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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9)화 (9/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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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진의 말에 화운이 반쯤은 걱정을 하면서도 조금 혹한 얼굴로 아진을 바라본다. 아이처럼 천진한 눈망울이며 표정에 순간 아진의 말문이 막힌 것도 모르고, 화운은 생각을 이어갔다.

수화원의 절경은 황궁 내 소문이 자자해 화운이 시위였을 시절에도 명성을 들어 본 바가 있었다. 하여 화운은 그토록 모두가 입을 모아 칭송하는 후원의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울지 솔직히 조금 궁금했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솔직한 이유는, 화운이 수화원에 가보길 바라는 진짜 이유는.

비록 당장 황제를 만나는 것이 화운의 마음을 너무나도 어렵게 하는 일일지라도, 화운은 다만 그분이 아끼신다던 풍경이 궁금했다. 그분의 시선이 닿고 손길이 닿은 나무와 꽃을 보고 싶었다. 그분의 따스한 시선을 지금에 와 제가 받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라도 황제의 다정한 시선을 받은 것들을 화운 역시 직접 보고 싶었다.

“예, 마마. 그럼요. 그곳은 정말로 아름다운 곳이니 가보시면 마마의 심신도 한결 편안해질 것이에요.”

하여 화운은 저의 팔을 살짝 붙드는 아진에게 못 이기는 척 몸을 일으킨다. 어여쁘게 피어난 꽃잎 앞에서 미소 짓는 황제의 얼굴이 일순 상상이 되었으나, 혹여나 그것이 불경일까 싶어 화운은 재빨리 생각을 떨쳐버리며 산책을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토록 은은하고 아름다울 황제의 얼굴은 화운에게 허락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황제는 오늘 기분이 좋지 못했다. 오늘따라 조회 내내 대신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말들만 계속해서 떠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점심을 먹을 생각도 죄다 사라져 버린 황제는 아무리 그래도 식사를 거르면 안 된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오 태감을 가볍게 무시하고 수화원으로 발길을 돌린 참이었다.

물과 꽃, 나무와 그 모든 푸르름이 어우러진 수화원의 풍경은 언제나 황제의 마음을 편안하게 다스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지금처럼 봄이 만발한 계절에는 피어난 꽃 또한 봄날처럼 아름다웠으니 황제는 그곳에서 불편하였던 심기를 차근히 달래고 조금 늦은 오찬을 들러 황후에게로 갈 요량이었다.

하지만 서서히 풀어지던 황제의 기분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후원 한쪽의 작은 연못에 다다랐을 때 완전히 깨져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곳에.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그곳에.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제 앞에 무릎을 굽히고 인사를 올린 후궁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빈, 연화운.

그는 마치 황제가 이곳에 걸음을 할 줄은 정말로 몰랐다는 듯 당황한 얼굴을 애써 감추는 표정을 연기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가만히 있을 연화운이 아니지.

황제는 이제야 납득이 가는 얼굴로 화운을 일으켜 세우지도 않고 계속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쩐 일로 안정전에 와서 생떼를 쓰지 않나 했더니 수화원에서 이 짓을 하려 준비 중이었던 모양이다.

“너는 이제 내 말도 우습더냐.”

서늘한 황제의 목소리가 내려앉자 연빈이 더더욱 고개를 깊이 숙이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폐하. 제가 어찌 감히....”

"허면 내가 너에게 자중하라고 한 것은 당분간 네 얼굴이 꼴도 보기 싫어 한 말임을 몰랐나?“

연빈의 싫은 점을 꼽으라면 밤을 새워 꼽아도 모자람이 있겠으나 그중에서도 황제는 연빈의 이러한 점이 정말로 싫었다. 그는 도무지 진실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모르는 이들은 연빈이 황제를 연모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라며 떠들어대지만 황제는 연비에게서 그 잘난 연심이라는 것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자고로 연심이란 세상 모든 사람에게 거짓을 말 하더라도 오로지 제가 연모하는 사람에게만큼은 진심을 다해 마음을 전하는 법인 게 아닌가.

하지만 연빈은 말로는 모든 것이 폐하를 사모하여 그런 것이라 하면서도 단 한 번도 그 마음을 진실 하게 내보인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의 우연을 가장하고, 진심을 꾸며내어 어떻게든 황제의 눈에 한 번 들어 보려는 가증스러운 노력만을 했을 뿐이다.

바로 지금. 이렇게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후원의, 황제가 가장 아끼는 연못에서 우연히 마주친 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주변에서 연빈이 폐하를 너무 사랑하여 그러하는 것이라 말을 한다고 한들 황제는 도무지 연빈의 사랑이라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그때, 이번에는 아예 바닥으로 고개를 조아려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만든 연빈이 미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폐하께오서 정무를 마치시고 오찬을 하실 시간이기에 아주 잠시만 산책을 하고 돌아간다는 것이 그만....”

“아, 그러니까 연빈의 말은 정말로 나를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내가 아무 때나 즐겨 찾는 수화원에 와서, 내가 가장 아끼는 연못 앞에 이리 알짱거리고 있었다는 것이지?”

