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아진이 물러가고 나자 찾아온 적막 속에 화운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여전히 높기만 한 천장을 바라본다. 애써 지워낸 보람도 없이 오늘 황제의 앞에 엎드려 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겁도 없이 허튼짓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폐하께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을 하는 순간 제가 느꼈던 감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분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열망.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감히 제가 바라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토록 그리기만 하였던 황제의 앞에 서는 순간 화운은 저도 모르게 그러한 욕심을 내고야 말았다.
하지만 사실은 그조차도 온전히 솔직한 마음은 아니었던 걸 과연 그 누가 알까. 사실 화운이 정말로 바라던 것은. 마음 깊고 깊은 곳에 꽁꽁 감추어두어 스스로도 쉬이 떠올릴 수가 없게, 그리 없는 척을 하 지만 사실 화운이 원하는 것은, 그것은.
‘사랑받고 싶어.....’
화운은 꿈에서 저를 온통 집어삼키던 그 감정을 떠올렸다. 다른건 아무래도 좋으니.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으니 오로지 그분의 사랑 하나만을 원하고 또 원하였던 그 감정을.
그것은 과연, 누구의 감정인가.
화운은 눈을 감았다. 자신은 감히 그것을 짐작할 수 없었다.
“푹 주무시지 못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간밤에 황제를 모신 후궁이 아무도 없던 관계로 황제의 옷시중을 들던 오 태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피곤이 여실히 묻어나는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수발을 받고 있던 황제, 이한이 태감의 말에 뾰족한 표정으로 눈을 뜨곤 퉁명스럽게 입을 연다.
“잘 자지 못할 연유가 무엇이냐. 아주 편하게 잘 잤다.”
“내가 마음이 불편할 게 뭐가 있다고.”
정작 태감은 더한 말이 없는데 마음이 불편하니 무어니 하는 말을 괜히 늘어놓고 있다는 자각은 없는 모양이다. 오 태감은 고개를 숙인 채로 잠시 미소 짓다 말고 패옥을 마무리하여 달았다.
"그....”
태감이 달리 덧붙이는 말이 없자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이한이 이내 흠흠,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슬그머니 다시 입을 연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황제는 그... 그러니까....' 하고 연신 말만 꺼내고 있을 뿐 정작 본론은 꺼내지도 못하고 있다.
그사이 황제의 의관을 전부 챙긴 오 태감은 한 발 자국 물러나 허리를 굽히며 대신 말을 이었다.
“정안궁에서는 특별한 기별이 없었으나 연빈마마께서 밤새 악몽에 시달리며 앓으셨다 합니다.”
황제의 움직임이 일순 멈추었다. 태감은 감히 그 얼굴을 올려다보지 못하였으나 대신 태감의 시선 아래에서 몇 번이나 움켜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는 황제의 주먹을 보았다. 이내 머리 위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묻지도 않은 말을 잘도 떠드는 습관이 들었어.”
“송구하옵니다.”
“나는 정안궁 따위 하나도 안 궁금했다.”
“그러하옵니다. 소인이 멋대로 떠들어댄 것이지요.”
이상하게 요즘 들어 더 얄미워진 오 태감의 목소리에 이한은 습관처럼 그 머리통을 한번 흘겨보곤 이내 몸을 움직였다.
언젠가, 폐하가 아니 오시면 저는 밤새 악몽에 시달려 울다 깨어나기를 반복한다 투정을 부리던 연 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또한 이한에게는 달리 특별한 핑계도 아니었다는 말이다.
어디 악몽만 그러한가. 열이 난다. 숨을 제대로 쉬질 못한다. 밤새 몸에 한기가 들어 잠을 이루지 못 한다. 그간 연빈이 이한의 걱정을 인질처럼 삼은 일은 손에 다 꼽지도 못하게 많았다. 그런 꾀병 하나하나에 일일이 신경을 쓰고 걱정을 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한은 언제나처럼 그 말을 무시하기로 했다.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딱딱한 바닥에 제가 꿇려놓은 일도, 마른 어깨가 제 앞에서 웅크려 조아리며 마치 진심을 다하듯 말을 고한 것도, 그런 이를 두고 궁인들이 다 보는 앞에서 제가 모질게 굴어 모욕을 준 일도 황제는 다시 곱씹어 보고 싶지 않았다.
말한 그대로 황제는 어제의 일에 하나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었고, 연빈이 악몽을 꾸며 앓았든 아팠든 그것도 정말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으며, 걱정되지도 않았으므로 하여간에 저와는 전혀, 조금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마마. 정말 문후를 드리러 가실 거예요?”
화운의 머리에 수수한 비녀 하나를 꽂아 주면서도 아진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창백한 얼굴을 하고 경대 앞에 앉은 저의 주인은 당장에 쓰러져도 이상할 것 하나 없어 보였다. 어제 그런 큰 일을 겪고 밤새 잠까지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몸 상태가 좋을 리 만무하다.
