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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정말 나는....”
화운은 그저 황망한 심정으로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되뇌었다. 아진의 입으로 들었던 화운, 그러니까 연빈의 패악질이 상상을 초월한 탓이다. 듣 것 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힌 화운은 이제 아주 아진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왜 아진을 비롯한 정안궁의 궁녀들이 저만 보면 벌벌 떨며 머리를 조아리기 바빴는지 너무나도 잘 알것 같았다.
비록 이 모든 일들이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벌어 졌고 하루아침에 몸이 바뀐 것은 선선히 납득하기엔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언제까지고 넋을 놓고 당황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화운은 이제 돌아갈 몸조차 잃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앞에 남은 선택지라고는 우선 화운으로 이 황궁에서 잘 살아남는 일이 전부였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빨리 상황을 파악해 들키지 않게 연화운인 척을 해내야 했다.
그래서 아진에게 이전의 연빈이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제대로 듣길 원했던 건데. 그런 건데.
"...어째서 폐하께서는 나를 아직도 쫓아내지 않으신 거지?"
화운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제가 어떤 사실을 말해도 화운이 조금도 화를 내거나 분통을 터트리는 기색이 없자 어느순간 저도 모르게 마음을 놓아버린 아진이 바로 답을 붙인다.
"그거야 연 대인은 폐하께서 가장 아끼시는 분이시니까요.”
“아... 연 대인이라면... 내... 내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겠지....”
순간 마음 한구석이 삐그덕거렸다. 아버지, 라는 단어를 말하는데 마치 세상에 없던 단어를 처음 배워 내뱉는 것처럼 혀가 꼬이는 기분이다. 화운에게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입을 열어 불러본 기억이 없었다.
“하....”
갑자기 제가 지금 처한 상황이 새삼 실감이 되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천애고아로 의지할 일가친척 하나 없던 자신은 이제 안국에서 가장 충직하기로 소문난 충신 집안의 아들이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하운은 본래 그 성정이 고요하고 말이 없었으며 남들과 시비가 붙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 성미였다. 객잔에서도 문제를 일으키는 손님들을 제압할 때조차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거의 없이 조용히 살았던 이다.
헌데 지금 자신은 어떠한가. 그는 황제의 후궁으로 빈의 자리에 올라 있으나 동시에 황제가 가장 싫어하는 후궁이고, 황궁의 모든 이들은 그를 두려워 하거나 경멸하였으며, 정안궁의 어린 궁인들까지 자신을 악귀 보듯 할 정도로 주변을 쥐 잡듯이 잡아 사람을 괴롭히길 일삼았다. 그러니 아무리 어떻게든 적응을 하겠노라 다짐을 한 화운이라도 절로 앞이 깜깜하고 막막해져 맥이 탁 풀리고야 마는 것이다.
한숨을 쉰 화운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그제야 제가 너무 신이 나서 떠들었단 생각이 든 아진이 입을 합, 다물고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이러다 갑자기 또 '네 이년! 하고 경을 치려 드는건 아닌가 두려움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그저 한숨을 한 번 더 깊이 쉬어 본 화운은 이내 여전히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을 해야겠네. 정안궁에 혹여 나 때문에 다치거나 아픈 아이들이 있느냐.”
“네?”
“아니. 꼭 나 때문이 아니라도... 그동안 내가 제대로 살피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이 있는지 살펴보고 알려 주었으면 해.”
“.......네?”
아진이 또다시 자신의 철칙을 어기고 두번이나 되물었다. 이 궁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며 실려 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제 주인의 입에서 아이들을 살피라는 말을 들은 것이 맞는지 듣고서도 아진은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선... 그래, 우선 그것부터 해결하자.”
화운은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머리가 터질 것 같아 고개를 저으며 아진에게 이만 나 가봐도 좋다 손을 끄덕였다.
어차피 지금으로서 화운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특히나 황제와의 관계는 제가 어찌 노력한 다고 풀릴 성싶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선은 최대한 황제의 앞에 보이지 않게 죽은 듯이 숨어 있어 야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그때, 침실을 나서다 말고 아진이 더없이 의심스러운 얼굴로 돌아보며 화운에게 말했다.
“마마... 설마 그 아이들을 다 죽이시려는건 아니 시지요?”
화운은 그만 다시 기절하고 싶었다.
“시킨 일은 잘 처리했느냐.”
대전에 들어서자마자 이한은 바로 뒤에 따라붙어 오던 오 태감을 향해 물었다. 황제가 명한 일이 어디 한둘이겠냐마는 이한이 황제로 등극한 순간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를 모시던 태감은 단박에 황제께서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허리를 굽히며, 입을 열었다.
“예, 폐하. 죽은 시위의 시신을 수습해 간 친우라는 자에게 장례비를 주어 위로하였습니다. 하해와 같은 폐하의 은혜에 죽은 이도 감복하였을 것이옵니다.”
"감복은 무슨....”
