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그게 정말이냐?”
황후는 입으로 가져가던 찻잔을 다시 탁자에 내려놓으며 소식을 가지고 온 황후궁의 태감에게 되물었다. 태감은 허리를 한번 더 깊이 숙였다 살짝 들고는 말을 잇는다.
“예, 황후마마. 폐하께오선 정안궁을 다시 나서실 때까지 연빈에게 일어나라는 말 한 마디 하시지 않으셨다고 하옵니다.”
황후, 자란의 눈빛이 깊어졌다.
사실 황제가 연빈에게 애정이 없는 것이야 이 황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일이니 그분이 연빈에게 그리 모질게 말씀하셨다는 건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나 황후를 놀라게 만든 것은 연빈이 오늘 황제의 앞에서 했다는 말과 행동이었다.
황후는 만백성의 어머니이자 내명부의 주인으로 황제 폐하를 모시는 모든 비빈들을 다스릴 책임이 있었다. 그런 황후에게 그간 연빈은 정말로 답이 없는 골칫덩이가 아닐 수 없었다.
연빈이 제 아비의 위치를 믿고 황후에게조차 불경하였던 것은 차라리 사사로운 일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연빈이 내명부에서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그것이 곧장 내명부를 제대로 통솔하여 다스리지 못 하는 황후의 능력과도 직결된 문제가 되어버린다는 점이었다.
황후가 아무리 덕으로 연빈을 다스리려 애쓰고, 틈이 날 때마다 불러 타일러도 소용이 없었다. 황제의 말도 듣지 않는 이가 황후의 말에 콧방귀나 뀌었겠다.
그는 언제나 황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였고 뒤를 돌아서면 같은 행패를 또다시 반복하더니 나중에는 황후가 부르기만 하면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아예 황후궁을 피하기까지 하였다. 말이 좋아 후궁이지 천둥벌거숭이가 따로 없었다.
“달라지고 싶다라....”
황후는 연빈이 오늘 황제의 앞에서 하였다는 말을 조용히 읊조려 본다. 이제부터라도 폐하의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였다던가.
충성스러운 사람이라. 충성스러운 사람.
황후는 연빈이 했다는 그 말이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도무지 연빈이 할 법한 말이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얌전히 지내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폐하께서 마음에 드실 어질고 현명한 후궁이 되겠다는 말도 아니었다. 후궁으로서 할 수 있는 많은 말을 놓아두고 연빈은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겠다고 하였다.
“꼭 장군 같은 이들이 할 법한 말이질 않나....”
황후가 내려놓았던 찻잔으로 다시 손을 가져가며 중얼거린다. 황후라고 황제와 생각이 다른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 황후는 황제보다 더 연빈의 바닥을 많이 들여다본 사람이기도 하였다. 아무리 죽다 살아났기로서니 그런 이가 하루아침에 정말로 달라졌다는 걸 황후 역시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연빈은 정말로 대단한 결심을 하고 혼신을 다한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황제를 사로잡으려 마음을 먹은 건지 알 수가 없어 괜히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그래 봤자 얼마나 가겠습니까, 마마.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옵소서.”
황후의 표정이 풀어질 줄을 모르자 곁을 지키고 있던 황후궁의 궁녀가 말했다. 황후는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시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얼마 가지 못할 일이니 깊이 생각할 것도 없겠지.”
그것을 알고 있는데. 황후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인데. 어째서 이번에는 가슴 한구석에 돌멩이 하나가 틀어박힌 것처럼 그냥 넘기기가 어려운 건지.
황후의 자리에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소한 것에도 신경을 쓰게 되는 모양이라고, 황후는 그리 생각하며 이내 정안궁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황제가 떠난 뒤에도 정안궁에서는 누구 하나 쉽게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황제가 남기고 간 살을에는 바람이 여전히 정안궁을 휩쓸고 있는 기분이다.
황제의 가마가 정안궁 밖으로 아주 나갈 때까지도 그들의 주인인 연빈은 바닥에 엎드린 채였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로 이리저리 눈치를 보는 궁인들의 눈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황제가 주는 괄시와 모욕을 받고 있던 이의 작은 등이 보인다.
언제나 제 주인을 야차같이 느끼기만 했던 궁인 들은 새삼 저들의 주인이 저렇게 작고 마른 몸을 하고 있었나 싶어 모든 것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마마... 이제 그만 일어나셔요....”
가장 먼저 무거운 공기를 깨고 몸을 움직인건 연빈의 바로 곁에 함께 꿇어 있던 아진이었다.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연빈을 부축하는 아진의 얼굴은 다른 궁인들이 보기에 마치 진심으로 제 주인이 당한 모욕에 서러워 마음이 아픈 이처럼 보였다. 그 또한 생소하기는 매한가지다.
