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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폐하, 하고 이어진 연빈의 말에 이한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린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어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저를 이리 박대하시느냐 거짓된 눈물이라도 몇 방울 흘려줘야지. 이한이 그 게 다음에 이어질 화운의 말을 가늠해 보고 있는 사이 화운이 말했다.
“제가 아둔하여 방금 어떠한 이유로 폐하의 노여움을 산 것인지 미처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부디 부족한 저를 일깨워 주시면 다시는 같은일로 폐하의 심경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화운의 진심이었다. 연화운의 몸에서 깨어난 뒤 처음 황제를 마주했을 때나 얼마 전 수화원에서 황제를 마주쳤을 때 화운은 그분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나셨는지 쉬이 짐작할 수가 있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제가 방금도 무언가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게 한 것이 분명한데 오늘은 도무지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화운으로서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운은 감히 황제의 앞에서 입을 연 것이다.
이전의 일은 어찌할수 없다고 하더라도 화운은 여기서 더 황제의 눈 밖에 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과거를 되돌리고 싶은게 아니다. 지난날 연화운이 저지른 일들을 없던 것으로 만들어 황제와의 관계를 어떻게든 좋게 만들려고 하는 일도 아니었다. 화운은 다만, 제 스스로가 황제의 미움을 사는 그런 일은 더 만들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화운의 물음 앞에 이한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왜 화가 나고 불쾌해졌는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사실 이한이 가장 불쾌했던 건 아주 잠시였지만 꽃잎 아래 드리워진 그의 미소를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한 제 자신 때문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연화운에게. 사사건건 마음에 들지 않는 짓만을 일삼던 바로 그 연빈 연화운에게 순간이나마 그런 감정을 느낀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어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아무리 절세가인이기로서니 그가 하루 이틀 그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전에는 아무리 그 잘난 얼굴을 들이밀어도 하는 짓에 가려 곱고 어여쁘다 생각한 일조차 가물거리는데 도대체 오늘은 무엇이 달라 새삼스럽게 그의 얼굴에 감탄을 하였다.
이한은 그것이 가장 못마땅하여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이를 연빈에게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 었다. 황제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나는 네가 변한 것처럼 구는 게 싫다.”
한번 흔들렸던 감정을 억지로 감추려 하는 목소리는 꾸며야 했기에 더없이 차가웠다. 황제의 말은 숨 막히는 정적을 불러일으켰고 담담한 얼굴로 차가운 말들을 맞고 있는 연빈에게 이한이 말을 이었다.
“남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 괴팍한 성격을 숨기고 가식을 떨어대는게 같잖고 꼴 보기 싫다 이 말이다.”
연빈을 따라 함께 무릎을 꿇었던 궁인들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황제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음성에 담긴 뜻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봄날의 꽃향기로 가득 찼던 정안궁의 정원에 순식간에 한겨울 살을 에는 바람이 부는 것만 같았다.
거기에 서서 황제의 말을 들은 모두가 이번에야 말로 연빈이 참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울며불며 전처럼 황제에게 너무하다 매달릴 거라 생각했다. 이토록 엄청난 모욕은 연빈이 아니라 그 누구도 참지 못할 일이었다.
이윽고 연빈의 몸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몸을 일으켜 황제에게 매달리는 대신 세우고 있던 한쪽 무릎까지 마저 바닥에 꿇고 공손하게 바닥에 두 손을 대며 허리를 굽혀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지난날 제가 저질렀던 과오는 지탄받아 마땅하고, 그것으로 인해 폐하께오서 저를 저어하신다면 그 또한 당연한 일이니 어찌 감히 불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저는 마땅히 응당한 대가를 받을 것입니 다....”
사정을 안다면 누군가는 억울하지 않냐고 화운에게 물을 것이다. 네가 한 것도 아닌데. 과거 연화운의 행동과 지금의 너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그가 저질러놓은 일의 모든 평판이며 대가를 네가 떠맡는 것이 답답하고 분하지 않냐 그리 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화운은 그것 또한 저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대가 없이 주어지기 힘든 법이다.
본래라면 언감생심 황제 폐하의 시선을 받는 것조차 감히 바라지도 못한 채 허무하게 죽어버렸어야 했을 자신이다. 연화운의 몸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하운은 이미 생을 잃어 구천을 떠돌다 사라졌을 것이고 이렇게 황제와 대면하여 대화를 나누는 일은 절대로 벌어질 수 없었을 터.
