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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8)화 (8/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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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황제가 제 처소에 걸음하지 않으면 황제를 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수작을 부리기를 망설이지 않는 이였다. 오죽하면 연빈의 행실과 성정은 괴팍하여 차마 봐줄 수가 없을 지경이지만 황제를 향한 그의 연정만큼은 온 황궁에 따를 자가 없을 거란 말이 돌았겠다.

물론 황제는 그것은 연정이 아니고 집착이며 정신병이라고 진저리를 치겠으나, 하여간에 그런 연빈에게 저의 패가 빠졌다는 건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으리라.

그러니 예전의 연민이었다면 이런 일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다. 당장에 머리를 풀고 소복을 입고선 황제에게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용서해 주실 때까지 돌아가지 않겠다며 식음을 전폐하고 목놓아 울어 황제를 아주 질리게 만들었을게 뻔했다.

황제는 마음만 먹으면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폐 하아...! 한 번만 용서하여 주시옵소서어...!' 하고 우는 연빈의 목소리를 흉내도 낼 수 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짐작했다. 어제는 용케 저를 뜯어 말리는 궁녀들의 손길에 찾아오지 못하고 참았을지언정 오늘은 절대로 그러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히 해가 뜨자마자 안정전으로 들이닥쳐 잘난 반성 놀음을 또 하고야 말 것이라고,

“...예.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한과 비슷한 위화감을 느끼며 오 태감이 말했다. 이한은 입술을 일자로 꾹 다문 채 다시 한 번 고요한 뜰을 바라보다가 이내 가마에 몸을 실었다.

우스운 꼴로 제 앞에 엎어져 바들바들 떨던 연빈의 마른 등이 떠올랐다. 그때에는 화가나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돌이켜 보니 연빈은 한 번도 제 앞에서 그리 겁에 질린 채 엎드려 떤 적이 없었다. 문득 문득 그 등이 떠오를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본래 연빈은 당장에 죽어도 하고 싶은 말은 하고야 마는 성미였고 잘못했다고 목 놓아 울면서도 진정으로 수그러드는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래 봤자 얼마나 갈까.”

이한이 중얼거렸다. 연빈이 하는 수작질은 언제나 뻔했다. 며칠 좀 잠잠하게 보내 황제의 화를 다시 피할 모양인 듯했으나 이한은 연화운을 잘 알았다. 그는 결코 황제의 눈치 때문에 자신을 바꿀 위인이 아니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아니 당장 내일만 되어도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해 소란을 피우고 말 것이다.

“고얀 것....”

그러니 오늘 아침에 궁인들을 모아놓고 약조니 무어니 했던 그의 행동이 얼마나 가증스러우냔 말이다. 굳어진 채 펴질 줄을 모르는 표정의 황제를 태운 가마가 봄이 드리워진 황궁의 길 위를 지나갔다.


“마마. 차라도 한 잔 드시면서 보셔요.”

아진은 벌써 몇 시간째 책에만 몰두하고 있는 연빈의 곁에 차 한 잔을 올려두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연빈이 혹시 내가 이전에 읽던 책이 있다면 달라고 요구했을 때도 '마마께서 책을...?' 하고 놀라기는 하였으나, 더 놀라운 건 정말로 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 읽고 있는 주인의 모습이었다.

화운이 읽고 있는 건 여칙(*부녀자가 지켜야 할 규칙을 적은 글)으로 황제가 제발 후궁으로서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라며 일찍이 읽기를 명하였으나 여태까지 한 번 들여다보지도 않았던 책이었다.

“아... 고마워, 아진.”

아진은 제 주인이 여태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과 방금 저에게 다정한 미소씩이나 지으며 '고맙다'고 말한 것 중 무엇에 더 놀라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진의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운은 그가 내준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며 눈을 한 번 깊이 감았다 떴다. 집중하고 있을 때는 알지 못했는데 한 번 시선을 돌리고 나니 눈과 목이 뻐근한 것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화운은 본래 민간에 유행하는 소설 등을 읽기를 좋아했다.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영웅이 모험을 하며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 들은 꽤 좋아했다. 일과 수련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달리 할 일이 없던 화운에게 소설을 읽는 것은 그가 가진 유일한 취미였다. 하여 혹시나 이곳에서도 책을 읽으며 무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그리 생각을 하였던 것인데 난데없이 아진이 여칙을 가져다주어 사실은 조금 당황했었다.

하지만 앞으로 연화운의 몸으로, 황제의 후궁으로 살아가는데 여칙을 이해하는 건 도움이 될 거라 여겨 지금까지 줄곧 집중하여 읽고 있던 것이다. 화운은 당분간 후궁으로서의 법도와 규율을 익힐 수 있는 책들을 많이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평소 책을 자주 읽었니?”

잠깐 책을 읽었다고 고새 뻐근해진 목을 가만히 주물러보며 화운이 물었다. 그러자 아진이 재빨리 화운의 곁으로 다가와 대신 목과 어깨를 주무르며, 입을 연다.

