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3화
서로의 다짐이 있었던 뒤 하루가 지나가도록 소천광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전수해 주겠다던 근엄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심지어 인간의 가장 기본이 되는 먹고 자는 것, 싸는 것도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부드러우나 온몸에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소천광은 그저 운기조식 자세를 취하고서는 입을 꿋꿋이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죽은 사람과도 같았다.
상황이 그러다 보니 멍해지던 송운 또한 가부좌를 틀었다.
그저 소천광이 하는 대로, 따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아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새들의 움직임과 주변 동물들의 발자국 소리, 작은 바람의 바람길까지도.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몸에 느껴졌다.
아니, 그저 느껴지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그대로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고 보였다.
마치 내가 세상의 일부가 된 것처럼.
자신의 생각이 사라지고 자연의 것 그대로를 받아들여졌다.
마음이 온 만물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 * *
중천에 뜬 해가 훤한 새벽의 달이 되고 다시 해가 뜨고 또다시 달이 저무는 시간까지도, 둘은 그렇게 세상과 함께 멈추어 있었다.
아무런 미동 없이 꼬박 사흘 밤낮이 흘렀다.
그야말로 그저 무의식에 의해, 시간에 의해 흘러가는 대로 보냈을 뿐이었다.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갈 길을 잃고 목표를 잃은 채 말이다.
똑-!
아침 이슬 한 방울이 송운의 콧잔등을 간지럽혔다.
“헉!”
그제야 송운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이 들었다.
그와 함께 몸과 마음에 걱정이 물 밀려오듯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젠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는 압박감이 송운의 마음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대체…… 대체 난 사흘 동안 무엇을 한 것이지?’
어찌하여 모든 것을 전수해 주겠다던 소천광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먹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그저 앉아만 있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자신은 어찌하여 그것에 동조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몰려드는 자괴감에 송운이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때였다.
뒤통수가 싸늘해지며 무언가가 빠르게 날아왔다.
쐐액-!
팍!
“서, 선배님?”
작은 돌멩이.
그것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소천광이었다.
“이제 정신이 드느냐?”
“예?”
“진짜 정신이라는 것이 드느냔 말이다.”
사흘 동안 꼬박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질문이었다.
어쩐지 대답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 묻고 싶은 질문은 많았지만, 저도 모르게 먼저 답부터 흘러나왔다.
“예? 예. 정신은 멀쩡합니다.”
송운은 대답을 하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도 소천광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진짜 정신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송운의 표정을 그대로 읽은 것인지 소천광이 길을 틀었다.
“흘흘…… 그렇다면 질의를 바꾸어 보마. 사흘 동안 지켜본 나는 어떠해 보였느냐?”
그 뒤로도 소천광의 질문은 송운이 답을 하건 못 하건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제야 차린 정신이 다시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보낸 사흘은 어떠하였느냐?”
“……적막. 그 자체였습니다.”
처음으로 송운이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는 순간이었다. 송운의 말이 흥미로운지 소천광은 그에게 귀를 가까이 댔다.
“호오, 적막? 적막이라 함은 어떠한 것이냐?”
“으음…… 그것은 마치 그냥 길가에 놓인 돌멩이가 된 것 같았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숨을 쉬고 있지만 뭔가 동떨어진 듯하며, 아무런 생각이 없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송운의 말대로다.
유일하게 한 행동인 운기조식 역시도 몸을 역동적으로 움직인다거나 하는 행위 따위는 없었으니 돌멩이와 다를 바가 무엇일까.
그렇다고 바람에 흔들린 것도 아니고, 돌처럼 그 자리를 지키며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숨만 쉬며 있었을 뿐이다.
그제야 소천광의 표정이 미묘하게 밝아졌다.
소천광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헛된 시간만 보낸 것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구나. 으흘흘흘! 이 늙은이의 괜한 사념이었던 게야. 내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보았어. 아니, 아니지. 이건 하늘이 내린 놈이로다!’
속으로 혼자 실컷 웃던 소천광이 입을 뗀 건 송운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볼 무렵이었다.
“크흠, 뭘 그리 뚫어져라 쳐다보느냐? 이 늙은이 아직 안 미쳤다. 아주 멀쩡하다, 이놈아!”
따악!
또 한 번 그의 알밤이 송운의 이마를 향했다.
하지만 곧 제법 억울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송운을 향해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날렸다.
“아자야. 태극이라는 것은 일원(一元)이다. 알고 있느냐? 이는 음과 양의 완벽한 조화를 말하는 것이야. 또한 만물의 근원이기도 한 것이지. 하여 정확하게 말하자면 애초에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로 양측이 맞물려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느니라.”
‘양측에 맞물려 있는 것……?’
잘 듣고 있던 송운의 표정이 의아해지자, 소천광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눈빛을 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즉, 이건 음과 양이 합쳐져 태극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태극으로부터 음과 양이 따로 떨어져 나간 것이라는 게지. 그것이 이 소천광이 얻은 무리이다.”
“……!”
송운은 소천광의 말을 듣자 머리가 띵해져 옴을 느꼈다.
‘태극은 애초부터 하나였다……?’
그것이야말로 정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것이다.
본디 음(陰)과 양(陽)은 천(天)과 지(地)요, 남(男)과 여(女), 일(日)과 월(月) 등을 뜻하는 바로써 두 개의 것을 의미한다.
