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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꼭 그를 만나러 가야 하느냐. 어차피 이미 깨어났다면서.”
황제는 걷다 말고 멈춰 서서 반걸음 뒤에서 저를 따르던 오 태감을 향해 잔뜩 불만 어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물에 빠져 죽다 살아났다던 연빈의 처소로 막 가려던 참이었다.
그간 황제와 연빈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이야기를 떠올려 보자면 그가 굳이 연빈의 처소로 걸음하고 싶지 않아하는 건 이해를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허나 황제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태감의 입장에서는 이런 큰일이 있었는데도 황제가 병문안을 가지 않는다면 이후 벌어질 일은 더 감당할 수 없을 게 뻔했기 때문에 그저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연다.
“이번에는 정말로 큰일이 날 뻔하셨다 하니 폐하께서 납시시어 위로를 해 주시면 크게 감동하실 것입니다.”
“죽을 뻔은 무슨. 내가 걸음을 아니 하니 또 이리 행패를 부려 나를 끌어들이려는 거겠지.”
죽다 살아났다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라기엔 황제의 언행이 퍽 괴팍하였으나 그간 연빈이 황제를 저의 처소로 끌어들이기 위해 해왔던 일들을 떠올려 본다면 누구라도 황제의 말이 심하다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황제는 본디 후궁들에게 야박한 이가 아니었다.
“설령 그렇다 한들 연빈마마께서 얼마나 폐하가 그리우시면 그렇게까지 하셨겠습니까. 어차피 오후 일정이 바쁘시니 잠시 얼굴만 비치고 오시면 되실 겁니다.”
황제는 태감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휙, 노려보듯 돌아보았다가 이내 잔뜩 불만에 찬 숨을 한 번 내쉬곤 다시 걸음을 옮긴다. 듣기엔 아니꼬워도 이리 재차 저에게 청을 하는 태감의 뜻을 황제라고 모를까. 황제 역시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결국 무거운 걸음을 다시 뗄 수밖에 없었다.
연주원 그 망할 늙은이. 제게 얼굴은 곱고 성격은 어미를 닮아 얌전하기 그지없는 애틋한 막내아들이 하나 있는데 먼발치에서 폐하를 한 번 뵙고는 상사병에 걸려 오늘내일 죽어가니 부디 비어 있는 남후궁 자리를 모자란 제 아들놈에게 주실 수는 없느냐 하도 간곡하게 청을 해 받아 주었던 것인데, 이것이 아주 순 사기꾼이 아니냔 말이다.
얼굴이 고운 것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성격이 얌전? 얌저언? 황제는 아직도 그 말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분통이 터져 허공에 발길질을 할 판이었다.
골칫덩이 연빈의 아비로 말할 것 같으면 일찍이 이름난 충신으로, 지금의 황제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과거 황제를 태자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형제들의 온갖 수작 속에서 유일하게 황제로서의 자질을 갖춘 태자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여 끝끝내 태자가 무사히 황제의 자리에 오르도록 만든 이였다.
어디 그뿐인가. 정쟁의 혼돈 속에 태자가 황제로 등극한 이후엔 성심을 다해 황제를 도와 안국이 지금의 태평성대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지금까지도 황제가 가는 길을 함께 하며 곁을 지키고 있다. 그러니 그 아비의 유일한 흠이라고 한다면 사기를 쳐 저에게 떠맡긴 아들 하나가 전부라는 것인데….
황제는 자네 아들이 지금 후궁 처소에 들어앉아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 줄 아냐며 다그치는 자신의 말에 이제는 폐하의 후궁이고 폐하의 집안일이니 감히 소신이 참견할 일이 되지 못한다고 선을 긋던 그 늙은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숨을 씩씩거린다.
속아도 단단히 속은 것이다. 그 고약한 아들놈 제 손으로 감당이 아니 되니 애물단지를 자신에게 넘겨준 것이 분명했다. 네게 금을 내릴까, 집을 내릴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말만 하라던 호의를 한사코 거절하더니 이런 짐을 내맡기려 그랬던 모양이다.
“하아….”
가마에 오르는 황제의 발걸음이 한숨과 함께 점점 느려졌다. 아무리 속아서 들였다고 한들 아비의 얼굴을 보자면 내칠 수가 없고, 연빈이 아무리 성질이 포악하고 제게 하는 짓이 꼴사나웠어도 대역죄를 저지른 건 아니니 아들이 못났다 그 아비를 내칠 수도 없고.
하루라도 빨리 그 늙은이를 은퇴시키든가 해야지.
오늘도 이룰 수 없는 꿈을 황제가 이윽고 가마에 올랐다.
“정안궁으로 가자!”
