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미움받는 남후궁이 되었다 (2)화 (2/167)

2

하지만 그러면 무엇 하겠는가. 그 미색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성격은 그의 얼굴에 홀랑 빠진 이도 절로 고개를 저으며 도망치게 만들 정도였으니. 아진은 황제가 제 주인을 이토록 박대하는 것을 이해하였다.

주인의 침묵이 길어지자 아진의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안 그래도 취향 맞추기가 하늘의 별따기인데 오늘은 기분까지도 좋지 않아 보여 마음이 불안했다. 괜히 마음에 들지 않게 치장을 도왔다가 무슨 사달이 날지 몰랐기 때문이다. 또 무슨 대단한 걸 입히고 바르라 할지 짐작할 수가 없어 아진이 그저 숨을 죽이고 있을 때, 한참을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던 주인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굳이 치장을 해야 할까?”

“…네?”

“아직 몸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으니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닐까…. 그냥 단정하게만 도와다오.”

“……네?”

정안궁에 들어오는 궁인들에게 아진이 가장 먼저 가르치는 규칙 중 하나는 절대로 마마께 되묻지 말라는 것이었다. 아진은 새로 어린 궁인들이 들어올 때마다 누구보다 앞장서 그 규칙을 주지시키고 또 주지시키곤 하였는데, 어찌나 놀랐는지 지금은 짧은 시간에 저의 주인에게 무려 두 번이나 되묻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허나 아진이 저의 실수를 깨닫고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리기도 전에, 화운이 말을 이었다.

“요란한 치장은 되었으니 폐하 보시기에 너무 무례해 보이지만 않도록 해 주십… 해 줘.”

단 한 번도 화운이 내려 본 적이 없는 명령에 아진은 점점 더 사색이 되어가고 있었으나 화운은 지금 그의 얼굴을 살펴볼 여력 같은 게 없었다. 신경을 쓴다고 쓰고 있지만 자꾸만 시위 시절 쓰던 말투가 나오려는 것도 문제였고, 황제가 찾아오는 일은 더더욱 큰 문제였다.

물에 빠진 충격 때문인지 이전의 일이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댔던 핑계는 태의 역시 그럴 수 있는 일이라 인정을 해 준 덕분에 그럴듯하게 넘어갔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명령에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아진이 이어지는 화운의 말에 황급히 고개를 다시 조아렸다. 화운은 면경에 비친 저의 얼굴을 심란한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나를 구하려 했다던 시위는….”

“아….”

“정말 죽었다더냐….”

말을 하는 화운의 입가가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 자고 일어났더니 생각지도 않은 이와 몸은 바뀌어 있고, 본래 가지고 있던 몸은 이미 죽어버렸다고 하면 누구라도 평정심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릴 적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로 자라나 제 인생은 앞으로도 평생 그리 순탄하지는 못하리라는 걸 일찍이 깨달았으나 이리도 허망하게 죽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토록 그리고 그리던 황실의 시위가 되질 않았나. 비록 황제가 거의 발걸음을 하지 않는 후궁 처소를 지키는 말단 시위였어도 천민으로 태어나 자랐던 하운에게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자리였다.

그렇게 겨우 겨우 얻은 자리였는데. 살면서 제가 유일하게 욕심내고 꿈꾸었던 것을 이제야 얻었는데. 이렇게 허무한 죽음으로 삶이 끝날 줄이야.

어두워진 화운의 안색에 아진이 조금 더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돌에 머리를 부딪친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고 합니다.”

“…….”

“그, 그자에게는 영광스러운 죽음이지요! 들어 보니 일가친척 하나 없는 고아인데 지난번 폐하의 생신 때 특별히 신분에 제한을 두지 않고 등용하였던 시험을 치고 들어온 모양이더라구요. 제깟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귀한 마마를 구하고 죽었으니 오히려 그자가 마마께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괜한 일에 신경 쓰지 마셔요, 마마.”

“무슨 말을 그리…!”

너무 황당해 그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아진의 말을 듣던 화운이 기가 막혀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죽었는데. 그것도 저들 마마를 구하려고 그러한 것인데 어찌 이렇게까지 악독하게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싶어 순간 감정이 북받친 탓이다.

“마마…?”

하지만 이내 화운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화운이 화를 낼 일이 아니었다.

“…아니다. 아니야. 아무래도 내가 어제 일로 아직 조금 예민한 모양이야.”

“아….”

“괜히 목소리를 높여 미안하구나.”

화운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아진에게 사과의 말을 뱉고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사실 아진의 말은 정말로 하나 틀린 것이 없다. 하운 같은 천민 고아는 밖에서도 사람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데 하물며 이곳 황실에서야 말해 무엇 할까. 말이 좋아 시위지 천민의 신분으로 황제의 은혜를 받아 들어온 자신은 고위 관직자의 자제인 다른 시위들과는 근본부터가 달랐다.

윗전의 말 한 마디에 죽는다고 한들 억울하다 항변할 수조차 없는 처지에 아진의 말대로 연빈마마의 목숨을 구하고 죽었다면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복이라 하여도 달리 할 말이 있을 수가 없다.