비록 원한 것은 아니었으나 남의 생을 대신 이어 받았으니 어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 받을수가 있을까. 화운은 과거의 연화운이 저질렀던 모든 일들의 대가를 이미 제가 감당하기로 결심하였다.
“다만....”
화운의 말이 이어지기가 무섭게 정안궁에는 경악으로 말미암은 침묵이 퍼졌다. 네가 꼴 보기 싫다 말하는 황제의 앞에서 저리도 담담하게 대답을 하는 연화운의 모습을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음성뿐만이 아니다. 그리 차분하게 내어놓는 말의 내용은 또 어떠한가. 기꺼이 자신이 잘못한 일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는 연화운은 지금 정안궁에 발을 디디고 있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하고 이어진 화운의 말에 다시 한 번 모두 가 긴장한 얼굴을 했다. 머리를 조아린 채로 화운이 말을 이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변하고자 하는 것은 거짓이 아닙니다. 단순히 책임을 회피하고자 이리 꾸미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그저..”
화운은 말하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하기 위해 몇 번이나 스스로를 가다듬는다. 조금만 긴장을 놓으면 저도 모르게 꼴사납게 매달리는 모양새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와 황제에게 총애를 받겠다는 욕심은 없었다. 하루아침에 저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이 이전의 연화운과는 다르게 생활을 해나간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평생 , 황제가 제게 가진 경멸은 거두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폐하... 저는 달라지고 싶습니다.”
이것이 비록 연화운을 향한 황제의 감정을 조금도 변하게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은 다른 이들을 괴롭히고, 폐하께 무례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이 마음이 연화운의 것이 아니라 하운의 것임을 아무도 몰라주어도. 그래도.
“믿기 어려우실 걸 압니다. 믿어 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제부터라도 폐하께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화운은 진심으로, 황제의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황제가 싸늘하게 말하였을 때와는 다른 침묵이 또 한번 주위를 감쌌다. 무어라 단번에 설명할 수 없는 공기의 무게가 모든 이들의 숨을 틀어막고 있는 것 같았다.
연화운.
황궁에서 유일하게 황제의 미움을 받고 있는 후.
가진 성정이 괴팍하여 아랫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폭력적이고 윗사람들에게는 안하무인인 사내..
누구와도 가깝지 않고, 누구에게도 존경받지 못하며,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던 존재.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바로 그 사람이.
황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결코 황제의 뜻대로 변하지 않던 그 연화운이.
지금 이곳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황제에게 말하고 있었다. 더 이상은 그러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황제에게 그런 사람은 이제는 되고 싶지 않다고,
누구도 입을 열 수 없다. 움직일 수 없고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황제가 침묵하며 화운의 조아린 몸통을 그저 내려다보고 있으니 감히 그 누구도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영겁과도 같은 적막이 흐른 후, 황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너의 말을 믿지 않는다.”
차갑고 무감한 목소리이다. 그간 연빈이 해왔던 행동을 알고 있어 황제의 차가움을 이해하는 사람들 조차 순간 숨을 들이켜게 만들 만큼.
“그깟 번지르르한 말 몇 마디로 네가 그동안 해왔던 행동들을 그저 지난 일로 치워버릴 수 있을 것 같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변명하면 그게 전부 다 없던 일이 돼?”
“연화운이 달라지고 싶다니 주안성의 개가 웃을 일이지.”
바람이 불었다. 그리 강하지도 않은 봄바람에 조금전 화운이 향기를 맡고 있던 붉은 목련꽃 하나가 떨어져 엎드린 화운의 손앞에 내려앉았고 그 희연 손끝과 꽃잎을 바라보던 황제가 고개를 들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연빈이 정안궁 안팎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윤허한다.”
생각지도 못한 황제의 명에 놀란 화운이 그제야 고개를 살짝 들어 황제를 올려다보려니 똑바로 그 시선을 마주한 황제, 이한이 비웃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화운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디 마음껏 애써 보아라. 나는 속지 않을 것이니.”
그리 말을 마친 황제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돌아섰다. 이윽고 등 뒤에서 '성은이 망극 하옵니다, 폐하.' 하는 화운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뻔히 비아냥거린 말을 두고 고분고분 성은을 찾는 행태도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매한가지인지라 황제는 가마에 오를 때까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