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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운은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며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렸다. 온몸이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채로 물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아프고 무거웠다. 적지 않은 수련으로 단련된 하운은 웬만큼 아플 때도 이렇게까지 엉망인 몸 상태로 잠에서 깬 적이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잠들기 전 몸살 기운이라도 있었던가, 기억을 되짚어 보던 하운이 불현듯 눈을 크게 떴다. 정신을 잃기 전 벌어졌던 일이 번뜩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마마! 이제 정신이 드시옵니까!”
놀란 하운이 누워 있던 몸을 다급히 일으키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급하게 일어난 탓인지 잠시 앞이 핑글 돌았다. 이조차도 하운에게는 이전에 없던 일이다. 이마를 짚은 채로 다시 눈을 깊이 감았다 뜨자 그제야 눈앞의 풍경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가 일어나 앉은 침대의 앞에 몇 명의 궁녀들과 어린 내관들이 무릎 꿇은 것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하운에게도 낯이 익은 정안궁의 사람들이었다. 기억이 떠오른 하운이 서둘러 입을 열어 물었다.
“마마께오선 괜찮으십니까?”
정안궁을 지키는 시위 중 하나인 하운은 평소처럼 정안궁을 순찰하다 화원의 연못에 빠진 연빈마마를 발견했던 것을 분명히 기억했다. 정안궁은 오래전 당대 황제의 엄청난 총애를 받던 후궁을 위해 새로 지은 궁으로, 연못 또한 황제가 가진 총애의 깊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크게 만들어져 거대한 크기는 물론이고 수심 역시 깊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달리 수영을 배운 적이 있다면 모를까 몸을 제대로 써 본 적도 없을 후궁이 홀로 빠져나오기는 당연히 어려웠다. 그를 모시는 궁녀들 중에서도 물에 빠진 이를 구해낼 만큼 능숙하게 수영을 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은 없었는지 다들 밖에서 마마를 부르며 소리만 지르고 있기에 다급해진 하운이 연빈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던 것인데.
그랬는데.
기억은 마치 나가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물속에서 하운을 밀어내며 발버둥 치던 연빈마마와 실랑이를 벌이던 즈음에서 흐릿해져 있었다. 눈을 뜬 것을 보면 다행히 죽진 않은 모양인데. 하운은 어쩐지 저의 물음에 대답도 없이 사색이 되어 떨고 있는 이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설마 내가 마마를 구해내지 못하고 혼자 살아나온 것인가. 그런 불안함이 든 하운이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마마… 마마께오서도 깨어나셨습…?!”
“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하지만 하운은 말을 제대로 끝을 맺을 수 없었다. 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궁녀들이 이내 “마마…!” 하고 울부짖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히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마마께 변고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하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성정이야 어찌 되었든 아직 어린 마마께서 이렇게 하루아침에 일을 당하셨다니 절로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운이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 다잡으며 자세한 정황을 물으려 하자 불쑥 그의 곁으로 다가온 궁녀 하나가 팔을 붙들며 눈물 젖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마. 혹여 머리가 아프십니까? 기억이 잘 나지 않으세요?”
“어, 어찌 제게 이러십니까!”
갑자기 저의 팔을 붙들어오는 궁녀의 태도에 더 깜짝 놀란 건 하운이었다. 하운은 황급히 궁녀의 팔을 털어내며 침대에서 몸을 펄쩍 일으키고는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빈마마의 일로 낭자께서 놀라셨을 것은 알지만 제게 이리하시는 건 법도에 맞질 않습니다. 진정하시… 고….”
하운이 불현듯 이질감을 느낀 건 그 자신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기 시작한 그 순간이었다. 하운은 비록 음성이 굵은 사내는 아니었으나, 지금처럼 목소리를 근엄하게 꾸미면 제법 무게감을 가질 수 있는 보통 사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헌데 지금 저의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는 어떠한가. 그것은 영락없이 미성이라고 불릴 만한 곱고 고운 음성이었는데 하운은 누가 이것과 꼭 닮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마마, 어찌 이러십니까. 여봐라! 어서 태의를 모셔 오거라! 아무래도 마마께오서 너무 큰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다!”
하운은 하염없이 흔들리는 시선으로 아까부터 저를 향해 마마라고 부르고 있는 궁녀를 바라본다. 그는 연빈의 측근 궁녀로 하운과도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 아진이었다.
꿈인가. 아직 꿈에서 깨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하운은 시선을 내려 제 몰골을 살폈다. 아래로 저의 발끝을 찰랑거리며 가리고 있는 고운 치맛자락이 보였다. 손을 들어 보자 살결을 부드럽게 스치며 얇고 기다란 소매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어떻게 보아도 시위가 입고 있을 만한 옷은 절대로 아니다. 드러난 손은 더 말할 것도 없이 평생 검 한번 쥐어 본 적이 없는 이의 모양이었다.
“이게… 도대체 이게….”
주변에서 소란을 피워대는 이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아득해졌다. 차가웠던 물속의 온도. 제가 잡으면 다시 뿌리치기를 반복하며 발버둥을 치던 연빈. 간신히 그를 붙들어 연못의 가장자리로 나왔을 때 다시 한 번 그가 몸부림을 쳐 돌을 밟고 올라서려던 발이 미끄러졌고 그렇게 돌에 머리를 부딪쳤던가, 아니었던가.