한데 이것을 두 개로 쪼개서 보는 것이 아니라 본디 하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둘로 갈라져 있던 것이 합쳐졌다고 생각했지, 둘이 처음부터 하나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하나 듣고 보니 그 역시 맞는 말이다.
송운이 뻐근해진 뒷골을 잡고 주물렀다.
“본 파의 조사께서는 본디 도를 연구하시는 학도이셨다. 하나 결국 이 역시 만류귀종(萬流歸宗)임을 깨달으셨던 것일 게야. 비루한 내가 그분의 뜻을 모두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나, 어렴풋이나마 그것을 깨닫고 나니 우화등선의 희미한 줄을 잡을 수 있었느니라.”
만류귀종.
꽤나 오래전 송운 역시 같은 것을 깨달은 적이 있었다.
모든 것은 모두 일맥상통한다.
학문과 의술.
그리고 무공의 뜻을 익히면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는 것. 하나 이것을 토대로 한다면 그것과는 조금 다른 만류귀종이다.
“결국 학문도, 학도도, 무도도. 전부 모두 같은 곳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송운의 말에 소천광이 두 무릎을 탁 하고 쳤다.
“그렇지! 다시 말하지만 애당초 그것들은 둘에서 하나가 된 게 아니라 모두 하나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이라는 말이다.”
이미 오래전에 깨달았던 말이지만, 이건 또 다르다.
만류귀종.
일원.
태극.
“……그 모든 건 같은 시초였다…….”
중얼거리듯 단어 하나하나를 읊조리던 송운의 눈빛이 멍해져 오기 시작했다.
번쩍-!
동시에 몸에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은 곧 송운의 주변을 동그랗게 감싸며 단단하게 굳어졌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선천지기가 보호막을 친 것이다.
이는 머지않아 깨달음을 얻고 한 발자국 더 앞으로 앞서 나가리라.
“허허…… 허허허허! 이놈이, 결국 이리되는구나. 참으로, 참으로 다행이야. 원시천존.”
소천광이 들뜬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흘이란 아까운 시간을 이리 멍하니 보낸 것은 순전히 송운이 스스로 그것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었다.
흔히 말하는 도박을 한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어렵지만, 또한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앞으로 더 나아가는 길은 수련으로는 깰 수 없는 경지였다. 이미 자연경을 익힌 무인이 우주경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 경지를 마음의 눈으로 먼저 느끼고 보아야 한다. 그것조차도 느끼고 깨닫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자신은 그 길을 이끌어 주는 이가 없어 그 오랜 세월을 걸치며 홀로 아득바득 기어 올라왔다.
한데, 다행히도 이 똘똘한 놈은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송운아. 네놈이 이 암흑에 둘러싸인 중원의 희망이니라…….”
말을 마친 소천광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알을 깨고 스스로 나오려는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 새처럼, 당금부터 소천광은 송운의 곁을 지킬 것이다.
‘부디 늦지 않아야 할 터인데…….’
어느덧 무심한 하늘은 또다시 어둠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 * *
“송운은 아직인가.”
독고백이 혼돈 속에서 불타 들어가는 마을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독백을 맞받아친 것은 홍월림이었다.
“……죽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절벽에서 그 상처를 입고 떨어졌습니다.”
홍월림의 말에도 독고백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죽었을 리 없지. 아직 그의 별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몇 날 며칠 동안 밤마다 하늘을 들여다보았다.
미래를 읽는 눈은 거의 기운을 다했기에, 더는 보이지 않았다. 하나 아직까지 천문을 읽는 그의 능력은 그대로다.
송운의 별은 건재하다.
잠시 희미해진 적은 있어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주 잠시 스스로의 능력을 의심하여 정말 송운이 죽었을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지만, 금세 접어 버렸다.
그럴 리 없다.
태생이 질긴 자다.
독고백의 손에 주먹이 꽉 쥐어지며, 피가 타고 흘렀다.
‘송운. 도대체 죽지도 않고선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게냐? 네가 지키려 아등바등 노력했던 세상이 이토록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이미 중원은 폐허가 되어 가고 있었다.
혈교가 훑고 간 상처가 채 낫기도 전에 또다시 피바람이 불었다. 그나마 멀쩡했던 동쪽도 독고백의 손에 의해 피폐해졌다.
하나 그런 독고백이 온 천하를 휩쓸고 다니면서도 유일하게 건들지 않은 곳이 있다.
바로 황제가 머무는 도성.
북경이다.
하나 단순히 황제가 머물러서는 아니었다.
그곳에는 송운의 가족이 있다.
독고백이 쌓아 둔 최후의 선이다.
이미 중원은 무림맹의 주축을 잃고 휘청거리고 있다.
한 번의 손짓으로도 모두 다 죽일 수 있는 독고백으로서는 무림맹에 흥미를 잃어버린 지도 오래다.
단지 그가 당금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시 돌아올 송운이다.
그는 여태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성장해 왔다.
생각지도 못하게 나타나 여태껏 자신의 기대를 단 한 번도 배반한 적이 없는 자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는 독고백의 기대가 아직까지 중원을 살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 그 시한도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독고백의 새빨간 입술이 파르르 떨려 왔다.
분노인가.
초조함인가.
불타오르던 마을에 독고백이 바람을 불어넣었다.
화르륵!
작게 번져 나가던 불들이 곧 전체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 주야 후. 북경으로 향할 것이다.”
“예, 주군. 채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