연빈을 모시며 아진은 언제나 저 하나의 안위를 언제나 걱정해왔는데 이상하게 요 근래에는 저보다 주인의 상태를 걱정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런 아진의 마음도 모르고, 화운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대도. 문후드리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어.”
"하지만 마마... 문후를 드리러 가면 황후마마뿐만 아니라 다른 마마들과도 마주쳐야 하는데....”
아진이 걱정하는 건 그것이었다. 황후께 인사를 드리고 오는 일이야 다소 피곤하긴 하여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겠으나 정말로 어려운 건 그 자리에서 마주칠 다들 비빈들이었다. 평소 화운은 다른 후궁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혹시라도 또 시비가 붙어 무슨 일이 날까 염려가 되었다.
화운은 제가 본래 가진 것보다 더 붉어진 입술이 신기해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어차피 평생 피할 수도 없는 일이니 차라리 빨리 겪는 것이 낫지.”
화운의 말은 분명 설득력이 있었으나 아진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다 지우지 못했다. 화운의 말대로 언젠가 겪어야 할 일이긴 하지만 아진은 화운의 몸이 조금이라도 좋아진 뒤에 겪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마....”
그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침소로 들어와 화운을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 정안궁의 어린 궁녀 중 하나가 머뭇거리며 들어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의아한 얼굴을 한 아진이 먼저 묻자 어린 궁녀는 몸을 더 웅크리며 입을 연다.
“그것이... 그... 어제 소인들이 보기에 마마께서 정원의 꽃들을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서....”
그 말에 화운이 작게 아, 하는 소리를 낸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정원에서 꽃과 나무에 관한 화운의 물음에 곁에서 열심히 대답을 하던 정원을 관리하는 궁녀였다.
애처롭게 목소리를 떨며 더 말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궁녀에게 아진이 '그래서?' 하고 말을 재촉하자 어린 궁녀가 품에 안고 온, 꽃이 가득 꽂힌 화병을 앞에 내려놓고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하, 하여 마마의 침소에 고, 꽃이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소인들이... 이.... 이것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
화운의 시선이 궁녀가 내놓은 화병에 닿았다. 화운으로서는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안에 꽂힌 꽃봉오리 하나하나가 건강하게 여물어 당장이라도 팡 터져 화사하게 피어날 것만 같았다.
여러 가지 색을 가진 꽃들이 적절히 어울리게 섞인 것 하며 정성스럽게 다듬어진 줄기와 잎까지. 잘 모르는 이가 얼핏 보아도 손이 많이 간 것이 빤히 보였다.
이번에는 화운이 입을 열었다.
“....나를 위해 준비한 것이니?”
“예, 마마. 마, 마음에 안 드시면 당장 치우겠습니다.”
“아니다. 아니야. 마음에 든다. 정말 마음에 들어.”
혹시라도 눈치가 없이 주인의 심경을 거스르기라도 했을까 봐 벌벌 떨며 눈치만 살피던 궁녀는 화운의 별것 아닌 물음에도 화들짝 놀라 허둥거렸다. 하지만 당장 화병을 가지고 나갈 것처럼 굴던 그는 이어 들려온 화운의 한마디에 우뚝 멈춰 섰다.
그사이 몸을 일으켜 다가온 화운이 손수 손을 뻗어 어린 궁녀를 일으켜 세웠고 화병을 든 아진이 화운의 앞 가까이에 꽃을 가져다 대 주었다.
"예쁘다.... 아직 피지도 않았는데 향이 좋구나. 정말 고마워. 정원을 관리하던 아이들이 다 같이 준비한 것이니?“
“네? 아, 네... 네! 저희가 같이... 같이 준비하였 습니다....”
어린 궁녀는 그때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릴 지경이었다. 주인이 저를 향해 고맙다고 말한 것도 제가 제대로 들은 건지 귀를 의심할 판에 그가 손수 저의 팔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연빈의 손끝이 가볍게 닿았던 팔 언저리가 화끈 거리는 것 같았다. 주인에게 뺨을 후려 맞을 때 빼고는, 어린 궁녀는 단 한번도 연빈의 손길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궁녀의 대답에 화운은 다시 얼굴 가득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꽃봉오리 끝에 코를 대고 눈을 감은채 향기를 음미했다. 파리한 안색을 하고서도 그 얼굴이 그린 듯이 아름다워 궁녀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주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을 뜬 화운이 아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진, 이것을 가장 잘 보이는 창가에 놓아 주고 .... 아이들에게 상을 주고 싶은데 괜찮을까?”
“물론이지요, 마마. 마마께오서 주인이신걸요. 제가 잘 처리하도록 할게요.”
어제 일 때문에 내내 제 주인의 속이 얼마나 상하였을까 그런 걱정을 하느라 마음이 어지러웠는데 생각지도 못한 선물 덕분에 마마의 얼굴을 한결 밝아지자 덩달아 신이 난 아진의 목소리가 높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