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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3)화 (13/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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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는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하여야 하고 주인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황제 역시 제가 원하는 치세를 위해 때때로 누군가의 억울함을 모르는 척한 일이 없다고 할 수 없으며 누구에게 물어도 그것은 온당한 일이었다고, 대국을 위해 희생을 감수한 이들은 오히려 영광스러웠을 거라고 그리 답을 할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그들에게도 삶이 있음을 안다. 그들에게도 지키고자 하는 생이 있고, 바라는 미래가 있으며, 피와 살과 기쁨과 고통을 느끼는 모든 감각들이 있는 것을 알았다.

백성들은 지엄하신 황제 폐하를 감히 바라볼 수도 없을 만큼 낮은 곳에 있으나 황제의 자리는 아무리 높아도 그들 백성을 위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내야 하는 자리였다. 황제는 무정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조차 그들의 고통을 당연하다 여겨서는 안 된다고, 이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지금 여기에, 이한이 화운의 마음 하나를 다스려 주려 애를 쓰고 있는 이유였다. 이한은 제가 정안궁에 올 때마다 겁에 질린 채로 떨어대는 궁인들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자 뾰로통해진 화운의 뺨을 부드럽게 손으로 감싸며 황제가 말했다.

‘그러니 너도 부디 덕으로, 나의 백성들에게 자애롭게 굴어 주면 아니 되겠느냐.’

화운은 그 말에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을 했지만 이내 이한의 손바닥에 뺨을 가볍게 기대며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알겠습니다. 그리하면 되잖아요. 그러니 그런 말씀은 그만하시고 이제 저에게만 신경 써 주셔요.’

웬일로 순순히 대답을 하는 화운의 모습에 이한은 한결 마음이 편안해져 품으로 안겨드는 화운을 가만히 안아 주었다. 비록 이미 벌어진 연빈의 패악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지금부터라도, 아주 조금씩이라도 이리 변하여 준다면 되는 일이겠지. 이한은 그리 생각하며 파고드는 화운의 체온을 물리지 않았다.

그로부터 약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이한은 그날 제가 시선을 주었다고 화운이 우겨댔던 어린 궁녀가 주인에게 불경하였단 이유로 매질을 당하고 신형사로 쫓겨났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화운에 대한 이한의 믿음이 깨지게 된 최초의 일도 아니었고, 결코 마지막의 일도 아니었다.


“연빈이 지난날 수화원에서 또 폐하를 노하게 만들었다면서요.”

술 한 잔과 함께 따라지는 숙비의 말에 이한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허나 그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숙비는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을 잇는다.

“사람이 죽을 고비를 넘기면 철이 든다던데… 그것도 연빈에게는 남의 일인가 봅니다.”

숙비의 말에는 사실 틀린 것이 없었다. 그깟 죽을 고비에 달라지기엔 연빈의 성정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평소였다면 이한 역시 숙비의 말에 크게 동의하였을 것이다.

허나 이한은 안 그래도 최근에 계속 연빈을 생각하느라 골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모르는 이였다면 당장 손을 뻗어 품에 안아 주고 싶었을 만큼 처연하던 창백한 얼굴을 떠올리는 일도 이제는 그만하고 싶었다. 이한은 숙비가 채운 술잔을 단박에 입에 털어 넣고는 말했다.

“연빈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자.”

그 말에 숙비가 살포시 웃으며 다시 잔을 채웠다.

“예, 폐하. 제가 눈치도 없이 폐하의 앞에서 그 이름을 꺼냈사옵니다. 괜히 폐하의 기분만 상하게 말이지요.”

그 또한 틀린 말이 아니다. 이한은 언제 어디에서든 연빈을 떠올리면 즉각적으로 기분이 나빠지는 사람이었으니 숙비의 말은 과연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말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폐하….”

이내 숙비가 황제의 손에 자신의 손을 살며시 겹치며 황제를 불렀다. 그때 황제는 아주 잠시, 숙비의 그 손길을 쳐내고 안정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그 껄끄러움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한은 고개를 돌려 저를 기다리고 있는 숙비, 현비영의 얼굴을 본다.

황후가 그 성품 그대로 단정하고 현숙한 여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 숙비는 총애 받는 후궁의 본보기로 보여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화려하고 가는 선을 가지고 있는 미인이었다. 그는 뛰어나게 총명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눈치가 빨랐고, 황후의 앞에서는 본분을 지킬 줄 알아 좀처럼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더불어 말이 통하지 않는 연빈의 기세 앞에서도 기죽는 법이 없이 통쾌한 말을 해 주는 것 또한 알게 모르게 이한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어 속이 후련하게 만들기도 했고 말이다. 이한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조금 전 숙비의 손길에서 느꼈던 껄끄러움을 지우려 애를 썼다.

지금쯤이면 정안궁에 소식이 전해졌겠지. 분통이 터져 악을 쓰는 연빈의 모습을 이미 보기라도 한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리다가 이한은 술잔을 다시 입을 가져갔다.

