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9)화 (19/167)

19

사실 정안궁은 그토록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연빈이 자주 기거하는 내실이나 침소에는 좀처럼 화병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연빈이 꽃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도 하였거니와 조금만 수가 틀리면 손에 잡히는 화병을 전부 집어던지기 바쁘니, 그 탓에 여러번 곤경을 당하였던 정안궁의 궁인들이 내무부에서 보내는 꽃들도 좀처럼 연빈 가까이에 두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헌데 그런 이들이 스스로 화병에 꽃을 담아 주인에게 바쳤다는건 여태 연빈을 믿지 못하여 의심하였던 이들의 마음에도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는 뜻일 터. 아진은 무엇보다 그것이 기뻐 마음이 들떴다. 정작 그 자신도 얼마 전까지 연빈의 마음을 계속 의심하고 있었던 것은 이 순간 기억도 나지 않는 모양이다.

화운이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는 어린 궁녀에게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네, 마마... 소, 소인의 이름은 서서이옵니다.”

“서서... 너희 덕분에 더없이 기운이 났어. 정말 고마워.”

"마마의 기쁨이 곧 소인들의 기쁨입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기껏 화병을 만들어놓고도 누가 그것을 들고 들어갈까 결정을 내리지 못해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이 다가 결국 떠밀리다시피 하여 왔던 궁녀, 서서는 저를 향해 미소를 지어 주는 주인의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얼굴 가득 마주 웃음을 짓고는 들어올 때와는 달리 가벼운 발걸음으로 빠르게 침소를 나섰다.

바로 앞에서 제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이들에게 해 줄 말이 아주 많았다.

“마마.”

그런 어린 궁녀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화운을 아진이 가만히 부른다. 그 목소리가 다소 낮아진것 같아 화운이 미소를 거두며 시선을 돌리자 화병을 품에 꼭 안은 아진이 화운을 향해 말했다.

"마마께서 달라지겠다 하신 것을 처음엔 아무도 믿지 못했지요.”

“저도 그랬어요. 마마께서 저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시면 대해 주실수록 혹시나 그 말을 믿고 방심하였다가 무슨 꼬투리를 잡힐까 더 겁이 나고 무서웠어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였다. 하물며 하루에도 열두번씩 변덕을 부리던 제 주인의 마음을 지금이라고 아진이 어떻게 확신을 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마마께오서는 결국 저의 마음을 돌리셨어요.”

하지만 아진은 생각한다. 만에 하나라도 제 주인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진심으로 지난날의 과오를 모두 반성하여 이제라도 잘못하였던 모든 것을 바로 잡고 싶어 하신다면.

“그리고 이제는 마마의 목소리만 들어도 벌벌 떨던 저 아이들을 바꾸셨지요.”

아진은 혹시라도 제 주인이 아무도 저를 믿어 주지 않는 고독함에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지 않도록 그분을 도와드려야만 했다. 그건 이 황궁에서 오로지 경멸만을 받고 있는 주인을 위한 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고작해야 시녀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은 자신의 말에 감동이라도 한건지 연신 일렁이는 화운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아진이 웃었다.

“그러니 마마. 언젠가는 마마께서 황제 폐하의 마음 역시... 돌리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소인은 그리 믿어요.”

아진은 저의 주인과 스스로를 위해 기꺼이 그의 곁을 진심으로 지키기로 하였다.


“어제의 일을 황후마마께서도 들으셨습니까?”

황후에게 문후를와 비빈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숙비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와 동시에 황후궁에 있는 이들의 눈동자 모두에 흥미로운 빛이 어린다. 어제 정안궁에서 벌어진 일은 하루 종일 온 황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본궁도 듣기는 하였지.”

“하다하다 이제 연빈이 별 같잖은 연기를 다 하는게 아닙니까.”

“물에 뛰어들어도 폐하께서 쳐다도 보지 않으시니 마지막 발악을 하는게 아니겠는지요.”

황후가 한 마디 아는 체를 하자 앞에 앉아 있던 숙비는 물론이고 다른 후궁도 연빈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황후가 더 말을 붙이지 않자 숙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번 폐하께서 운화궁에 오셨을 때도 연빈에 대해 어찌나 치를 떠시던지.... 폐하의 마음을 돌릴 가망이 전혀 없으니 천하의 연빈도 고분고분해진 척을 할 수밖에 없었나 봅니다.”

“누가 아니랍니까. 그래봐야 얼마나 갈는지....”

숙비의 말에 다시 한 번 맞장구치며 말을 이은 건 정빈, 정송현이었다.

연빈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기행을 벌이고 있는지 완벽하게 짐작할 수야 없었다. 어찌 되었든 황제를 꼬여내려는 수작이라는 것은 분명하겠지만,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 이 행동을 그리 오래 이어가지 못 하리라는 건 모두가 확신하는 사실이었다.

그 자리에서 황후는 서로 마음이 맞아 떠들고 있는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 지아비를 모시는 이들이 여럿이니 사실 후궁들이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은 역사와 함께 줄곧 존재하는 일이긴 하였다. 그러나 현 황실에는 이전과 비교해 후궁이 매우 적고 연빈을 제외하면 그 성품이 고약한 이가 없는 데다, 황제가 고루고루 후궁들을 잘 살펴준 탓에 크게 문제가 될 만큼 사이가 벌어진 적이 없었다.