오 태감의 입 발린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이한은 쓴 입맛을 다신다. 이번 일은 어찌 이리 쉬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고 자꾸만 입안의 모래처럼 계속하여 마음에 서걱거리는지 모를 일이다.
사실 궁을 지키는 시위가 궁의 주인을 구하고 죽은건 달리 어긋남이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연빈을 구하고 죽었다는 이는 고아에 천민으로 원래라면 감히 시위 자리를 꿈도 꾸지 못할 미천한 이였다. 그런 이가 저보다 귀한 윗전을 구하고 죽었다면 누구라도 그의 죽음을 마땅하다 여길게 분명했다. 세상사가 원래 그러한 법이니까.
하지만 이한은 자꾸만 그 일이 마음에 남았다. 궁에 들 수 없는 자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들게 만든건 황제 자신이었다. 밖에 두었다면 비록 조금 더 고달팠을 수는 있겠으나 더 오랜 생을 이루며 살아 갔을지 모르는 이다. 그러다 처지가 맞는 좋은 사람을 맞이하면 거창한 식을 올리지는 못하여도 살림을 합쳐 알콩달콩 살았을 것이고, 저와 처를 닮은 아이를 낳아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그리 오랫동안 살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런 이가 궁에 들어오게 되어 하루아침에 비명횡사를 하게 되었으니.
“정말이지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거기까지 생각하자 조금 전 가증스럽게도 창백한 얼굴로 제 앞에 인사를 올리던 연빈이 떠올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물에 빠진 이유야 듣지 않아도 뻔했다. 황제가 좀처럼 제 처소에 들지 않자 물에 빠졌 다는 핑계를대 끌어들이려 했을 게 분명하다. 연비의 속셈은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허니 고작 그런 이유로, 고작 그런 사람을 구하려 죽지 않아도 되었을 이가 죽었다니 이한은 도무지 이 일을 당연하다 여길 수가 없었다.
“경사방에 일러라. 내가 다시 말하기 전까지 연빈의 패는 올릴 필요가 없다고."
“....예, 폐하.”
이미 예견하고 있던 명령이 떨어졌다. 패를 빼라는 것은 다시 말해 연빈의 침소에는 아니 들겠다는 이야기고 그건 아마도 연빈이 그 무엇보다 끔찍하다 여기는 벌일 것이다. 오 태감은 별다른 말없이 그저 허리를 굽혀 대답한다.
아무래도 오늘 정안궁에서는 또 한바탕 소란이 벌어질 모양이었다.
- *
“하아....”
아진은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땅속으로 꺼져버리고 싶었다. 해가 저물어가자 촛불을 밝혀 불빛이 아른거리는 주인의 침소는 마치 지옥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섭게만 보였다. 앞으로 다가올 일이 어찌나 두려운지 오죽하면 '어머니. 어찌하여 저를 하필이면 연씨 집안의 노비로 태어나게 하신 건가요.' 하고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서 이제는 얼굴조차 가물거리는 어미에게 원망의 마음까지들 지경이다.
이 시간쯤이 되면 폐하께서 어느 궁으로 가실지 알아오는 것은 늘 아진의 몫이었다. 아진은 이 일이 그 어떤 고된 일보다 가장 끔찍했는데 황제가 다른 후궁의 패를 뒤집었다 하는 날은 연빈의 모든 패악을 아진이 그대로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황제는 정안궁보다 다른 처소에 드는 날이 훨씬 많았으니 그간 아진이 겪은 고초는 눈물이 없이는 적어내릴 수가 없는 기록이다.
하물며 오늘은 사태가 더 심각했다. 황제가 다른 후궁의 패를 뒤집은 걸로도 모자라 연빈의 패를 아예 빼버리라고 하질 않았다던가. 정안궁의 침소 앞에선 아진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도무지 안으로 들어가 이 소식을 고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물론 근 며칠간 제 주인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기억을 잃어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죽을 고비를 넘겨 생각이 달라진 건지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 정말로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굴었다. 별것 아닌 일로 저를 비롯한 궁인 들에게 욕을 퍼붓거나 매질을 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제가 그리 괴롭혀대던 아이들을 데려다 치료를 받게 하고 챙겨 주기까지 하였다.
'내가 죽다 살아나질 않았느냐. 당장에는 너도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내 마음이 이전과는 같지 않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구나.'
아진은 제 주인이 했던 말을 찬찬히 곱씹어 본다. 확실히 지금까지 그는 제가 했던 말에 어울리는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진은 여전히 연빈을 믿지 못했다. 그를 모시며 고초를 당한 것이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그 깟 몇 마디의 말과 행동으로 덥석 그가 변하였다고 생각하기엔 당해온 시간이 너무나도 고됐다. 용케도 지금까지는 잘 지나갔지만 폐하께 오르는 패가 기약도 없이 빠져버렸다는 소리를 들으면 분명 눈앞으로 뭐가 날아와도 날아올 터였다.
“마마. 아진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