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4화
번쩍!
“……허억!”
하루 동안 쥐 죽은 듯 앉은 채로 고정되어 있던 송운의 눈이 뜨였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서 악취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드디어 일어난 것이냐?”
곁에서 손톱을 다듬고 있던 소천광이 무심한 눈빛으로 송운을 바라보았다.
“선배님! 얼마나, 얼마나 지났습니까?!”
“무엇이 말이냐?”
“제가 이렇게 보낸 시간 말입니다!”
“쯔쯔, 이놈아 진정부터 하거라. 이제 겨우 하루가 흘렀을 뿐이다.”
“아…….”
소천광의 말에 그제야 송운은 뛰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벌떡 일으켰던 몸이 다시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몸은 수면에 빠졌지만, 그의 영혼은 세상을 떠돌았다.
그리고 세상을 보았다.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 따위가 아니었다.
세상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동물과 식물들이 송운의 시야에 모두 들어왔고, 그들이 보는 것을 같이 보고 느꼈다.
작은 나뭇가지가 꺾이는 고통, 길가에 놓인 돌이 차이는 고통. 어떠한 곳에선 온통 불에 타들어 가거나, 온몸이 쥐어뜯기는 격통까지도 느꼈다.
그 짧은 시간이 마치 억겁과도 같은 기분이었다.
한데 고작 하루의 시간이 흘렀다 하니 송운의 입장에서는 참 다행인 셈이었다.
“그래, 무엇을 보고 느꼈느냐? 하릴없이 잠만 잔 것은 아니겠지? 낄낄.”
장난기가 묻어 나오는 소천광의 말에 송운이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세상을…… 보았습니다.”
말을 멈춘 송운이 손을 들어 허공을 어루만졌다.
그는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그러자 그동안 느낄 수 없었던 기의 파동들이 손끝에 퍼졌다.
꿀꺽.
‘이것은 대체 무엇일까.’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셔 보거라.”
소천광의 말에 송운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주변에 맴돌고 있던 기운들이 송운과 함께 동화되어 갔다.
“……?!”
점차적으로 생기는 변화에 송운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여태껏 해 왔던 것처럼 자연의 기를 쥐어짜듯 끌어모으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자연의 일부분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단숨에 남은 선천지기가 모두 끝까지 들어차면서 생명의 충만함을 느꼈다.
“이건……?”
“흐흘, 그 정도로 무얼 그리 놀라느냐? 난 네놈이 더 놀랍거늘. 운이 네가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선천지기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너로서는 그야말로 최상의 몸이 된 게지.”
소천광이 마치 신비한 것을 보듯 송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 모든 것은 선배님의 은공이십니다.”
“낄낄, 그것이 어찌 나의 은공이냐. 네가 올바르게 살며 쌓은 선업이 이제야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게지. 아이고, 삭신이야! 이제 나는 할 일을 끝마쳤다.”
소천광의 목소리에서 무게감이 점차 사라졌다.
가볍지만 마냥 가볍지만도 않았다.
이승의 것이 아닌, 성스러운 힘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님.”
동시에 송운의 음성이 촉촉이 젖어 왔다.
이제 그를 보내야 할 때가 된 것임을 직감한 것이다.
소천광의 입가에 무슨 의민지 알 수 없는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높디높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한다. 생각보다 더 빨리 나를 끌어당기는구나.”
“……부디 가시는 길 조심히 가십시오.”
송운이 소천광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마음 같아선 구배지례를 올리고 싶으나, 그것이 선배님의 갈 길을 붙잡게 돼서는 아니 되겠지.’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소천광은 송운에게 있어선 생에 첫 스승이나 다름없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진정한 가르침을 내리고, 유산을 넘겨준 첫 스승인 만큼 그 예를 갖춘 것이다.
송운의 마음을 읽었는지 소천광이 고개를 홱 돌렸다.
“이놈아, 다 떠나가는 마당에……. 에잉! 됐다. 절은 한 번이면 족하니라. 그러지 말거라. 이 늙은이의 우화등선을 방해라도 할 셈이냐? 나는 이미 이승의 미련을 다 털었느니라. 이젠…… 네 손에 달린 게야. 부디 이 중원을 잘 부탁한다, 운아.”
소천광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그러곤 천천히, 뿌연 운무에 가려지듯 그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가 서 있던 곳에는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휑할 뿐이었다.
이젠 정말 혼자였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내야만 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했습니다…… 스승님.’
소천광이 완전히 사라진 후, 유난히 밤하늘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마치 별이 그의 안부를 전해 오듯이.
第九章. 매듭을 짓다
소천광을 보내고 송운은 다시 세상으로 나아갔다.
본디 지닌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다.
여전히 거창한 이유 따위는 없었다.
떠나는 소천광은 중원을 지켜 달라고 했지만, 송운은 그저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하나, 숲에서 나온 뒤부터 조금씩 눈에 들어오는 모습들은 하나같이 송운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무의식이라고 생각했고, 그저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를 가든 불탄 흔적들과 타다 만 시신들이 잔뜩 널려 있었다.
생기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은 흔치 않았다.
훤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어둠에 휩싸여 있는 것만 같았다.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저들이 만약 자신의 가족이었다면?
실제로 전 중원이 이러한 상황이라면 가족들이라고 반드시 무사할 거라는 보장 따위는 없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으득.
“……독고백-!”
송운이 독고백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 * *
“꺄악! 안, 안 돼요. 안 돼-!”
