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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2)화 (1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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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어린 내관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갔다. 그 스스로도 제가 들은 말이 믿기지가 않는 것이다. 위 총관의 명령을 받아 정안궁으로 갈 적에 그는 못해도 연빈이 던진 찻잔에 어딜 얻어맞아도 얻어맞겠지 하는 각오를 했었다. 그래도 황제 폐하의 명으로 전하러 왔다 하면 매질까지 당하기야 하겠나, 고작해야 그런 기대만을 품었을 뿐이다.

헌데 폐하께서 숙비마마의 궁으로 납시었고 그 사실을 정안궁으로 가 이르라 하셨다는 말을 듣고서도 연빈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찻잔을 던지지도 않고, 네까짓 게 감히 나를 모욕하느냐 발길질을 하지도 않았다.

내관은 이것이 혹시 나중에 제게 더 큰 곤욕을 치르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닌가 너무 겁이 났다.

“연빈께서 물에 빠지신 뒤로 사람이 변했다고 하더니….”

제가 직접 정안궁으로 가 그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덩달아 다리가 풀려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위 총관이 저도 모르게 그 말을 중얼거렸다.

연빈이 달라졌다.

요즘 들어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말이었다. 그가 정안궁의 모든 궁인들을 불러다놓고 했다는 말은 벌써 이곳 황궁인 주안성에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연빈을 조롱하는 소문에 불과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하나같이 그것 또한 어떻게든 황제의 시선을 받아 보려는 연빈의 발악이 분명하다 여겼고 그조차도 얼마 가지 않을 거라 장담을 하였는데, 위 총관의 생각 역시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설마….”

혼란에 가득 찬 눈동자를 잘게 떨며 위 총관이 여전히 중얼거린다.

에이 설마. 말도 안 되지. 그간 폐하께서 그리 고치려 애를 써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던 이가 아무리 죽을 고비를 넘겼기로서니 하루아침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소리지.

위 총관은 여전히 그리 생각을 하려 했으나 그간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보아왔던 연빈은 어떤 계획을 위해 몸을 숙이고 때를 기다리는 그런 영민한 이가 절대로 아니었다. 허면 지금 연빈이 보이는 모습은 도대체 무엇인가. 도대체 이 모든 믿기 힘든 일들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가.

밤이 깊어지듯 위 충관의 한숨이 깊어졌다. 이 황궁에서 살아남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폐하께서도 참… 굳이 그런 걸 전해 주실 건 뭐래요….”

꽃잎 풀어놓은 물에 주인의 손을 담아 가만가만 주물러 주던 아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속이 상해 꿍얼거렸다. 경사방에서 내관이 다녀간 이후로 아진은 쭈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패를 빼버려 기다릴 일도 없는 후궁에게 굳이 황제께서 어느 처소로 납신다는 소식까지 전해 주는 건 정말 너무한 처사가 아니냐 이 말이다. 연빈의 명으로 아진은 더 이상 폐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경사방으로 가 알아내는 일도 하지 않게 되었는데 예까지 사람을 보내, 심지어 다른 곳도 아닌 숙비의 운화궁으로 간다는 소식을 전할 건 뭐란 말인가.

안 그래도 최근에 마마께서 몸이 더 안 좋아지신 것 같아 신경이 곤두서 있던 아진은 차마 지엄하신 황제 폐하를 향해 더 말은 못하고 입술만 연신 씰룩이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아진은 저의 말에도 주인이 별다른 대답이 없이 고요하다는 걸 깨닫고 문득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연빈을 바라보자 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주인의 얼굴이 보였다. 아진은 황급히 들고 있던 세수그릇을 바닥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마마. 소인이 입을 가볍게 놀렸어요.”

안 그래도 속이 쓰릴 게 분명한 주인의 앞에서 굳이 말을 더해 기분을 더 상하게 만든 것은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일이다. 아진은 그간 제 주인이 저를 관대하게 대해 주었다고 고새 이렇게 긴장이 풀린 자신을 탓하며 입술을 깨문다.

연빈의 젖은 손이 이내 아진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아 일으켰다.

“너는 왜 툭하면 무릎을 꿇고 그러니. 내가 마음이 상하여 너를 본 것이 아니다.”

“마마….”

“나는 그저… 늘 내 앞에서 긴장해 겁먹은 모습만 보이던 네가 나를 위해 이리 속상해해 주니 그것이 좋아 본 것이야.”

이어지는 연빈의 말에 아진이 토끼같이 동그란 눈을 깜빡거렸다. 문득 제가 제 주인이 당한 일에 정말로 속이 상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두려운 것이 아니고. 황제가 연빈을 구박한 일로 연빈이 제게 화풀이를 할까 두려워 마음이 쓰인 것이 아니고. 제가 정말 마마께서 당한 일이 속이 상하고 섭섭해 마음을 썼단 말인가. 스스로 생각해도 믿기지가 않는 일이었다.

