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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이제 아주 숨을 들썩이며 의자의 팔걸이를 쥔 손에 힘을 준다. 덩달아 마음이 불안해진 태감이 애써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 설마하니 연빈마마께서 정말 폐하를 거스르려 이러시겠습니까.”
“아니야. 분명해. 내가 그 속을 뻔히 알지.”
이한은 마치 그 앞에 연빈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을 불같은 눈길로 노려보다가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래. 어디 그 잘난 수작에 내가 한번 넘어가 주마.”
성큼성큼 걷는 걸음은 얼마나 빠르던지 오 태감 은 황제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하여야 했을 정도이다.
“저, 정안궁으로 납실 것이다! 어서 가마를 대령 하라!”
오 태감의 목소리가 청건전 앞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황제는 가마를 기다리는 것도 답답하다는듯 벌써 저만큼 걸어가고 있었다.
보통의 수로는 내가 저를 찾아 줄 것 같지 않으니 이제 아주 별수를 다 쓰나 본데. 이한은 속으로 연빈의 행태를 비웃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는 오늘이야말로 기필코 연빈이 가소롭게도 뒤집어쓴 가면을 벗기고야 말 작정이었다.
“꽃이 아주 아름답게 피었네.”
화운의 얼굴에 모처럼 환한 미소가 어렸다. 정안궁 안의 정원을 가득 채운 화사한 꽃들 덕분이다. 수화원에서의 사달이 난 이후로 밖으로 나서기가 껄끄러워진 화운은 산책 겸 정안궁 내에 있는 정원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지금이야 연빈의 처소가 되는 바람에 황제의 걸음이 뚝 끊기기는 하였으나 본래 정안궁은 오래전 선대의 황제가 당시 더없이 총애하였던 남후궁을 위해 특별히 새로 지은 궁이었다. 크기가 웅장함은 말 할 것도 없거니와 곳곳이 빼어나게 아름다워, 당시 그 후궁을 향한 황제의 총애가 얼마나 컸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 엄청난 총애를 받던 남후궁은 몸이 허약하여 황제보다 일찍 병사하였는데 이후에도 황제는 죽는 날까지 그를 잊지 못해 이후 어떤 후궁에게도 이 궁을 하사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죽을 때에도 이곳에 특별한 의미를 두어 오로지 사내인 후궁에게만 궁을 하사할 것을 유지로 남겼을 정도였다.
지금도 다른 비빈들이 유일하게 연빈에게서 탐을 내는 건 오로지 이 궁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정안궁의 빼어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계절은 바야흐로 봄이 깊어지고 있는 때였다. 정안궁의 정원엔 온갖 꽃과 나무들이 저마다 그 자태를 뽐내며 피어나고 있었으니 과연 황제가 저의 정인이라 부르기를 서슴지 않았던 이에게 바친 마음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너희가 관리를 아주 잘해 주었구나.”
화운이 제 곁에 선 궁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린 궁녀들은 감히 고개를 들어 주인을 바라볼 수는 없었으나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이전에 단 한번도 겪어 본 적이 없는 단아함에 이를 두려워해야 하는지 아닌지 마음이 불안하였다.
“이것은... 무슨 꽃이지?”
눈을 가지고 있으니 곱고 추한 것이야 가늠은 할 수 있으나 그 꽃이 무엇인지는 전부 알 길이 없는 화운이 어느 꽃나무 아래에 서서 묻자 아진의 눈치를 받은 궁녀 하나가 재빨리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그, 그것은 자목련입니다, 마마....”
“아... 목련의 색이 이리 붉어 자목련이구나....”
백목련이야 화운도 봄날에 지나다니며 자주 마주쳐 아는 꽃이었으나 이리 붉은 목련도 있다는 것을 화운은 처음 알았다. 누가 물을 들인 것도 아닐 터인데 어찌 이리 고운 붉은 색을 타고났는지. 그것이 하도 신기해 한참이나 자목련 꽃잎을 바라보고 있던 화운이 이내 아래까지 내려온 가지에 핀 목련의 향을 맡기 위해 고개를 살짝 들어 꽃잎 위에 코끝을 댄다.
그 순간. 저들의 주인이 이토록 스스럼없이 자신들의 곁에서 편하게 묻고 듣는 일이 너무나 놀라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화운을 바라보고 있던 궁녀들의 입에서 헉, 하고 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흐드러지게 핀 자줏빛 목련 아래에 서서 사뿐하게 눈을 감고는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채 꽃잎의 향을 맡는 이의 얼굴은 무어라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무엇이 꽃이고 무엇이 사람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고 하여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이가 눈앞에 있는 데, 그가 그동안 저들을 그토록 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였던 주인이라니. 이런 순간에는 저들이 느끼는 이 낯설고도 황홀한 감정을 무엇이라 표현해야 좋을지 그들 모두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그저 숨을 참고 제 주인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바로 그때.
“이제 보니 너는 이 일을 아주 즐기고 있던 것이군.”