“크흑…… 사, 살려 주시오…… 아니, 부디…… 부디 이 아이만큼은……!”
촤악-!
털썩.
갓난아기를 살리려는 젊은 두 부부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허공에 흩날리듯 사라졌다.
독고백의 손짓 한 번에 텅 비어 버린 두 사람의 눈동자는 이미 죽음에 이르렀음을 알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런 신파극이 제일 싫다. 끔찍해. 인생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어야 하는데 말이야.”
독고백이 땅으로 떨어지는 갓난아기를 받아 들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의 손이 작은 아기의 심장 부근에 닿았다.
두근두근.
살려고 발버둥 치는 아기의 심장이 세차게 뛰어 댔다.
반면, 아기의 얼굴은 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환하게 방긋방긋 웃고만 있었다.
‘……거슬려.’
독고백의 긴 검지가 아기의 심장을 꿰뚫으려던 순간.
아기가 사라졌다.
“멈춰라, 독고백.”
동시에 그의 귀에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자의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언제 뒤로 왔는지 눈치채기도 힘들었을 터였다.
독고백의 얼굴에 빠르게 놀라움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목소리의 주인의 품에는 방금 전까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어린 생명이 조심스레 안겨 있었다.
시종일관 굳어져 지독한 살기를 내뿜던 독고백의 표정이 처음으로 녹아내리며 부드러워졌다.
“……드디어 왔구나, 송운. 쿡쿡.”
“닥쳐.”
이를 악다물고 말하는 송운의 모습에 독고백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날 형이라고 부드럽게 불러 주던 그때가 제법 그립구나.”
“그 입 닥치라고 했다.”
“흐음, 상처는 좀 어떠하더냐? 그래도 급소는 비켜 갔…….”
파밧-!
독고백이 더 말을 잇기도 전에 송운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파바바바박!
독고백이 뒤에서 나타난 송운의 주먹을 막아 냈다.
순식간에 아이를 멀리 떨어뜨려 놓고 공격을 가한 것이다.
공격이 막히자 재빠르게 뒤로 물러난 송운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번 공격은 현재 자신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보기 위함이었을 뿐이다.
역시나 녹록지 않은 상대였다.
분명 기운을 완전히 눌러 없앤 후, 달려들었다.
한데도 독고백은 직감만으로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낸 것이다.
“역시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건가.”
하나 그런 송운과는 다르게 독고백의 표정은 더욱 밝아졌다.
‘송운! 역시 그사이 또 성장했구나!’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느꼈다.
독고백 본인이 느끼지 못한 기척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적어도 조금 전까지는 그러했다.
독고백이 희열감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자신의 감각을 속일 수 있는 자가 나타났다.
그것도 이제 겨우 이립도 되지 않은 자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이 될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
독고백 본인조차도 우주 아우르는 경지에 오르는 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연경에 머물렀던 송운이다.
조금 불안정한 기운이 보이긴 하나, 송운은 이제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선 것이다.
송운은 늘 그래 왔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한 단계씩 자신의 벽을 허물어뜨렸다.
자신의 추측이 옳았다는 생각에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도 독고백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두 눈동자 속에는 분노라기보다는 광기에 가까운 무언가가 비쳤다.
그런 독고백과 눈이 마주친 송운의 등에 소름이 우수수 돋아났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의 모습은 실로 괴기했다.
‘저건…… 광기다. 싸움에 미친 자야. 결과는 비뚤어졌으나, 무에 미친 자다.’
송운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동안, 독고백이 송운의 곁으로 다가왔다.
경계하며 송운이 뒷걸음쳤지만 독고백은 계속해서 그를 향해 다가왔다.
“이제야 정정당당한 싸움이 되겠구나, 운아.”
송운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 더러운 입에서 내 이름을 듣고 싶지 않다.”
“이런, 정말 서운하구나. 이 형과의 추억을 다 잊은 것이냐? 네가 이토록 클 수 있었던 것도 다 내 덕분이었다는 걸 정녕 모르는 게야?”
독고백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송운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그건 또 무슨 개수작이야?!”
“흐응, 개수작이라니. 널 위기에 몰아넣은 것도 나고, 그로 인해 네가 이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걸, 왜 모르는 것이냐? 본디 사람이란 곤경에 처했을 때와 적수가 있을 때 가장 강해지는 법이다, 동생아.”
“그럼 그 빌어먹을 흑야를 이끌어서 한 모든 일이…… 나 때문이란 말이야?”
송운의 자책감이 담긴 목소리가 떨려온다.
다행히 독고백이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 그건 아니다. 그건 애당초 널 위해서 준비했던 게 아니었어. 솔직히 말하자면 넌 우연히 굴러들어온 아이였지.”
“그럼 그렇게까지 한 연유가 대체 뭐야!”
“그야…… 재밌으니까?”
“……하?”
송운이 독고백의 말에 허탈한 듯 헛숨을 뱉어 냈다.
“내 인생은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그런 나의 공허한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 난 그저 싸움이 하고 싶었을 뿐이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날 뛰어넘는 무인은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지. 내가 직접 나와 대적할 만한 무인을 키워 내겠다고 말이야.”
어쩜 저리 어처구니없는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혈교는 복수를 꿈꿨고, 그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꿈꿨다.
그건 화산파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독고백에게도 무언가 거창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송운에게는 그저 허탈함을 안겨 줄 뿐이었다.
“더 이상 이런 개 같은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다. 독고백.”
송운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실컷 발버둥 쳐 보거라, 운아. 그래야 내가 더 즐길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