비아냥거리는 것이 명백한 황제의 목소리에 연빈의 어깨가 더더욱 자그맣게 굽었다. 황제는 그 꼴도 보기가 싫었다. 다른 척은 다 해도 생전 저를 두려워 경외하는 척은 한 번도 한 일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이리 가련을 떨어대니 그 속이 더더욱 시커매 짐작 되지가 않아 불편했다.

“같지도 않은 말은 그만두고 돌아가려 했으면 어서 돌아가라. 더 보기도 싫으니.”

사실 황제는 그리 말을 하면서도 그가 순순히 돌아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연빈의 다음 행동은 뻔히 예상할 수 있었다.

분명히 은근슬쩍 곁으로 다가와 아양을 떨어대며 ‘폐하, 황궁이 이리 넓고, 하루는 이리도 긴데 지금 여기에서 폐하와 제가 마주친 것은 분명 그 뜻이 있질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제 그만 저를 용서해 주시어요. 네?' 하고 염치도 없이 들러붙을 참이겠지.

황제가 이번에야 말로 아무리 귀찮아도 쉬이 넘어가지 말고 본때를 보여 주리라 다짐을 하고 있을 때. 예상했던 대로 몸을 천천히 일으킨 연빈이 황제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폐하를 성가시게 하여 정말로 죄송합니다. 폐하께서 친히 저를 용서하여 부르시기 전까지 앞으로는 정안궁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을 것이니 부디 노여움을 푸십시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하지만 이어서 흘러나온 연빈의 말은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오죽하면 오 태감마저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연빈을 보았을까. 연민을 따라온 궁녀들은 말할 것도 없고 황제의 뒤를 따르던 이들 역시, 하여간에 연빈을 알고 있던 이들은 빠짐없이 당황하여 숨을 참았다.

그러나 그들 중 그 누구도 황제인 이한보다 놀라지는 않았다.

이한은 방금 연빈이 한 말 중 제대로 이해가 가는 구절이 하나도 없어서 연신 머릿속으로 그의 말을 되새겨 보았으나 여전히 이해가 가는 구절이 하나도 없었다.

그사이 연빈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인사를 올린 뒤 물러갔는데, 그 행동이 어찌나 망설임이 없고 깔끔하던지 모르는 이에게는 마치 그가 황제의 얼굴이 보기도 싫어 도망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큰 기척도 없이 연빈이 사라진 공간에 적막이 흘렀다. 한참 만에, 이한이 멍하니 선 채로 묻는다.

“지금... 날 두고 간 거냐...?”

오 태감이 그 물음에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가 없어 허리만 굽신거리고 있자니 지엄하신 황제 폐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지금 쟤가... 날 내버려 두고 순순히 간 거야?”

연빈이 황제를 두고 자진하여 홀로 돌아갔다. 이건 대 안국의 역사에서 전에 없던 일이었다.

“하아...”

재빠른 걸음을 황급히 후원에서 벗어나던 화운이 황제의 모습이 아주아주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걸음을 멈추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정말이지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마마, 괜찮으셔요 ?!' 하고 재빨리 부축을 해오는 아진의 팔을 물리고 연빈은 똑바로서 하늘을 보며 천천히 숨을 고른다.

황제는 보통 조회가 끝난 후 정무를 보고, 그 후엔 황후나 후궁의 처소에 들러 식사를 하기에 안심 했던 것이 문제였다. 산책을 하시더라도 식사를 마치고 하실 테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늑장을 부리는게 아니었는데. 연빈의 얼굴에 후회의 빛이 가득하다.

그 연못을 찾아간 것도 그러하다. 아진이 폐하께서 아끼는 연못이라 이전의 연빈 역시 자주 들렀다. 고 말을 했을 때 현명하게 그곳을 피했어야 했다. 아무리 폐하께서 아끼는 연못은 또 얼마나 수려하고 아름다울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어도 결코 발을 디디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설령 그런 이유로 그곳에 갔다고 하더라도 정말 잠시만 둘러보고 서둘러 나왔다면 괜찮았을 텐데. 그랬을 텐데.

서둘러 자리를 뜨지 못한 것은 더없이 화려할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소박하고 아담한 연못의 풍경에 화운이 시선을 빼앗기고 만 탓이다. 황궁의 후원에는 이보다 더 크고 화려한 연못이 많은데 이런 소담한 곳을 좋아하는 황제의 성정이 떠올라 그러했다.

지엄하신 천자의 몸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백성들까지 친히 굽어 살피며 만백성의 아버지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의 모습이 어쩐지 이 화려한 후원의 작은 연못과도 같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러다 보니 그 연못이 화운의 마음에도 그저 하염없이 어여쁘고 좋아서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하고 미적거렸던게 결국 이런 상황을 초래했다.

“마마... 정말 이렇게 돌아가셔도 괜찮으시겠어요 ..?”

그때, 숨을 고르는 화운의 곁으로 다가온 아진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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