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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주 별짓을 다 하는구나.”
숨 막히는 적막을 깨트린 건 어처구니가 없는 표 정으로 한참이나 화운의 정수리를 바라보고 서 있던 황제, 이한이었다. 하여간에 연화운의 그 작은 머리 통에는 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늘상 생각해 왔지만, 이처럼 기발한 짓은 또 처음이 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진이 황급히 황제의 발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폐, 폐하...! 송구하오나 저희 마마께오선 아직... 물에 빠지셨던 충격으로 아직 몸이 미령하시어 그러 한 것입니다...!”
“흥, 인사를 하는 모양새가 아주 장군감인데 미령은 무슨.”
그러더니 황제는 화운에게 일어나라는 말도 없이 몸을 돌려 의자에 앉고는 여전히 의심이 가득한 눈을 가늘게 뜨며 화운을 바라본다. 그사이 제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 깨달은 화운은 계속 당황하고 있는 중이었다.
인사를 잘못한 것은 알겠는데 그럼 이제라도 일어나 다시 인사를 올려야 하는지, 아니면 죄를 먼저 청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 일어나 앉아야 하는지. 원래에도 아는 바가 없었지만 놀라고 당하니 머리가 더더욱 돌아가지 않아 차라리 울음을 터트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단 자세라도 어떻게 고쳐 보겠다고 찔끔찔끔 몸을 움직여 보던 화운이 바닥에 드리워진 치맛자락을 잘못 밟고 풀썩 앞으로 넘어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아진이 질겁하여 “마마!” 하고 화운을 부축했다. 황제는 이제 이런 수작질은 놀랍지도 않다는 투로 허, 하고 그저 기막히다는 듯 웃음을 한 번 흘리곤 이죽거렸다.
“벌을 피하고 싶거든 연약한 척을 하든가, 나를 웃기려 들든가 하나만 해라, 하나만."
“폐, 폐하....”
그대로 엎드린 화운은 목이 꽉 잠긴 듯 말이 나오지 않아 간신히 황제를 한 번 부르기만 할 뿐이다. 본래 담이 크고 매사 무던하다는 이야기를 줄곧 듣던 화운이었으나 며칠간 몰아친 일은 여전히 화운에 게 버거웠고, 거기다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이리 황제 를 알현하게 되니 도무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바닥을 짚은 화운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 황제는 연기가 분명할 그 가증스러운 손끝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이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태감의 말대로 얼굴은 비쳤으니 이것으로 할 일은 다 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터였다.
“연빈은 이미 별 같잖은 짓을 할 정도로 쾌차한 것 같으니 돌아가자.”
화운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였다. 저를 향해 쏟아지는 황제의 목소리에서 어찌나 한기 가 뚝뚝 떨어지는지 조금 전의 실수가 없었어도 화운은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황제가 정안궁 보기를 원수 보듯 한다는 말은 이미 황궁에 파다해 화운 역시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막상 그 대상이 자신이 되자 감당하기가 보통 어렵지가 않다.
그때. 미련 없이 길을 나서던 황제, 이한이 문득 문 앞에 멈추어 서더니 화운을 돌아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너를 구하느라 시위 하나가 죽었다.”
황제를 배웅하기 위해 겨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던 화운의 몸이 덜컥, 굳어버렸다. 연빈, 연화운을 구하기 위해 죽은 시위는 바로 자신이었다.
“내 관심이나 한번 끌어 보려는 너의 놀음에 내 손으로 친히 명을 내려 뽑은 아까운 시위가 목숨을 잃었다는 말이다.”
아까운 시위. 내 손으로 친히 뽑은.
황제가 뱉은 그 말들이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어 화운의 귓가를 어지럽힌다. 그가 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되어 황궁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건 황제가 자신의 생일을 맞이하여 대대적으로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천민이는 귀족이든 태생에 관계없이 누구든 능력을 가려 일정 수의 시위를 뽑으라 명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그때 뽑힌 이가 하운 한 사람뿐은 아니었고 황제는 그들 중 하운이라는 사람이 있던 것조차 몰 랐겠으나 말뿐이라도 황제는 여기에서 화운에게 그 리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내 손으로 친히 뽑은, 아까운 사람이었노라고.
절로 입술이 덜덜 떨려왔다. 앞이 흐려져 행여나 추태를 보이지 않기 위해 화운은 피가 나도록 입술 을 꽉 깨물어야 했다. 여전히 황제는 등을 보인 채로 말했다.
“네 눈에야 그가 시위의 목숨 따위 너무나도 하찮겠으나....”
“정녕 네가 인간의 탈을 계속 쓰고 싶다면 마땅히 그에게 죄스러워하며 자중해야 할 것이야.”
말을 마친 황제는 그대로 정안궁을 나서 멀어졌 고 뒤에 남은 화운, 아니 하운은.
이미 죽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시위는.
“흑... 흐윽...!”
그대로 몸이 허물어졌다. 간신히 참았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와 순식간에 뺨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놀란 아진이 무릎 으로 달려와 화운의 몸을 부축했다.
“마마, 어찌 우십니까.... 폐하께서도 마마께서 봉변을 당하시니 놀라고 속상하여 그리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겠어요, 마마....”
