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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10)화 (10/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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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것은 아진으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일 이었다. 물론 아진 역시 이 일이 정말로 우연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어쨌든 화운이 연못을 구경하고 있다가 폐하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런데, 예전이라면 폐하의 옷자락이라도 붙들고 늘어졌을 주인이 이리 순순히 제 발로 물러나니 영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안 그래도 패를 빼는 바람에 폐하 뵙는 일이 더더욱 어려워졌는데 제 입으로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정안궁에서 나오지 않겠다 약조까지 하시다니.

아진은 정말로 제 주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안 괜찮을 것이 무엇이냐. 괜히 성심을 어지럽힌 것이 죄송스러울 따름이지....”

그사이 가팔라진 호흡과 요동치는 심장을 간신히 갈무리한 화운은 담담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 조롱과도 같은 말을 들었는데도 아진의 주인은 전혀 개의치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여 이것을 두고 위로를 하여야 할지 모른 척을 해야 할지 아진이 망설이는 사이, 천천히 저만치 세워둔 가마를 향해 걸음을 옮기던 화운이 말했다.

“아진.”

“예, 마마.”

“네 주인이 정녕 대단하지 않으냐.”

“......?”

“성군이신 폐하께 홀로 이토록 미움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

화운은 지금의 황제가 그의 비빈들에게도 얼마나 좋은 분인지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황후를 존중하고 각 비빈들을 대하는 데 차별없이 온화한 분이었다. 오죽하면 지금 내명부를 이루고 있는 비빈들은 역사에 다시없을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말이 아랫것들 사이에서도 나왔을까.

그런데 오직 연빈만이 유일하게 제 아비를 등에 업고도 황제에게 이리도 외면을 받고 있으니.

화운은 그동안 도대체 자신이 황제의 앞에서 어떻게 행동했기에 이렇게까지 사이가 벌어질 수 있을까를 가늠하다가 이내 생각을 접는다. 어차피 이제는 되돌릴 수도 없고, 화운에게는 되돌릴 능력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 담담하게 말하는 화운의 음성을 곁에서 들은 아진은 어쩐지 그 태연한 얼굴 밑에 숨긴 상처 받은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아 입술을 깨문다.

제 주인이 폐하께 무시당하고 구박을 당한 일은 벌써 한두 해가 아닌데 오늘 일은 어찌 이리 아진의 마음에도 자꾸만 껄끄러운지 모를 일이다. 폐하께서 제 마마를 박대하면 그 화풀이를 온전히 제가 당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불안하였던 이전과는 달랐다.

“돌아가자.”

이내 화운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걸으며 말했다. 하여도 아진은 여전히 제 주인을 다 믿지 못하는 관계로, 더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나를 두고 돌아가...?”

“페하?”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지 말이 없던 황제 이한이 갑자기 툭 내뱉은 말에 조용히 찻잔에 차를 따르던 황후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이한은 그제야 제가 또 허튼 생각을 했다는 것을 깨닫곤 흠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한 번 젓고는 황후가 따라 놓은 차를 한 잔 마신다.

"폐하, 아까부터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혹시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셨는지요.”

아닌 게 아니라 황후궁에 점심을 먹으러 들어섰을 때부터 황제의 표정이 좋지 않아 식사를 하는 내내 평소보다 더 신경을 썼던 황후였다. 황제는 황후의 물음에도 다른 말이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일은 무슨... 아무 일도 없으니 걱정할 것 없소.”

하지만 그런 대답과는 달리 황제는 말을 마친 후 다시 생각에 잠겼다. 저를 두고 앞으로는 자중하며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 제 입으로 고하고 물러간 연빈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 탓이다.

그간 물러가라 그리 말을 해도 곧이듣지 않고 매달려 귀찮게 하더니 이리 먼저 저에게서 물러나 눈에 띄지 않겠다는 약조까지 내어놓는 연빈의 속을 알 수가 없어 황제는 자꾸만 입안이 껄끄러웠다.

물론 단지 그것뿐이라면 어쭙잖은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 쉬이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황제의 마음에 껄끄럽게 남는 건 연빈의 얼굴이고 그가 풍기는 분위기였다.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오늘 후원에서 마주친 연빈은 뭐랄 까.

그래. 꼭 다른 사람을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얼굴이 달라졌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 이한이 이전에 알던 연빈의 얼굴 그대로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오늘 마주한 연빈을 돌이켜 보자니 마치 그가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고요한 호수처럼 빛나던 눈동자, 저를 보고도 차분하기 그지없던 표정, 단정하고 깨끗하게 떨어지던 목소리까지. 무엇 하나 이한이 이전에 알던 연빈과 같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숨을 한 번 고르자 제 앞에 무릎을 꿇어 몸을 옹송그리고 있던 연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언제나 깡마른 몸을 하고 있었지만 하는 짓 때문인지 그다지 연약해 보인다든가 가련해 보인다는 인상은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본 연빈의 모습에서는 이전에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가냘픈 느낌마저 드는지라 황당함을 넘어선 미묘한 불편함이 자꾸만 이한의 마음 어딘가를 모래알처럼 돌아다니고 있다.

