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연빈의 몸이 약한 것은 황제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사내가 되어서 여인들보다 더 깡마른 몸을 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 체질이 정상은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연빈은 언제나 십(十)의 크기로 아프면 황제의 앞에선 만(萬)의 크기로 아픈 척을 하는 이였고, 평소에는 건강한 이들보다 더 기력이 넘치게 행패를 부려대니 나중에는 그가 몸이 약하다는 것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문득, 불어오는 봄바람에도 흐트러질 사람처럼 가녀린 모습으로 목련꽃 아래 서 있던 연화운이 떠올랐다. 창백한 피부는 볼품이 없기보단 그저 투명해 보였고 여름이라 드러난 목선이며 얇아진 옷차림 덕분에 더 선명하게 가늠할 수 있게 된 마른 몸은 이한의 품을 다 채우지도 못할 것 같아 보였다.
“자업자득이지.”
이내 황제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떠오른 연화운의 모습이 낯설고 거슬려 벌컥 짜증이 밀려들었다. 잘못은 제가 다 해놓고 무얼 잘했다고 드러누워 아프다고 시위를 하느냔 말이다.
오 태감이 곁에서 ‘예. 그 말씀이 옳습니다, 폐하.’ 하고 황제의 말에 맞장구를 쳤으나 이한은 이상하게 그 목소리가 성에 차지 않아 다시 태감을 휙, 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뭐. 내가 연빈에게 너무하기라도 했다 이 말이냐?”
“아닙니다, 폐하. 소인이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사옵니까. 폐하께서 하시는 일이 곧 법도이고 정당한 일이십니다.”
그러니 그게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는 말이다. 분명 오 태감이 맞는 말을 하고 있는데. 감히 황제를 비꼬거나 탓을 하려는 기색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데 어째서 태감의 말을 듣는 황제의 마음은 이리도 껄끄러워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은지 모를 일이다.
애써 떨치려 하였던 보람도 없이, 꽃나무 아래에서 미소 짓고 있던 연화운의 얼굴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이한은 저의 등줄기를 따라 옅은 소름이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제가 다시 그린 연빈의 얼굴이 두려울 정도로 낯설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연빈의 미소를 본 적이 있고 없고를 논할 정도가 아니었다. 이한이 장담하건대 그것은 절대로 이전의 연화운이 가지고 있던 얼굴이 아니다. 포악한 성질 탓에 감추어져 있던 미소, 같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그건 없던 얼굴이다. 연화운이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 그런 것이다.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이한은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허면 그 얼굴은. 그 미소는. 이한의 마음에 기어코 어떠한 흔적을 남겨버리고야 만 오늘의 연화운은 과연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말인가.
“…황후궁으로 모실까요, 폐하.”
어두운 얼굴로 말이 없이 일어선 황제에게 태감이 물었다. 황제는 답이 없었다.
“운화궁으로 가시겠습니까.”
태감이 다시 물었다. 황제는 다시 말이 없다.
“……허면 정안궁으….”
“되었다. 오늘은 그냥 안정전에 머무를 것이다.”
허나 마지막 태감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이한은 마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처럼 서둘러 입을 열었고 오 태감은 그저 허리를 굽혀 대답을 하였다.
침전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아주 느린 발걸음을 옮기며 황제는 생각에 잠겼다.
죽음은 과연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인가. 죽음을 겪고 나면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일이 정말로 가능한 일인가.
성이한.
그는 대 안국의 존귀한 천자였으며 많은 위험 속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였으나 죽음의 문턱에서 되살아난 경험은 해본 일이 없어 해답을 찾지 못한 채 홀로 밤을 지새웠다.
‘살려줘…….’
턱 끝까지 숨이 찼다. 호흡을 하려 입을 벌리면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넘어와 고통은 더 심해지기만 했다. 사내는 발버둥을 쳤다.
‘숨 막혀… 고통스러워…….’
발버둥을 쳐도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몸은 자꾸만 아래로 가라앉고 엄청난 추위가 몸의 구석구석을 파고든다. 아팠다. 고통스러웠다.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숨도, 뼈까지 시리게 만드는 차가움도 너무나 두려웠다.
‘아니야… 아니야, 나는….’
하지만 그를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 숨 막히는 답답함이 아니었다. 그를 더 두렵게 만드는 건 추위가 아니었다.
‘나는… 사랑받고 싶어…….’
순간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이 밀려왔다. 서러움과 고독, 괴로움, 질투, 외로움, 분노와 원망 그 모든 게 해일처럼, 폭풍처럼 그의 온몸을 둘러싸 그를 좀먹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랑받고 싶어….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상관없어. 내가 원하는 건 오직 그것뿐이야….’
눈물이 터져 나왔다.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는데도 꽉 막힌 폐를 타고 넘어 울음이 쏟아진다. 그 모든 감정들이 빠르게 그의 감각을 잠식해나갔다. 이윽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이 아득해지는 시야 너머로 오로지 단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으나 아무리 손을 뻗어도 그는 영영 멀어지기만 하여 닿을 길이 없어,
그에게 남은 건 오로지 어둠, 어둠, 어둠뿐이었다.
