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2화
“……예?”
송운의 검고 깊은 눈동자가 요동쳤다.
목소리 역시 미세하게 떨려오고 있었다. 무림맹이 당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설마 맹주님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어찌 그분께서……!’
송운이 애써 아닌 척 부정하려 하였으나 노인의 표정이 처음으로 진중해지는 것을 보고 직감했다.
이는 사실이다.
“뭘 그리 머리를 굴리느냐. 말 그대로다. 맹주가 죽었다는 말이다. 네놈이 편히 누워 자빠져 있는 사이에.”
툭-
쨍그랑!
기어코 송운이 들고 있던 죽 그릇이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충격적인 말과는 다르게 노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깊은 슬픔과 탄식이 잠겨 있었다. 하나 역시나 충격에 빠져 있던 송운이 그것까지 신경 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백능이 그놈, 오래 볼 줄 알았더니만 이리 허망하게도 먼저 갈 줄이야…….’
노인의 눈동자에 먼저 간 백능의 모습이 아련하게 그려졌다.
가기 전 마지막으로 꼭 그에게 들르려 했건만, 자신보다 먼저 머나먼 곳으로 떠나 버렸다.
문득, 혈교와의 전쟁을 끝내고 모든 것을 그에게 떠넘기듯 하고 무림맹을 나왔던 그 날이 떠올랐다.
* * *
“……정녕 떠나시는 것입니까?”
백능의 목소리가 몹시 서운한 듯 아련했다.
그런 그를 잘라 내지 못하면 필히 붙잡힐 것이라 여긴 노인이 혀를 차며 말했다.
“에잉, 그렇대도. 나는 이미 늙은 몸이다. 이것 보거라.”
그러곤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팔을 붙잡고선 엄살을 피워 댔다.
“아! 아이고- 삭신이야!”
누가 보아도 아직은 멀쩡한 노인을 바라보는 백능의 눈빛에 난감하면서도 웃음이 감돌았다.
그의 꾀병임을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놈아, 이 지겨운 자리 십 년 해 먹었으면 충분하지 않겠느냐? 남은 삶도 살며 못다 닦은 도나 닦으며 살고 싶구나. 좀 부탁하마, 능아.’
노인이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백능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수없이 달고 살아온 말이었으니까.
“그리 가시고 싶으시다면 더는 막지 않겠습니다.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맹주님.”
“낄낄, 고놈 참. 누가 보면 내가 아주 먼 길을 떠나는 줄 알겠구나. 예끼! 너는 젊은 놈이 눈에 너무 근심걱정이 가득이야. 가끔 나보다 더 나이를 많이 먹은 것 같단 말이야. 애늙은이란 말이 딱 너에게 잘 어울려. 끙…… 떠나는 길이지만 그것 딱 하나가 걱정되는구나.”
“그걸 잘 아시는 분이 이리 매정하니 돌아서신 답니까?”
백능이 장난치듯 던진 말을 노인이 맞받아쳤다.
“능아, 인생은 한 번뿐이니 적당히 즐길 줄도 알며 살거라.”
노인은 그 말을 하면서도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돌리고선 입을 비죽였다. 아마도 무림맹의 맹주로서 그 자리가 얼마나 억압받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리라.
그러한 자리를 떠넘긴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적당한 후계가 나타나면 맹주 자리도 넘겨 버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꾹 눌러 삼켰다.
* * *
소천광의 눈이 붉어졌다.
‘그때, 그 말을 꼭 할 것을…… 이 미련한 놈 같으니.’
그랬다면, 이토록 허망하게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코끝마저 빨개질 무렵.
노인이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이미 보낸 사람을 추모하고만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추모는 일을 끝내고 난 후에 해도 늦지 않으리라.
백능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노인의 눈빛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이 중원에서 그 빌어먹을 놈을 대적할 만한 이는 백능뿐이라 여겼다. 한데 그놈은 이미 명을 달리했다. 이대로 독고백이 날뛰게 놔둔다면 더는 이 무림에 희망 따위는 찾아볼 수 없을 게야. 뭐라도 해야 한다.’
노인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을 때, 송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표정은 평온했다.
처음부터 다치지 않았던 사람처럼 말이다.
‘……얼라리? 저놈 보게?’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노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 아물지 않았던 배의 상처가 전부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송운의 선천지기가 어느덧 절반 이상이 회복된 상태였다.
워낙 복잡한 고민을 하다 보니 송운의 상태가 어찌 변화되고 있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아니다. 그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도대체 어떻게 소모된 선천지기가 다시 차오를 수 있단 말이냐? 이런 말도 안 되는……!’
백수(白壽)에 이르는 제법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나,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괴이한 일이었다.
세상 그 누가 생명에 관련된 선천지기를 제멋대로 썼다 늘렸다 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나 그 일이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가 놀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독고백은 반드시 제가 막아야 합니다. 그러니 보내 주십시오.”
그렇다고 순순히 송운을 보내 줄 노인은 아니었다.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의 앞길을 막자 송운의 안면에 비장함이 비쳤다.
송운도 안다.
이미 그와 자신의 무에는 큰 격차가 있음을.
하나 그렇다고 하여 전 중원이 큰 위험에 빠졌는데 나 몰라라 내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 가족을 위한 일.
더 나아가 내 가족이 살 평안한 나라를 만드는 일.
그것이 송운이 가진 유일한 신념이며, 목표였다.
그렇기에 흑야를 쫓았고, 세를 키웠다.
그렇기에 혈교와 싸웠으며, 화산파를 무너뜨렸다.