시신을 거두어 갈 가족조차 없으니 아마 대충 수레에 실고 나가 산중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묻어 두었겠지. 그 생각을 하니 안 그래도 복잡한 심상이 더더욱 어지러워 습관처럼 다시 한숨을 쉬려고 하였을 때.

화운은 문득 제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벌벌 떨고 있는 아진의 모습을 보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진이 머리를 조아리며 울먹였다.

“마, 마마… 제가…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셔요, 마마….”

“가, 갑자기 왜 이러십니…! 아니, 왜 이러느냐. 일어나거라…!”

“아닙… 아닙니다, 마마. 천것이 되어 감히 마마께서 하시는 사과를 듣다니요…. 소인이 잘못하였습니다…. 잘못하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아진의 행동에 화운은 너무 놀라 말도 잇지 못하고 있는데 아진은 이제 아주 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으며 읍소를 하고 있는 판이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아진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 유추하자니 조금 전 화운이 아진에게 미안하다 사과를 한 것이 큰 문제인 듯했다.

그제야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세상 어느 주인이 자신의 시녀에게 사과를 한단 말인가. 설령 그 주인이 정말로 잘못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세상천지에 아랫것에게 사과하는 주인은 찾기 힘들 터였다.

하물며 연화운이라면. 시녀의 목숨 알기를 길가의 들풀만큼이나 하찮게 여기는 그였다면.

화운은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애써 목소리를 차분하게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되었다. 그만 일어나라….”

“마마…”

“너를 탓하려고 사과를 한 것이 아니야. 울지 마라.”

허나 화운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부드럽게 저를 다독이는 목소리에 아진은 더더욱 당황할 뿐이었다.

그의 주인 연화운이 누구인가.

그로 말할 거 같으면, 이른 아침 새소리에 잠을 깨고선 제대로 푹 자지 못하여 피부가 상해 폐하께오서 내 얼굴이 보기 싫다 하시면 어찌 하려고 일을 이리도 엉망으로 하냐며 새를 제대로 쫓지 못한 죄를 물어 어린 궁녀들에게 모조리 매를 쳤던 인물이다.

그는 황제가 저의 처소를 찾지 않는 이유조차도 주변 아랫것들의 탓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포악한 성질의 소유자였으니, 그런 이의 입에서 나오는 미안하단 사과는 곧 내가 지금 당장 너를 갈가리 찢어죽일 것이라는 포효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아진은 제가 무엇을 잘못한 건지 알지 못했다. 오히려 화운의 기분을 맞추려 죄도 없이 억울하게 죽은 시위에게 마음에도 없는 막말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진은 저의 주인에겐 그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인 걸 잘 알았다. 그가 원한다면 시녀 따위는 숨을 쉬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매질을 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연화운이. 그러한 주인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아진의 앞에서 더없이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갑자기 이러하는 것이 너도 당황스럽겠으나….”

“…….”

“내가 죽다 살아나질 않았느냐. 당장에는 너도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내 마음이 이전과는 같지 않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구나.”

제 주인이 이리 다정한 음성을 할 수도 있는 사람인 것을 아진은 처음 알았다. 사가에서 화운을 처음 모시던 날부터 지금까지 제 주인은 언제나 퉁명스럽게 말을 하는 사람이었던지라, 그가 사실은 대단히 아름다운 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도 아진은 거의 잊고 살았다. 물론 황제의 앞에 있을 때야 화운도 간드러지게 말을 한다지만 아진에게는 그조차도 거부감이 이는 목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헌데 지금은. 지금 저에게 차분히 나긋한 음성으로 말을 건네 오는 화운의 음성은 꼭 천성이 다정한 이의 그것과도 같아서.

아진은 절대로 제 주인과 눈을 마주쳐서는 안 된다는 저의 철칙도 잊고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들어 화운을 바라보고 말았다. 시선을 마주친 화운이 안타까운 얼굴로 쯧, 하고 혀를 한 번 차고는 치장을 위해 옆에 준비해 두었던 부드러운 손수건을 집어 아진에게 내밀었다.

“이제 그만 울고 어서 채비를 해다오. 폐하께서 오신다고 하질 않았니.”

“아…! 예, 마마. 예!”

아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아진이 내민 손수건을 두 손으로 받아 쥐며 몸을 일으켰다. 마마께서 연못에 빠져 정신을 잃고 있을 땐 그가 일어나 저희들에게 부릴 패악질이 두려워 차라리 오래도록 깨어나지 못하기를 바라기까지 하였다. 헌데 하루 만에 눈을 떠 아진을 실망시킨 주인은 어제부터 자꾸만 이리 다른 사람 같은 일을 하니 아진의 심경도 더없이 복잡하기만 했다.

“우, 우선 머리부터 봐드릴게요, 마마.”

하지만 사람의 천성이 어디 쉽게 바뀌겠나. 지금이야 죽을 뻔했던 충격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며칠이 지나지 않아 돌아올 것이 분명하니 이런 몇 마디 말에 마음을 놓아서는 아니 될 일이다. 아진은 더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다짐하며 조심스럽게 화운의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폐하께서 오시면 상황은 악화될 것이 자명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