그때. 여전히 저와의 시간에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는 황제의 얼굴을 알아본 황후가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폐하. 시간도 되었으니 잠시 이곳에서 오수에 드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그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황제는 제가 또다시 그놈의 연빈 생각에 잠겨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래 봤자 연빈이 평소처럼 수화원에서 어떻게든 황제를 마주쳐 제 처소로 끌어들이려 했던 게 분명한 일을 두고 왜 자신이 이렇게 두 번 세 번 그 모습을 곱씹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한은 잠시 고개를 돌려 봄바람이 불어오는 창문 밖 어딘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대로 계속 아까 마주친 연빈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는 건 분명 그 고약한 것의 놀음에 걸려드는 일이렷다.

어디 내가 그 얄팍한 수작에 넘어갈 줄 알고,

황제는 속으로 흥, 하고 보이지도 않는 연빈을 한 번 비웃고는 몸을 일으킨다.

그러지, 하고 대답한 황제의 목소리에 황후가 부드럽게 웃었다. 연빈의 그 가증스러운 처연한 표정 보다 훨씬 보기 좋은 얼굴이라고, 이한은 생각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으응?”

“지금 안색이 창백하셔요....”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의자에 가만히 기대어 숨만 겨우 고르고 있던 화운은 아진이 제게 괜찮으냐 묻고 나서야 자신이 지금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을 잠시 들어 바라보고 있으려니 가느다란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화운은 그 모양새가 신기해 저의 떨리는 손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지난날 하운은 몸이 제법 건강한 편이었다. 어릴 적부터 굶기를 밥 먹듯이 한 것치곤 자라서는 좀처럼 병치레하는 일이 없었고 키도 남들에게 아주 뒤지지 않을 만큼은 되었다. 훗날 스승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체구가 크진 않아도 좋은 자질을 가지고 태어나 무술을 익히기엔 더없이 좋다 한 일도 있었다.

과연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는지 하운은 무술을 배운 후로는 감기조차도 쉬이 걸리지 않고 살아와 다 자라서는 몸이 좋지 않다는 감각을 크게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뜀박질을 한 것도 아닌데 자꾸만 차오르는 숨을 가만가만 고르며 화운은 아진에게 물었다.

“아진, 내가 원래... 몸이 약한 편이었나?”

“예, 마마. 마마께오선 원체 약하게 태어나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도 잦으셨고 폐도 좋지 않아 평소에도 약을 잘 챙겨 드셔야 해요.”

“아....”

그제야 화운은 시도 때도 없이 태의원에서 지어 오는 약을 넘겨야 했던 지난 며칠을 떠올렸다. 화운은 그것이 물에 빠졌다 나온 탓인 줄로만 알았는데 본래 챙겨먹던 약도 있었던 모양이다.

화운은 소맷자락을 슬쩍 걷어 한 줌조차도 채우지 못할 저의 가느다란 손목을 내려다본다. 이리 말랐으니 몸이 약한 것인지, 아니면 몸이 약하여 이리 마른 것인지 선후 관계야 알 수 없지만 화운의 몸은 사내의 그것이라고 보기엔 어려울 정도로 뼈대가 가늘고 살이 없이 말랐다.

하운도 사내치고는 제법 호리호리한 체형이기는 하였어도 아주 어릴 때 매일 굶다시피 하며 살았던 날들을 빼고는 이 정도로 말랐던 적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병을 달고 살았다면 애초에 연화운이 그런 괴팍한 성격이었던 이유가 그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남을 그리 괴롭혀댄 것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제 손목을 내려다보던 화운은 살을 조금 더 찌우 면 건강도 다소 나아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어버린다. 안 그래도 사내의 몸이라 여인과는 그 생김새가 많이 다를 터인데 살이 찌고 근육까지 붙여놓으면 폐하께서 보시기에 썩 좋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그러다 화운은 방금 제가 한 생각에 스스로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 적응하기 마련이라도 하더니 연화운으로 보낸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제가 진짜 후궁이라도 된 양 굴고 있는 것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사이, 제 손목만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주인이 걱정이 된 것인지 아진이 다가와 화운의 손목을 가만히 붙들어 주무르며 말했다.

“마마, 손목이 아프십니까?”

여전히 그에게는 낯설기만 한 아진의 손길에 황급히 손을 거둔 화운이 낮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는다. 그래도 한참을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더니 가슴이 답답하던 것도 한결 나아졌다.

“아니다. 그냥... 아까 너무 놀라 잠시 숨이 찼던 것뿐이야.”

“네. 마마, 그럼 점심을 올리도록 할게요. 식사를 하시고 약을 드시면 더 나아지실 거예요.”

말을 마친 아진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화운은 또 다시 생각에 잠긴다. 화운은 아직 이곳 정안궁에서 달리 할 일이 없어 요즘은 부쩍 생각을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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