하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물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숨이 차올라 가물거리는 시야에 저만치 탁자에 놓인 경대가 보였다. 하운은 여전히 저를 마마라 부르는 목소리들을 뒤로하고 간신히 걸음을 옮겨 그 앞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마침내 거울에 저의 얼굴을 비춰 보았을 때.
하운은 그곳에서 제게도 이미 익숙한 얼굴 하나를 보았다.
안국 황실 유일의 남후궁. 그 미색은 쉬이 따를 자가 없다 할 만큼 아름다우나 타고난 성정이 경박하고 모질어 일찍이 황제의 눈 밖에 난 사내. 그럼에도 매일 황제의 총애를 구걸하다시피 하며 자존심도 무엇도 다 버리고 오로지 황제 하나만을 쫓고 또 쫓는 빈. 모든 궁인들이 두려워하여 가장 기피하는 윗전이자 그의 처소인 정안궁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뺨이 부어오른 어린 궁녀들이 울며 나온다는 소문의 주인공.
연빈, 연화운.
정안궁 시위 하운은 그렇게 연화운의 모습을 한 채 그곳에 서 있었고, 하운은 그만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하아….”
“마마, 어찌 그리 한숨을 쉬십니까. 혹여 아직도 몸이 안 좋으십니까…?”
마마, 소리에 고운 옷자락을 걸치고 있는 사내의 마른 어깨가 한 번 움찔 떨렸다. 그래. 마마지. 이제 내가 마마라고 불리는 사람이지. 지난밤이 다 새도록 스스로에게 그리 수도 없이 주입했지만 역시 하루아침에 적응하는 건 무리였다.
혹시나 저들이 모시는 주인이 ‘예전처럼’ 몸이 안 좋고 기분이 별로라는 이유로 자신들에게 매질이라도 할까 잔뜩 주눅이 들어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궁녀들을 보자니 더더욱 심기가 어지러웠다. 사내는, 그러니까 하운이자 이제는 화운이 되어버린 이는 다시 한 번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삼켜내며 입을 연다.
“그런 것이 아니니 걱정할 것 없다.”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저의 목소리며 말투 역시 어색한 건 마찬가지다. 그는 살면서 한 번도 이토록 고운 음색을 지닌 적이 없었다.
“그저… 마음이 갑갑하여 그러니….”
결국 참지 못한 하운, 아니 화운이 다시 한숨을 내쉬고 만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봐도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자면 도무지 한숨을 멈출 수가 없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아무리 세상사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는 게 빈번하다고 하여도 어찌 제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단 말인가. 일어나면 모든 것이 꿈이길 간절히 바라며 지난밤 눈을 감았으나 악몽에 시달리다 눈을 뜬 아침에도 여전히 바뀐 것은 없었다. 화운은 도무지 이 일을 어찌 헤쳐 나가야 할지 막막할 뿐이었다.
“마마, 오후에 폐하께오서 들르신다 하셨는데… 치장은 아니 하십니까?”
아까부터 잔뜩 주눅 든 얼굴로 곁을 지키고 있던 궁녀 아진이 초조하게 다시 말을 붙인다. 화운이 사가(私家)에서 데려온 시녀인 아진은 화운이 하운일 적에도 줄곧 보아온 존재였으나 지금의 상황에서는 한없이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화운은 잠시 말없이 시선을 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화운의 곁에 선 아진은 살살 눈치를 보며 생각에 잠긴 제 주인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큰 곤욕을 치르는 바람에 창백하게 질린 채로 곱게 눈을 내리깐 그의 얼굴은, 아무리 제 주인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아진이라도 순간적으로 시선을 뗄 수가 없을 만큼 미색이 대단했다.
본래 아진의 주인은 잠옷 하나조차도 화려하지 않으면 어깨에 걸치지 않는 이였다. 헌데 간밤엔 무슨 변덕이었는지 온갖 화려한 잠옷들을 질색하며 제발 수수한 옷으로 바꿔 달라고 하여 야밤에 궁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평소 황궁의 어느 여인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화려한 치장을 할 때에도 그러했지만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을 하고 연빈이 입기엔 너무나도 수수한 연한 분홍의 잠옷 하나만 걸치고 있는 모습은 가히 호숫가에 떨어진 가련한 선녀라고 하여도 믿을 만큼 고아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창백한 흰 뺨으로 흘러내린 붉은 기 어린 머리카락은 또 어떠한가. 아진의 주인은 본래 남후궁이라는 위치와 그 가공할 만한 미색, 그리고 미색이 전부 퇴색되어 버리도록 만드는 고약한 성질머리로 유명했지만, 그의 검은 머리카락에 은은하게 도는 붉은 기운은 화운이 가진 특별한 것을 이야기할 때 대부분 앞다투어 손에 꼽곤 하는 특색이었다.
그런 얼굴에, 그런 자태를 가지고, 평소와는 다르게 포악질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겨 있는 화운은 단연코 천하제일미라 하여도 손색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에게 누구보다 괴롭힘을 많이 당하였던 아진까지도 이렇듯 멍하게 정신을 놓고 바라보도록 만들 정도이니 하여간에 연빈은 마음씨야 세상 제일로 고약하여도 얼굴만큼은 따를 이가 없을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