만일 죽더라도 가족을 지키다 죽어야 했다.
딱!
그때, 노인의 딱밤이 시원하게 송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러곤 잔뜩 노기를 띤 채 외쳤다.
“이놈! 어르신 말씀하시는데 끝까지 듣지 못할까?!”
송운이 더는 말대꾸하지 않은 채, 곧바로 사죄했다.
“아…… 죄송합니다.”
그러자 되레 민망해진 것은 노인이었다.
송운의 반듯한 반응에 김이 빠진 듯 속으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허허…… 거 기운처럼 참으로 올곧은 놈이로다.’
참으로 신기하다.
어찌 이런 선한 놈이 도가 계열의 제자가 아닌 일반 무인일까? 선무당 놈들보다야 어쩌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참으로 탐이 난다.
이런 놈이 든든히 후대에 있었다면 걱정 없이 눈을 감을 수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소천광의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본 파에 인재가 있을 거라 생각하였고 그러길 바라였다. 한데 나의 생각이 짧았으니…… 본 파의 자만이었고, 오만이었지. 나는 무당파의 소천광(蕭天光)이니라.”
노인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순간, 송운의 낯빛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해도 단박에 제압한 것을 보아 심상치 않은 은거기인이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훨씬 더 높았다.
노응검제(怒鷹劍帝) 소천광!
무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봤던 이름이다.
무당파의 도인이었으나, 무림맹의 맹주의 자리에 추대되어 도호를 버리고 환속한 전대의 고수.
이마저도 내려놓고 꽤 오래전 모습을 감춘 고수였다.
다시금 도를 추구하기 위해 몸을 감추었다 하였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소천광과 함께한다면 독고백을 이길 수도 있을 것이다.
죽어 가던 희망의 빛이 다시 활활 타오르는 순간이었다.
송운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대선배님을 뵙습니다!”
“쯧, 그런 허례허식을 듣고자 밝힌 것이 아니다.”
소천광이 조금 민망한지 귓불을 만지며 고개를 돌렸다. 송운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선배님을 돕겠습니다. 부디 독고백을 막는 데 함께해 주십시오. 후대가 이리 부탁드립니다.”
간곡히 청하는 송운의 말에 소천광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얼마간의 침묵이 이어졌을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소천광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도 마음 같아선 그리하고 싶다.”
“……?”
거절처럼 들리는 그 말에 송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소천광이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주름진 입가에 고소를 품었다.
“한데 나는…… 이미 우화등선을 앞둔 몸이니라. 즉, 인세의 일에 끼어들 수가 없는 위치란 말이다.”
“……아.”
커져 가던 희망의 빛이 다시 작아지는 순간이다.
그때, 소천광의 목소리가 송운의 귓가를 강하게 때렸다.
“그러니 이제부터 내가 깨달은 묘리와 조사(祖師)의 무리를 모두 네게 전해 주려 한다.”
“예?”
송운은 순간 자신이 잘 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무당의 조사라면 장삼봉을 뜻했고, 그의 무리라면 무당파의 뿌리 깊은 비기와도 같은 것이 아닌가?
한데 어찌 그러한 중요한 것을 생판 모르는 남인 자신에게 전수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 소천광의 눈빛에선 장난이라 하기엔 진심이 잔뜩 묻어 나오고 있었다.
“나라고 어찌 이 세상을 살리고 싶지 않겠느냐? 내 평생 몸담았던 중원이니라. 후세가 널리 안정되고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이야. 그러니 네게 내 모든 것을 전수해 주마. 너라면 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될 게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감히 얼굴을 내밀기 민망합니다. 대선배님 앞에선 그저 한없이 어리고 약한 말학일 뿐입니다.”
“아니! 너는 이제 그 누구보다도 너 자신을 믿어야 한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없음이야.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선경에 오를 것이고, 독고백이 얼마나 더 시간을 내줄지도 의문이다. 그러니 최대한 빠른 시간에 끝내야 한다. 아마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닷새뿐이다.”
꿀꺽.
송운의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부담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과연 그 짧은 시간 동안 우화등선을 앞둔 고수의 무리를 모두 다 소화할 수 있을까?
현경을 뛰어넘고 자연경의 경지에 오르기까지 벌써 십여 년의 세월을 소비했다.
일반적인 무인들을 생각하면 정말 빠른 속도였다.
아니, 여기까지 얼마나 많은 무인이 도달할 수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일반적으로라면 얻을 수 없는 기연에 기연을 거듭했기에 닿은 경지.
한데,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곳을 정말 닷새 만에 오를 수 있을까?
두근두근.
그런 걱정과는 다르게 송운의 심장이 조금씩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무인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순수한 무에 대한 갈증.
힘을 얻어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정말 그 힘으로 소중한 것을 지키겠다는 의지.
소천광은 너무도 순수해서 투명하게 빛나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흐흘, 마치 내 젊은 시절을 보는 듯하구나. 너라면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송운을 바라보던 소천광의 입가에 처음으로 인자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나는 인세를 떠나기 전, 세상의 모든 연을 끊기 위해 정처 없이 떠도는 처지였다. 한데 그러던 도중 막바지에 이르러 너를 만났고, 중원이 위험에 처했다. 운명이라는 놈이 얄궂게 새 인연을 만들어 주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내가 인세에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인 듯하구나. 최선을 다 하거라. 나 역시도 최선을 다하마.”
송운도 더는 거절할 도리가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 선배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송운의 두 눈에 마치 별이 박힌 듯 굳고 강렬한 의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