게다가 연빈이 다른 후궁과 척을 지며 다투기를 밥 먹듯 하니 자연히 공공의 적을 만든 후궁들은 선대의 이들보다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내, 황후가 말했다.

“사람 속을 어찌 다 짐작할 수 있겠나. 이제라도 연빈이 후궁으로서 품위를 지키고 진심으로 폐하를 모신다면 환영할 일이니 자네들도 괜히 일을 어렵게 만들지 말고 연빈을 도와주도록 하게.”

“황후마마. 저희가 언제 먼저 나서서 일을 만든 적이 있습니까. 전부 연빈이 먼저 시비를 걸어오니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숙비가 새침한 표정으로 우는 소리를 하며 앞에 앉은 정빈에게 시선을 두어 동의를 이끌어내자 재빠르게 정빈이 '그렇습니다, 황후마마.' 하고 말을 붙인다. 황후는 말을 이었다.

“본궁이 그것을 어찌 모르겠나. 다만 어쨌든 연빈이 제 입으로 달라지고 싶다 그리 말을 하였으니 같은 내명부의 일원인 자네들이 연빈을 잘 이끌어 주어야 할 것이야.”

황후가 그리 거듭 말을 하자 더는 반박할 수 없는 후궁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에게 무릎을 굽히며 '명심하겠습니다, 황후마마. 하고 대답을 올렸을 때

“황후마마. 연빈이 들었사옵니다.”

다소 당황한 것 같은 태감의 목소리와 함께 황궁을 온통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소문의 주인공, 연빈 연화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빈, 이제 몸은 좀 괜찮은가.”

침묵을 가장 먼저 깨고 입을 연건 황후였다. 양 옆으로 앉아 있는 후궁들 사이에선 여전히 미묘한 어색함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그것들은 연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본래 연빈은 치장하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해 , 평소 사치부리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황후는 물론이고 황궁내의 그 어떤 여인들에게도 뒤처지지 않게 화려한 모습으로 꾸미고 다니는 이였다.

헌데 지금 눈앞에 있는 연빈의 모습은 어떠한가. 연한 푸른색의 옷은 말할 것도 없고 머리에도 최소한의 치장만을 한 연빈의 모습은 그간 단 한번 상상 조차 해본 일이 없을 만큼 수수하고 단아했다.

바로 곁에 앉은 정빈은 그런 연빈의 모습을 연신 흘끔거렸다. 사내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단한 미모를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오늘의 연빈은 평소 그를 고깝게 여기던 이들까지도 다시 돌아보게 만들 만큼 고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단순히 치장의 문제가 아니라 단정하게 시선을 내린 채 곧은 자세로 앉아 있는 연빈은 이전에 그들이 알던 연빈과는 정말로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낯선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정빈은 자꾸만 그에게로 향하는 자신의 시선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달라진 건 비단 외형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방금 연빈이 그들의 앞에서 보였던 행동은 또 어떠한가.

그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깍듯이 황후에게 예를 올리며 이제야 문후를 들게 된 것에 대해 죄를 청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군더더기 없이 예의가 바른지 황후마저도 잠시 인사를 받는 것을 잊은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을 정도였다.

황후에게만 그러한 것도 아니었다. 연빈은 평소 마주치기만 하면 못 잡아먹을듯 으르렁거리던 숙비와 정빈에게까지 무릎을 잠시 굽혀 인사를 하였으니 지금 이렇게 모두들 경악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를 둘러싸는 당황한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 연빈은 황후의 물음에 천천히 입을 연다.

"황후마마께서 배려해 주신 덕분에 지금은 거의 다 좋아졌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자네의 변고를 듣고 바로 찾아가려 하였으나 마음 편히 쉬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굳이 걸음을 하지 않았어. 혹시 서운하였다면 마음을 풀거라.

“서운하다니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마마. 그 일 역시 저의 잘못인 것을요. 황후마마께오선 조금도 마음 쓰실 것이 없습니다.”

연빈이 한 마디 한 마디를 내어놓을 때마다 황후 역시 당황스러움을 어찌하지 못해 숨을 참을 지경이었으니 다른 후궁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연빈의 뒤에 서 있던 아진은 시선을 바쁘게 교환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비빈들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갈 것 같아 보이지 않게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래.... 그리 생각해 준다니 다행이군. 아직 안색이 창백한 것을 보니 완쾌된 것은 아닌 모양이야. 연빈은 폐하께오서 더 염려하시지 않게 몸조리를 잘 하도록.”

"황후께서도 차암. 폐하께서 염려를 하실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황후의 말에 이어 입을 연건 숙비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연빈의 모습에 숙비 역시 크게 놀랐으나 그렇다고 그를 마음껏 비웃을 수 있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숙비의 의도를 눈치챈 황후가 이내 숙비, 하고 그를 불러 말을 막으려 했으나 그보다 조금 더 빠르게, 얼굴 가득 웃음을 두른 숙비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정녕 연빈의 몸을 염려하셨다면 어제 바닥에 그리 꿇려두고 욕을 보이셨을 리가 있겠습니까.”

곧장 품, 하고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달라지겠다고, 폐하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고 그리도 절절 하게 고했는데 황제에게 되돌려 받은 것은 모진 불신뿐이었으니 망신도 이런 망신이 또 없다.

“아니 그런가, 연빈?”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