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1화
“맹주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오오! 맹주님!”
마치 바람 앞의 등불처럼 제대로 대항조차 해 보지 못한 채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져 가던 이들의 가슴에 새 희망이 들어찼다.
세 문파 무인들 모두가 백능을 향해 외쳤다.
“와아아아-! 맹주님이 오셨다!”
넓은 들판에 희망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선두에 서 있던 여위와 독비량, 그리고 당천립의 눈에도 백능이 보였다.
‘……결국 오셨구나.’
세 장문인 모두 참담한 기분이었다.
세 문파의 힘으로도 이겨 내지 못한 자.
벌써 두 번째다.
혈교의 대군과 이번엔 일무신 독고백까지.
그 결과는 무림맹의 맹주까지 불러내게 된 참혹한 신세다.
그들이 어떠한 기분을 느끼건 말건, 독고백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미 그의 관심사는 백능에게로 향한 지 오래였다.
흑색의 옷을 입은 독고백과 백색의 옷을 입은 백능의 눈이 마주쳤다.
선과 악.
악과 선.
마치 서로의 성향을 대변해 주는 듯 상반된 모습이었다.
“더는 아까운 목숨들은 그만 취하고 나와 겨루는 것은 어떻겠소.”
독고백의 새카만 눈동자가 백능의 전신을 훑었다.
“네가 이번 대 무림맹의 맹주구나.”
마치 뱀의 그것처럼 서늘한 시선이 백능의 목을 옥죄어 왔지만, 밀쳐 내며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맞소이다. 백능이라 하오. 당신이 바로 그 일무신, 독고백이구려.”
“호오? 제법이구나. 역시 맹주는 맹주라는 건가.”
그런 백능의 모습에 독고백이 새로운 장난감을 본 마냥, 호기심에 눈을 빛냈다. 아직까지는 단 한 명도 피해 내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뭐 어차피 이렇게 직접 마중 나오지 않아도 무림맹까지 찾아갈 생각이었지만, 굳이 찾아갈 수고를 덜어 줘 고맙구나.”
쌔애액-!
말을 끝내기 무섭게 독고백이 백능을 향해 검을 날렸다.
파사삭!
백능의 코앞까지 날아간 독고백의 목검이 허공에서 바스라졌다.
“쿡쿡, 역시. 여태껏 상대하던 조무래기들과는 달라. 그 녀석들은 너무 약해서 마치 가는 나뭇가지를 잘라 내는 것 같았거든. 안 그래도 슬슬 재미가 떨어지려던 참이었다.”
콰과과광-!
퍼벙!
몇 번의 공격이 오갔을까.
아직까지 멀쩡해 보이는 독고백에 비해 옷깃이 잘게 잘려 나간 백능이 이를 악다물었다.
“크으……! 어찌하여! 일무신이라는 이가 무인들을 죽이고 다닌단 말이오!”
“그거야 당연히…… 재밌으니까?”
무심한 듯 보이는 독고백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진심으로 살생이 즐거운 듯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멈추시오. 그렇다면 무림맹은 더는 일무신 그대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소. 이쯤에서 그만…….”
콰과광-!
백능이 독고백을 달래는 듯 말했지만, 독고백의 손에서 터져 나간 검기는 물러나 있던 무인 수백을 또다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에 백능이 더는 참지 못하고 사자후를 내뱉었다.
“일무신-!”
퍼엉-!
하나 이는 독고백의 근처도 가지 못하고 허공에서 분산되었다.
“일무신. 그거 이젠 너무 지겨워. 너무 오랫동안 들었더니 지겹다고. 내 이름은 일무신이 아니라 독고백이다. 너희들이 멋대로 붙인 이름으로 날 가두려 하지 마라.”
스스스스-
또다시 눈빛이 뒤바뀐 독고백이 이번엔 손에서 검고 빠르게 도는 기류를 만들어 냈다.
연기와도 같은 그것은 여러 갈래로 분리되며 구슬처럼 둥글게 뭉치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압축된 기의 구슬이었다.