아진은 아마 황제가 제게 모질게 말한 탓으로 화운이 이리 서글프게 운다 생각을 하고 있겠으나 사실 화운이 우는 이유는 정반대였다.
말 그대로 일개 시위였다. 다른 시위들처럼 어엿 한 명문가 자제도 아니고, 앞길이 창창한 귀한 이들 도 아니고, 그저 동정을 얻는 것처럼 운이 좋아 들어 온. 황궁에서는 돌멩이나 다름없는 그런 존재였다. 화운이 깨어난 뒤에도 그가 묻기 전까지 누구도 그 시위의 죽음에 대해 고하는 이가 없질 않았다. 하운 의 죽음은 그야말로 개죽음,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는 말이다.
시신을 수습해 줄 이조차 없는 하운의 죽음은 원래 아무 의미도 없었어야 할 일이다. 의미를 가지고 오래 기억해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헌데 황제가. 일국의 지엄하신 황제가 하운의 죽음을 기억했다. 입에 올렸다. 비록 그것이 다만 화운을 경멸하려는 의도뿐이었다고 하더라도 황제는 그리 죽은 시위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여 준 것이다. 화운은 그것만으로도 이름 모를 시위의 죽음은 구원 받았다 생각하였다.
그것이 과분해서. 서러울 만큼 따스해서. 그날 제 가 넋을 놓고 바라보았던 황제 폐하께서 이리도 다정하고 좋은 분이었던 게 하염없이 좋아서.
화운은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그것이 이제는 화운이 된 그가 하운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의 짧은 삶에 보내는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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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진은 화운의 앞에서 어쩔줄 모르는 표정으로 몸을 옹송그리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방금 아진 은 화운으로부터 자신과 황제 폐하의 관계가 어느 정도로 엉망이냐는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진이 사색이 되어 덜덜 떨기만 할 뿐 쉬이 말을 꺼내지 못 하자 화운이 다시 한 번 아주 차분한 음성으로 말한다.
“아진. 화를 내려거나 너를 탓하려고 묻는 게 아니야. 정말 기억이... 기억이 안나서 그래.”
“마, 마마....”
“폐하께서 내게 보이신 태도로 보아하니 나를 보 통 불쾌히 여기시는 게 아닌 듯해서....”
화운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황제가 연빈이라면 치를 떨게 싫어한다는 소문은 하운 역시 들어 본 바가 있었다. 그건 하운 같은 말단 시위의 식사 자리에서도 심심치 않게 오르내리던 이야기일 정도로 유명했고, 그런 말을 누구나 쉽게 입에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이 황궁에서 연빈은 우스운 존재였다.
물론 그의 아비가 황제의 가장 큰 신임과 애정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공신이자 충신이니 대놓고 연비를 무시하는 아랫것들은 없었으나 적어도 모두의 마음속에서 연빈은 조금도 존중받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막상 황제를 마주한 화운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화운을 대하는 황제의 태도에서는 제 후궁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조차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굳이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던 싸늘하기 그지없는 시선과 여염집 아낙을 대하듯 하던 말투, 화운이 목숨을 잃을 뻔하였는 데도 불구하고 한 마디 염려조차 내비치지 않던 모습까지. 그저 소문이 아니라, 황제는 정말로 화운을 끔찍하다 여기고 있는게 자명해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아비가 그 정도의 위치에 있는데 도 그의 신분이 여전히 '빈'인 것을 보면 다한 말이 아니던가. 황제와 화운의 관계가 보통만 되었어도 그는 이미 '비'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고 총애를 얻었 다면 머지않아 '귀비' 의 자리를 노려도 이상할 게 없 을 집안이었다. 그런데도 화운은 여전히 봉호도 받 지 못한 연빈에 불과했으니.
“사정이 어떠한지 알아야 내가 앞으로 폐하의 앞 에서 어찌 행동할지를 알 수 있질 않겠느냐. 그러니 너는 더는 것도, 더하는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내게 전부 말해 주어라. 무슨 말을 하여도 너를 탓하거나 벌하지 않을 것이니.”
아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것이 저의 주인이 조금 전 폐하의 행동에 마음이 상해 제게 화풀이하기 위해 시험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화를 내지 않겠다고 하여 직언을 하였다가 뺨을 얻어맞은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었느냔 말이다. 하지만 그때. 이전에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깊은 눈동자를 한 채로 저의 주인이 말했다.
“지금 내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마마....”
“눈치를 보아하니 내가 이전에 네게 터무니없이 모질게 굴었던 것을 짐작하겠으나, 아진....”
아진,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감히 거짓이라 치부 할 수가 없게 다정하기만 하다. 아진의 주인은 이전엔 단 한 번도 이리 부드럽게 그의 이름을 불러 준 적이 없었다. 죽다 살아나면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 람처럼 변하기도 한다던데. 아진은 여전히 혼란스러 운 심정으로 숨을 골랐고 화운은 말을 이었다.
“이제라도 내가 잘못했던 것을 바로 잡을 수 있게 ... 네가 나를 도와주었으면 좋겠구나.”
이전에 이미 수십 번을 속았던 것을 한 번 더 속 는다고 뭐가 그리 크게 달라질까. 결국 아진은 눈을 한 번 질끈 감은 채 입을 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