“마마! 마마!”
“헉!”
화운은 마치 물에 빠졌다가 건져진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켰다. 화운이 저도 모르게 허공으로 팔을 뻗어 무엇이라도 잡으려는 듯 버둥거리자 아진이 재빨리 그의 두 손을 잡아 제 품으로 끌어안으며 말한다.
“마마, 저 아진이에요. 마마, 정신 차려 보세요!”
“아진…?”
“예, 마마! 아진입니다. 악몽을 꾸신 모양이에요.”
발버둥이 좀 잦아들자 아진이 화운의 등을 연신 토닥이며 제 주인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쓴다. 낮의 일이 있고 난 뒤 몸이 좋지 않아 약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든 화운은 그 후에도 선잠이 든 상태에서 계속 끙끙거리며 앓아 아진의 속을 태웠다.
그러다 한밤이 되어서야 겨우 숨이 잠잠해져 이제 곤히 잠이 드셨나 보다 안심을 하였는데 두 시간도 되지 않아 악몽을 꾸고 이리 깨어난 것이다.
“내가… 악몽을….”
“네. 그저 꿈일 뿐이에요, 마마. 이제 괜찮아요.”
화운은 쉬이 정신이 차려지지 않는지 연신 아진이 했던 말을 받아 중얼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여전히 꿈속에 있는 것처럼 호흡이 쉽지 않았고 몸이 덜덜 떨려왔다. 너무나도 생생한 감각 때문에 좀처럼 꿈으로부터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화운의 정신이 조금 돌아온 것은 아진이 다른 궁녀에게 일러 가져온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신 뒤였다. 그때까지도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해 아진에게 기대 밭은 숨만 몰아쉬던 화운은 차를 마시고 나서야 서서히 선명해지는 현실의 감각으로 잠시 흐릿해졌던 기억을 되새겼다.
생각지 못하게 마주친 황제로부터 또다시 모진 말을 들었다. 달라지겠다고. 폐하께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화운의 앞에서도 황제는 차가운 말로 화운의 마음을 내친 채 돌아갔다. 그 뒤로 밤까지도 내내 화운을 괴롭혔던 한기는 분명 황제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리라.
하지만 화운은 황제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연화운이 그동안 했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황제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화운은 솔직히 하운인 자신 역시 마찬가지로 성심을 받을 자격이 없는 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단순히 하운이 미천한 출신인 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가 사실은 감히 황제를 바라볼 수도 없는 천민 출신이라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로 화운이 황제의 앞에 면목이 없는 것은, 지금의 화운이야말로 황제의 앞에 거짓으로 존재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황제가 화운에게 가식을 떨어댄다 욕을 한들 화운이 어디 그 말이 너무하다 할 수 있을까. 화운의 존재 자체가 황제에게는 거짓이었다. 화운은 사실 연화운이 아니고, 그는 본디 하운이었기 때문에 화운은 밥을 먹고, 숨을 쉬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도 황제에게 불경을 저지르고 있는 대역 죄인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니 화운은 황제께서 저에게 얼마나 가혹하게 구신다 한들 기꺼이 그것들을 달게 받아야만 했다.
“이제 괜찮으니 그리 걱정스럽게 볼 것 없어.”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마음이 깊이 가라앉은 화운이 여전히 염려 가득한 표정으로 저의 안색을 살피고 있는 아진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아진은 손수건으로 연신 화운의 얼굴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주고 있었는데, 그 손길이 어찌나 다감하던지 애써 감추려고 하여도 자꾸만 차오르던 염치없는 슬픔이 아진의 손길 하나하나에 물러가는 것만 같았다.
“아진….”
다시 천천히 저를 자리에 눕혀준 뒤 이부자리를 매만져주는 아진을 화운이 가만히 불렀다.
“예, 마마.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셔요?”
자연스럽게 묻는 아진의 얼굴에서는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느꼈던 두려움이 보이지 않아 화운은 저도 모르게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적어도 제가 연화운이 된 것이 눈앞의 이 한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겠거니.
그런 생각을 하면 화운은 매 순간 느끼는, 남의 삶을 대신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아주 조금이나마 지울 수 있었다.
“아니. 그냥 고마워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그래도. 고마워, 정말. 이제 괜찮으니까 너도 가서 편하게 자도록 해.”
“예, 마마.”
화운은 아진이 그리 대답을 하여도 아마 밤새 저의 침전 앞에서 불편한 새우잠을 자리라는 걸 알았다. 허리를 굽힌 채 조용히 물러나는 아진을 보며 화운은 마음을 다잡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돌이킬 수 없는 관계는 어찌할 수 없겠으나 내가 잘 해내는 것으로 더 편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
오로지 그것이 지금의 화운이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