“으음. 평소 마마께오서는... 음....”

이전의 화운에게는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겠으나 지금의 화운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여인이 제 어깨며 목을 매만지는 것이 영 불편했다. 하지만 이도 결국 화운이 익숙해져야 할 일이었다. 화운은 아침마다 궁녀들이 달라붙어 저의 세안까지도 돕던 일을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적응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화운은 아진의 손길에 신경을 쓰는 대신 대답하기를 망설이고 있는 그의 말에 집중하며 입을 열었다.

“네 반응을 보니 책을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걸 잘 알겠구나.”

그 말에 아진이 뜨끔하여 황급히 주인의 얼굴을 살폈다. 옆에서 본 주인의 얼굴엔 그저 가벼운 미소만이 어려 있을 뿐 달리 화가 나거나 감정이 상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참으로 고우시구나.

그때 아진은 제 주인의 얼굴을 얼핏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저와 둘이 있을 땐 늘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고만 있어 은은하게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살며시 눈을 내리깔고 마치 다정한 농담이라도 한 것처럼 미소를 그리고 있는 연빈의 얼굴은 한 폭의 그림 속 선녀를 보는 것처럼 아름답기가 그지없었다.

아진은 그 순간 제 자신을 참으로 자조했다. 연빈에게 괴롭힘 당하며 고통스러웠던 시절이 얼마인데 고작 며칠 그가 조금 다르게 대해 주었다고 하여 이런 감상을 느끼는 자신이 너무나도 우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 며칠 저의 주인은 정말이지, 다만 달라졌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다.

단순히 화를 내고 내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로 그냥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아진은 저를 바라보는 주인의 시선부터가 이전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과연 그런 것이 꾸민다고 꾸며질 수가 있는 일인지 서서히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화를 내지 않을 수는 있었다. 성질을 참을 수는 있다. 매질을 하고 싶은 마음을 참는 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불러 주는 목소리의 너울이 달라지는 게. 저를 바라보는 시선의 결이 달라지는 게. 그런게 정말로 원한다고, 꾸민다고 꾸며지는 것이 가능할까. 높으신 분들이란 본래 그런 것도 가능한 분들인 건가. 아진은 그런 것들이 정말로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여전히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더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연빈이 말했다.

“오래 방에만 있었더니 좀 걷고 싶은데... 밖에 나가 산책을 해도 괜찮을까?”

아진은 서둘러 저의 상념들을 떨쳐내고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마마. 어디로 모실까요?”

“음... 평소 내가 자주 산책을 하던 곳은 어디지?”

“마마께오서 가장 즐겨 산책을 하시던 곳은 수화원입니다. 황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지요 . 그리로 가시겠어요?”

아진이 당장에 채비를 할 듯 몸을 들썩이며 말했지만 가만히 수화원이라는 단어를 입에 굴려 본 화운은 무언가 마음에 걸린다는 듯 다소 어두워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수화원이라면... 폐하께오서도 자주 오시는 곳이 아니냐.”

수화원이라면 화운도 이미 알고 있는 곳이었다. 황궁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풍경을 자랑하는 후원인 수화원은 평소 황제가 자주 발걸음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

아진이 화운의 말을 받아 목소리를 높였다.

“예, 맞아요. 그래서 마마께서도 자주 걸음을 하셨던 거고요.”

허나 아진의 말에 화운은 더더욱 심각한 얼굴을 할 뿐이다. 이전의 연화운이야 어떻게든 황제를 한번 더 마주치고 싶어 수화원을 자주 찾았을 게 분명 하지만 지금의 화운으로서는 지금 황궁에서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가 바로 황제였기 때문이다.

저를 경멸하듯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이 어렵기도 하고, 지난번 화운에게 자중하라 경고한 일도 있어 그렇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황제를 보면 더더욱 다스리기가 어려워지는 저의 마음이 가장 문제였다.

황제를 떠올리면 화운은, 오로지 황제의 한 순간에 반하다시피 하여 황궁에까지 들어온 하운의 삶이 떠올랐다. 그날, 자애롭고도 아름다운 황제 폐하의 얼굴을 보고 느꼈던 모든 감정이 해일처럼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하면 자연스럽게 이제는 죽어버린 하운의 생이 떠오르고,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면 지금 자신이 거짓으로 황제의 앞에 있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가 없어서.

화운은 황제를 보면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전부다 고하며 죄를 청하고 싶어질까 겁이 났다.

"폐하께서 내게 자중하라 하셨으니 수화원엔 아니 가는 게 좋겠구나....”

어쩐지 마음이 심란해진 화운이 다소 풀이 죽은 목소리로 그리 말하자 순간 저도 모르게 마음이 덜컹 내려앉은 아진이 황급히 말을 덧붙인다.

“하지만 마마! 지금 시각이면 폐하께선 정무를 보시느라 바쁘실 거고, 후에는 바로 오찬을 하러 가실 테니 지금 수화원에 가셔도 폐하를 만나실 순 없을 거예요!”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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