 그 핑계를 곱씹는 황제의 입에선 그저 허탈한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지난 며칠 아픈 몸으로도 폐하께서 저의 곁을 지켜 주시니 행복하다고 미소 짓는 연빈의 곁에서 자신이 느꼈던 죄책감은 다 무엇이었나 싶었다.

아무리 하는 짓이 괴팍하여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오로지 저 하나만을 보고, 저 하나만을 믿고 황궁으로 들어온 이에게 내가 너무 모질진 않았다. 내가 그리 모질게 굴어 이 사람이 이리 아픈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들로 마음이 불편하였던 시간들이 한순간에 무의미한 것이 되어 바닥에 버려졌다.

'제가 이리 하지 않았으면 폐하께서 저를 찾아 주셨겠습니까!‘

그런데도 연빈은 황제의 앞에, 그 또한 나를 마음껏 사랑해 주지 않은 폐하의 탓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굳어진 표정의 황제가 연빈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의 연심은 나를 기만하는 것이냐.‘

황궁의 그 누구도, 언제나 진심으로 살아갈 순 없음을 황제는 잘 알고 있었다. 삶이라는 것이 사실 모두에게 그러하겠으나 그중에서도 이곳 황궁은 그 어디보다 거짓이 가장 두텁게 응집되어 있는 곳임을, 믿었던 형제들의 손에 목숨까지 위협받았던 황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황후도, 그 어떤 후궁도 예외는 없다. 그들은 마음을 다해 지아비를 사모한다 하지만 황궁에서 산다는 건 때때로 살얼음판을 걷는 일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그들이 말하는 연정의 이면에는 가문의 영광과 일신의 안위 등이 함께 도사리고 있음을 어느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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