"마마, 괜찮으세요? 제게 기대세요, 마마.“
정안궁 궁인들은 그간 아진이 연빈에게 얼마나 많은 괴롭힘을 당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정안궁에서 어디 몸과 마음 편하게 지낸 궁인들이 있겠냐마는 아진만큼 연빈에게 모진 고초를 겪은 이는 없었다. 그들 중 연빈을 가장 두려워하고 몸서리치는 인물이 누구인지 묻는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아진을 꼽는게 마땅했다.
“몸이 너무 찹니다, 마마. 당장 태의를 불러야겠어요.”
“... 되었다. 그냥 조금 쉬면 될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안 그래도 몸이 다 나아지지도 않으셨는데... 숨이 차지는 않으십니까?”
그런 아진이. 틈만 나면 도깨비라도 나타나 제 주인을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그리 타들어가는 속을 털어놓고 했던 아진이. 지금은 마치 저의 주인이 안쓰럽고 애틋하여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온몸으로 연빈을 부축하며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하도 낯설고 어이가 없어 정안궁의 궁인들이 몸을 일으키는 것도 잊고 여전히 바닥에 끊은 채로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가만히 고개를 젓던 연빈이 이내 그들 모두를 돌아보았다. 놀란 궁인들이 흡, 하고 숨을 들이켜며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안 그래도 황제에게 박대를 당한 날이면 정안궁에서는 연빈의 괴롭힘에 아랫것들을 울음소리가 가실 줄을 몰랐건만, 오늘은 이렇게 천한 자신들의 앞에서 모욕을 당했으니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이럴 때는 그저 숨도 쉬지 말고 죽은 듯이 있는게 그나마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이다.
이내, 정안궁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너희까지 괜히 고생을 하였구나.”
엎드린 이들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다. 도대체 자신들이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건지 쉬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비록 그들의 주인이 그들을 전부 모아놓고 내가 앞으로는 너희를 괴롭히는 일은 없을 거라 약조를 하였으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언제나 그랬듯 연빈의 기행이고 변덕일 거라고 그리 생각을 하였는데. 지금 연빈은 평소 벌레나 다름없이 보던 자신들에게 마치 미안하기라도 한 듯 그리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모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나 이미 앞이 흐릿하여 그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연빈은 겨우 아진에게 기대어 선 채로 말을 잇는다.
“모두들 이만 물러가고... 아진은 오늘 다들 일찍 쉴 수 있도록 신경 써줘.”
“예, 마마.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어서 들어가세요. 바로 태의원에 일러 마음을 진정시키는 약을 올리도록 할게요.”
그 말을 들은 이들은 지금 하나같이 엄청난 충격을 받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아진은 그런 것 들은 신경 쓸 거리도 되지 못한다는 듯 오로지 연빈의 몸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 누가 보아도 진심을 다해 주인을 섬기고 있는 심복의 모습이다.
어느새 연빈이 떠난 정원에 남은 이들은 저마다 충격을 떨치지 못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본다. 달라지고 싶다고, 더 이상은 지난날처럼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황제에게 그리 말하던 주인의 절절한 목소리가 이명처럼 귓가를 한참이나 맴돈 날이었다.
이한은 늦은 밤까지 안정전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비빈들의 패를 모두 물린 황제는 황후궁에도 아니 가겠다 하여 만찬조차 안정전에서 해결한 참이었다.
그는 마치 정무를 보는 데에 몰두한 것처럼 끊임없이 상소며 서간들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나 그를 곁에서 오래 모신 오 태감은 평소와 달리 폐하께서 손에 든 것들에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안궁에 태의가 들었다고 합니다.”
고요한 안정전에 오 태감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황제는 보고 있던 서간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으나 다른 말도 없어 태감은 말을 잇는다.
“연빈께서 물에 빠지신 뒤로 안 그래도 몸이 많이 상하셨는데 심신이 계속 불안정하였던 데에다가 오늘 크게 놀라기까지 해 기가 많이 상하여 당분간 각별히 조심하고 요양하셔야 한다고 하였나이다.”
“누가 궁금해하기라도 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소인이 말이 많았습니다.”
오 태감은 이한의 타박에도 달리 크게 당황한 기색이 없이 그저 허리를 굽힌다. 이한은 잔뜩 불만스러운 얼굴로 들고 있던 서간을 탁, 소리 나게 탁자에 내려놓고 모르는 척 제 시선을 피하는 오 태감을 노려보았다.
누가 궁금하였다고, 누가 알고 싶기나 하였다고 저런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지. 하나도 듣고 싶지 않은 말을 저놈은 왜 멋대로 떠들어 나를 귀찮게 하는 건지.
황제의 눈빛은 명백히 그러한 불만을 가지고 있으나 태감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모르는 척을 하고 있다. 그렇게 잠시 오 태감을 노려보던 이한이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 봤자 또 아픈 척을 하는 것이지. 아니야?”
“제가 폐하께 어찌 감히 거짓을 아뢰겠나이까. 비록 연빈께서 이전에 그런 날이 있기는 하였으나 오늘은 정말로 상태가 안 좋다 하였습니다.”
말을 듣는 이한의 눈이 가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