황제는 정말이지 연화운에 대한 생각을 그만하고 싶었다.


“그런데… 황후마마께 문후는 드리지 않아도 돼?”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나 단장을 끝낸 화운은 아직은 낯선 면경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고개를 돌려 아진에게 물었다. 화운의 머리에 꽂고 싶었으나 그가 너무 화려하다 하며 물린 비녀에 미련이 남아 연신 손안에서 만지작거리던 아진이 화운의 물음에 바로 대답했다.

“보통 때라면 당연히 드리셔야지요. 하지만 지난번 큰일을 당하신 일로 황후께서 당분간은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셨어요.”

“음… 그래도 너무 오랫동안 거르는 건 좋지 않은 일인 것 같구나. 내일부터는 다시 문후를 드리도록 할 테니 준비해줘.”

“…예, 마마.”

아진은 절로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속으로 삼키고 대답했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당장 내일부터 또 큰 산을 하나 넘어야하게 생겼다. 그러자 아진의 안색을 아주 주의 깊게 살피던 화운이 말을 잇는다.

“내가 황후마마께도 그리 불경하였느냐?”

아진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아니라고 하기엔 그간 연빈이 황후마마의 앞에서 보인 행태가 차마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지경이고, 그렇다고 하기엔 또 주인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이번에 한숨을 쉰 건 화운이었다.

“폐하의 앞에서도 그 지경이었으니 황후마마의 앞이라고 달랐겠어….”

“…….”

“다른 비빈들과의 관계도… 보나마나 엉망이겠지.”

화운은 다시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아 고개를 가로젓는다. 어떻게 이 넓은 황궁에서 단 한 사람도 가까운 이가 없는 건지. 그것도 참으로 능력이라면 능력이지 싶다.

정안궁의 궁인들은 그래도 수월했다. 그들이야 연빈의 말을 믿든 믿지 않든 어차피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화운은 그저 오래 시간을 들여 그들에게 달라진 저의 모습을 꾸준히 보여 주면 차츰차츰 나아질 거라 여겼다.

허나 황후나 비빈들은 달랐다. 그들은 정안궁에서 항상 생활하는 이들처럼 오래 붙어 있으며 달라진 모습을 보여 줄 수도 없고 제멋대로 모아놓고 내가 이제는 달라졌으니 나를 다시 보아 달라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이전 연화운의 행동으로 인해 황제처럼 그들 또한 화운을 곱게 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이 매듭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잠시 그리 막막한 생각에 잠겨 있던 화운은 저 때문에 덩달아 표정이 어두워지는 아진의 얼굴을 보자 다소간 기분이 나아지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후… 자업자득이지 누굴 탓하겠어. 내가 벌인 일이니 그저 묵묵히 마주하는 수밖에.”

물론 이전의 일은 지금의 화운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으나, 화운은 비록 내 뜻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남의 몸을 대신 차지하였으니 그 업을 대신 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지금부터라도 법도를 지키고 분수에 맞게 공경으로 윗사람을 섬기고 자비로 아랫사람을 대하다 보면 언젠가 저를 보는 눈도 달라지는 날이 오겠거니. 화운은 아주 조금씩이지만 제 앞에서 태도가 달라지는 아진을 바라보며 그리 마음을 다잡았다.

아주 잠시. 그러하면 황제께서도 나를 그리 다시 보아 주시는 날이 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과한 욕심은 언제나 후환을 부르는 법.

화운은 너무 많은 것을 욕심내지 않기로 하였다.


“뭘 잘했다고 와서 빌지 않는 거지?”

급기야 황제는 들고 있던 서간을 툭 던져버리곤 목소리를 높였다. 곁에 시립해 있던 오 태감의 허리가 당장에 굽었다.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허나 황제, 이한의 목소리는 조금도 낮아지지 않았다.

“이것은 숫제 저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폐하… 혹시 연빈마마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마마께오선 현재 정안궁에서 자중을….”

“자중은 언제부터 그리 자중을 잘하였다고!”

이한이 이미 한 번 던진 서간을 다시 집어선 이번엔 반대쪽으로 또 휙 던지며 말했다.

정말 작정하지 않고는 이럴 수가 없었다. 패도 빼버리고, 후원에서는 다만 우연히 마주쳤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에게 모욕을 주었으며, 지난밤에는 숙비의 처소를 찾은 일을 굳이 일러 주기까지 했다. 황제로서는 그를 도발할 수 있는 모든 수를 전부 다 쓴 셈이다.

헌데도 연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정전이든 어선방이든 찾아와 빌기는커녕 수화원에서 돌아간 이후로는 정말 정안궁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어디 그뿐인가. 정안궁에 소식을 전하러 찾아간 경사방 내관은 무려 고생하였다는 말을 듣고 멀쩡하게 나왔단다. 그 소식을 들은 황제가 얼마나 기가 막혔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야 내가 그 속을 알겠어. 보아하니 진심으로 반성하여 자중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나를 외려 불안하게 하고 신경 쓰이게 할 작정인 게 분명한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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