오늘따라 유독 우렁찬 오 태감의 목소리만 괜히 얄미워하는, 대 안국의 가장 칭송받는 황제. 성이한이었다.
“마마. 어찌 이리 떠십니까.”
의자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문가에서 무슨 소리만 들려도 어깨를 움찔하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화운을 보다 못한 아진이 물었다. 그 말소리에도 화운은 어깨를 파드득 떨며 엉덩이를 들썩거린다.
황제가 걸음을 하신다 하면 원래에도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며 엉덩이를 들썩이던 주인이기는 하였으나 오늘처럼 이리 눈에 띄게 긴장하여 떠는 모습은 또 처음이라 아진은 오늘 하루 종일 도무지 제 주인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 중이다. 화운은 곧 아진을 향해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으나 아까보다 더 파리해진 안색은 하나도 괜찮아 보이질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화운은 정말 딱 죽을 맛이었다. 치장을 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하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다른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는데 막상 준비를 마치고 오도카니 앉아 있으려니 자신이 지금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실감이 되었다.
황제라니. 황제 폐하를 뵙는다니. 화운이 생각할 때 어떤 면에서 그건 제 몸이 죽어버린 것보다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아무리 손바닥을 손톱으로 꾹꾹 누르고 또 눌러도 진정되지 않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댔다.
황제가 누구인가. 그는 만고의 천자이시고 땅 위와 하늘 아래의 지존이시며 화운, 아니 이리 몸이 뒤바뀌기 전의 하운 같은 천한 이들은 언감생심 우러러 바라볼 수조차 없이 귀한 분이시다. 허나 지금 화운의 심장이 이리 거세게 뛰어대는 건 비단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아로 자라나며 길거리를 전전하던 하운은 그의 천성을 곱게 보아 준 스승을 우연히 만나 뛰어난 정도는 아니지만 무술을 배울 수가 있었다. 그 덕분에 객잔에서 호위를 겸한 점소이로 먹고 자며 일할 수 있게 되어, 하운은 저처럼 박복한 이에게는 이만한 삶으로 충분하다 여기며 현실에 안주하고 있던 참이다. 그런 하운으로 하여금 감히 황궁을 꿈꾸게 만든 것이 바로 지금의 황제였다.
그날. 하운은 운이 좋게 도성을 가로지르는 어가의 행렬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비록 황제가 밖으로 얼굴을 비추지는 않을 거라 다들 말하였지만 하운으로서는 어가를 보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라 여겨 주인에게 거의 애원을 하다시피 하여 시간을 내 앞자리를 사수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날 그 자리에서. 하운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백성들을 위해 어가 밖으로 얼굴을 드러내며 손을 흔들어 주던 황제를 처음 보았다.
어찌나 빛이 나던지. 어찌나 눈이 부시던지. 화려한 관이나 의복 같은 건 하나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황제의 용안은 어찌나 아름답던지.
하운은 그만 넋을 놓고 그 얼굴을 바라보다 어가를 지키던 시위에게 무릎을 꿇으라 검집으로 어깨를 한 대 얻어맞고 나서야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란 저런 분이시구나. 저리 아름다운 분으로 타고나야만 지엄하신 황제 폐하가 될 수 있는 모양이구나. 하운은 그날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제가 보았던 황제의 얼굴을 그리고 또 그렸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오랜 상념으로부터 화운을 깨운 건 여태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던 그 이름이었다. 다급하게 일어나느라 비틀거린 화운의 몸을 아진이 재빨리 부축했고 그사이 황금빛 곤룡포를 입은 이가, 지엄하신 황제 폐하가, 화운의 앞에 섰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숨이 막히고 앞이 어지러웠다. 화운은 마치 제가 그날, 어가가 지나가던 그 행렬 앞에 다시 서게 된 것만 같았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야 하지 않을까. 또 그때처럼 어깨를 얻어맞는 것은 아닐까. 여기는 어디이고 나는 누구인가. 머리가 온통 복잡하여 화운은 고개를 숙인 채 숨을 헐떡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마, 마마… 어서 인사를 올리셔야죠….”
굳은 듯 멈춰선 화운을 불안하게 바라보던 아진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일깨운다. 화운은 그제야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인사. 인사를 올려야지. 이번에는 머릿속에 오로지 그 생각 하나가 가득 차버렸다. 하여 화운은. 그러니까 아주 오래 하운으로 살아오다 시위로 입궁을 하였던 그는.
“소인,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황제에게 서둘러 인사를 올렸다. 한쪽 발은 앞으로 내밀어 숙이고,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은 채 한 손을 직각으로 굽혀 앞으로 내민.
그것은 후궁의 인사가 아니라 시위의 인사였다. 처소에는 이내 침묵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