날카로운 목소리 하나가 평온하던 사위를 가르며 들려왔다. 깜짝 놀란 화운이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들리자 그곳에.
"황제 폐하 납시오!”
뒤늦은 오 태감의 고함과 함께 그, 황제 이한이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이한은 다급하게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리는 연빈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소매 아래로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숙인 고개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순간 바람에 살짝 흩날렸는데 움직임에 따라 언뜻 비치는 붉은 기운 때문인지 꽃 아래 있는 그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살며시 내리깐 눈매와 긴장을 하였는지 파르르 떨리는 길고 풍성한 그의 속눈썹 따위를 바라보며, 황제는 조금 전 제가 보았던 연빈의 모습에 대해 생각한다.
부러 불시에 찾아왔다. 황제가 오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리면 분명 대비를 하여 또 연기를 하려 들게 뻔하니 언질을 주지 않고 들이닥쳐 연빈이 무슨 꼴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정안궁 입구에서부터 지나치는 모든 입을 막고 연빈이 지금 구경을 하고 있다는 정원까지 그야말로 조용하고 신속하게 들이닥쳤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이한은 목련나무 아래에 있는 연화운을 보았다.
이전에는 본 적이 없는 더없이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치장을 거의 하지 않아 자연스럽게 늘어트린 긴 머리카락을 봄바람에 흐트러트린 그는 아름답게 핀 꽃을 바라보며 그보다 더 해사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이한은 마치 벼락을 맞기라도 한 것처럼 어떠한 거대한 충격이 저를 치고 가는 것을 느꼈다. 발걸음을 비롯한 모든 움직임이 절로 멈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저런 얼굴을, 연화운이 짓는 저런 표정을 이한은 그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것은 분명히 충격이었다.
갑자기 온몸의 모든 감각이 끝도 없이 예민해진 것만 같았다.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온갖 꽃들의 향기가 버거울 정도로 폐부를 가득 채웠고 목련 아래에 선 연빈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너무 밝아 눈이 부셨다. 이한은 그때 연화운이 부드럽게 웃으며 입술 새로 뱉은 숨소리마저 들은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는데, 말로만 듣던 황홀경이 바로 이러한 것인가 싶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화운이 목련에 코끝을 살며시 가져다 대며 눈을 감았을 때는, 감히 연화운이 지을 수 있으리라 상상도 하지 못하였던 그런 고아한 표정을 얼굴 가득 머금고 꽃처럼 이한의 앞에 선 그때에는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는 황제, 성이한이라도 마음 깊이 치솟는 어떠한 두려움을 감출 수가 없어서.
그래서 이한은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두 주먹을 꽉 쥐고 부러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것으로 제가 순간 느낀 인정할 수 없는 감정이 전부 사라지길 바라며 말이다.
“정안궁 생활을 네가 이렇게 즐기고 있을 줄은 몰랐지 뭐야.”
"폐하... 날이 좋기에 잠시 나와 있었습니다.”
갑자기 행차한 황제를 보고 잠시 놀란 것처럼 보였던 연빈은 금세 다시 차분한 모양이 되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안궁 근처에 황제의 그림자만 비쳐도 폐하께서 오셨다며 유난을 떨어대던 연화운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것에 이상하게 불쾌한 마음이 들어 이한이 연빈의 정수리를 노려보고 있으려니 그 뒤로 슬쩍 다가온 오 태감이 넌지시 황제를 향해 말했다.
“폐하. 연빈께서 아직 꿇어계시옵니다.”
“나도 알고 있다.”
오 태감 딴에는 아무리 그래도 어린 궁녀들이 다 보는 곳에서 황제가 후궁을 계속 꿇려두는 것이 좋아 보이는 일은 아니기에 은근히 이른 것인데 황제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요지부동이다.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오 태감은 그저 허리를 굽히며 물러날 뿐이었다.
황제가 말했다.
“내가 너를 꿇려두는 것이 불만스러우냐.”
본래 연빈은 몸이 약하기도 하지만 엄살 또한 심한 편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벌써 황제에게 무릎이 아프다며 우는 소리를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황제는 고요하게 제 앞에서 계속 무릎을 꿇고 있는 그의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연빈이 대답했다.
"후궁이 되어 폐하의 앞에 꿇어 인사를 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어찌 감히 불만을 가지겠사옵니까.”
아양 하나 없이 단정하고 정돈된 목소리며 말투 도 마찬가지다. 변하지 않은 것을 아는데. 그럴 리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 황제는 여전히 저를 기만하고 속이려 드는 연빈이 우스웠고 그런 연빈의 수에 걸려 잠시였지만 흔들렸던 자신이 한심했다.
조금 전 보았던 연빈의 미소가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아 입술을 한 번 깨문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허면, 내 성에 찰 때까지 계속 이리 꿇어 있으라 하여도 괜찮다는 뜻이냐?”
"폐하께서 명을 내리신다면 그저 따를 것입니다. 다만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