아진이 그리 혼란스러워하거나 말거나. 화운은 마음이 조금 들뜬 상태였다.

연화운의 몸에서 깨어난 뒤로 그가 마주친 모든 이들은 다만 연빈을 두려워하거나, 귀찮아하거나, 무시하거나, 겁을 먹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 아진이 황제가 제게 야속하게 행한 일을 두고 보인 반응은 아무리 보아도 단지 두려워서 한 말은 아닌 것 같아, 제가 모욕을 당했다는 것도 잊고 화운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외로웠던가. 화운은 그런 생각을 한다. 모두가 저를 두고 피하기 급급했던, 연화운으로 보낸 짧은 시간이 자신을 고독하게 만들었나.

화운은 그것을 두고 제가 참으로 나약해진 게 분명하다 느꼈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드넓은 이 황궁에서 저에게 부정적인 감정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틈에 파묻혀 지내야 하는 건, 그것도 다른 사람의 몸에서 그 모든 것을 견뎌야 하는 건 제아무리 속이 무던한 화운이라고 하여도 다소 지치는 일이었다.

여전히 아진의 팔을 부드럽게 쥔 채로 화운이 말을 이었다.

“나는 괜찮아. 내가 벌인 일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이니 어찌 이를 두고 속상한다 말할 수가 있겠어.”

“마마….”

“그래도….”

말을 조금 늘이며, 화운이 아진을 바라본 채로 웃었다. 아진이 연빈을 도련님으로 부르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맑은 미소였다.

그 청초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에 아진은 저도 모르게 넋을 놓았고 화운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아진 네가 이리 속상해해 주어서 나는… 염치도 없이 참으로 기분이 좋구나.”

속지 말아야지. 내일 당장이라도 기억이 모조리 돌아오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분이니 괜히 헛꿈을 꾸어 그를 믿는 일 같은 건 절대로 하지 말아야지.

밤마다 그리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던 아진의 마음이 그 얼굴에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것도 모르고, 화운은 그저 웃었다.


‘폐하께오선 저보다 그깟 계집이 더 중요하신 겁니까?’

연빈이 당장이라도 튀어나가 그 계집의 머리채를 잡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황제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정안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고선 한숨 한 번으로 감정을 다스렸다.

화운이 억지를 부리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나 난데없이 황제가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궁녀 하나에게 시선을 주었다고 길길이 날뛰는 건 이한이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한은 화운이 말한 것처럼 어느 궁녀를 눈여겨본 일도 없거니와 설령 보았다고 하여도 그게 무엇이 문제인가.

황궁의 모든 여인은 전부 황제의 여인이고, 황제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들이기도 하였다.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서 마음에 든다 하시면 후궁이 아니라 황후라고 해도 감히 토를 달 수 없을진대 화운은 지금 이한이 다른 궁녀에게 한눈을 팔아 자신을 무시하였다고 이리 성깔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화운아.’

하지만 이한은 화운에게 후궁의 행동거지를 들먹이며 화를 내는 대신 차분하고 다정한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화운이 제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제 궁의 아이들에게 화풀이하는 건 어제오늘이 아니라 이미 온 황궁에 파다하게 말이 퍼진 일이었고 이한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여기서 황제의 입장으로 화운을 꾸짖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 크게 호통을 칠 수도 있었으나 이한은 그것이 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이한은 황제이고 그가 신경 써야 할 일들은 언제나 산더미처럼 많았다. 매일같이 정안궁에서 벌어지는 일에만 신경을 곤두세울 수도 없고 매일 화운이 누구를 매질하고 괴롭혔는지 알아내 참견할 수도 없다.

그는 여기서 그저 화운을 혼내고 돌아서면 그만이지만, 화운이 진정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황제가 정안궁에 머물지 않는 다른 날들 동안 여기에 있는 이들은 어쩌면 이전보다 더 고생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화운이 아무리 그들에게 모질게 군다고 한들 화운과 궁인들 사이에는 엄연한 주인과 노비의 신분차가 존재했다. 황제라고 하여도 그것을 탓하며 화운을 억압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이한은 그리 다정하게 화운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어쨌든 충신 집안에서 자란 이가 아닌가. 황제는 그가 지금이라도 저를 따라 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한이 이름을 부르자 단박에 표정이 풀어진 화운이 다소 진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너무 오랜만에 저의 이름을 이리 불러 주십니다.’

‘네가 좋다면 자주 불러 주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화운아. 정안궁에서 너를 모시는 이들은 사사롭게는 너의 수족이겠으나 크게 보면 그들 또한 내가 이끌고 다스려야 할 나의 백성들이다.’

황제는 차근차근 화운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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