파바바박!
카강!
펑!
“맹주님! 피하십시오!”
둘 사이로 뛰어든 여위의 묵주가 하나하나 그것들을 막아서며 공중에서 폭발했다.
그 여파는 어마어마하여 반경 십 리 정도 되는 공간을 모두 진동시켰다.
또한 몇 개는 그대로 여위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그러자 얼마 전 입었던 상처가 벌어지며 피를 쏟았다.
“쿨럭!”
“여 장로!”
“뭐하는 짓들이냐? 모두 피해라! 어서!”
백능이 외쳤고, 당천립이 재빠르게 여위를 안고 멀리 벗어났다.
“맹주님…… 맹주님을 도와야 합니다. 당 장로…… 크읍!”
“부디 가만히 계시오. 상처가 터지지 않소!”
서로를 챙기는 모습을 지켜보던 독고백이 붉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정말이지, 눈물겨워 못 봐주겠구나. 장난은 여기까지만 하자꾸나. 이런 신파극은 딱 질색이어서 말이다.”
구구구궁-!
말을 마친 독고백의 주변으로 엄청난 기파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빛이 번쩍이더니 독고백의 머리 위에 열 개의 검은 검이 떠올랐다.
“덕분에 조금은 지루함이 풀렸다, 무림맹주.”
천천히 움직이는 독고백의 모습은 느리지만 느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뿐.”
쐐애애액-!
파바바박!
맹렬히 돌아선 독고백이 검을 날렸다.
촤라락!
“맹주니임-!”
“……쿨럭.”
정확하게 백능의 심장에 다섯 자루가 꽂혔고, 나머지 다섯 자루는 둥글게 쳐진 검막마저 박살 낸 채 그의 오장육부를 갈가리 찢어 놓았다.
그렇게 땅으로 곤두박질친 백능의 눈에 짙은 죽음이 비쳤다.
곧, 세상에 어둠이 내렸다.
第八章. 마지막 희원(希願)
“으음…….”
미세한 신음이 송운의 입가를 타고 새어 나온다.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게냐?”
노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송운은 알아챌 수 있었다. 자신을 살리고 보살펴 준 이라는 것을 말이다.
순간, 송운과 노인의 눈빛이 마주친다.
한데, 송운의 눈에 들어온 노인은 조금 신비한 모습이었다. 분명 누추한 차림새였으나, 눈만큼은 마치 스무 살 청년처럼 단단하고 반짝였다.
단 한 번의 눈 마주침이었으나 송운은 느낄 수 있었다.
‘무인이로구나.’
노인의 몸 곳곳에 남아 있는 세월과 무공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보였다. 또한 잘 갈무리된 내기는 그가 정정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자, 어쩐지 독고백이 떠올랐다.
‘독고백…… 그것이 진짜 이름이라 하였지.’
꽈악.
송운이 왼손을 꽉 쥐었다.
그를 처음 만났던 그 날도 이랬다.
한없이 인자한 미소로 마음의 벽을 허물어 버렸던 독고백.
송운이 잠시 쓰린 기억을 삼키며 잠긴 목을 가다듬어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아, 저를 살려 주신 분…… 이시군요. 감사합니다.”
송운의 쉰 목소리는 간신히 말을 알아들을 정도였다.
“끙, 뭐 내가 딱히 살렸다고 볼 수도 없지. 애당초 네 의지로 스스로를 가두고, 네 의지로 다시 일어났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예끼! 젊은 놈이 이 늙은이를 놀리는 게냐? 당연히 네놈이 가장 잘 알겠지만, 기껏 그 정도 다쳤다고 닷새에 가까운 시간을 앓아누울 몸이 아니라는 것쯤은 너도 잘 알고 있을 터인데?”
“…….”
송운은 그 말에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사혈이 찔리길 했느냐? 아니면 사지가 절단되었느냐? 오장육부도 멀쩡하고, 단지 절벽에서 떨어진 게 좀 크긴 하다마는…… 큼큼! 아무튼, 정신적인 충격을 크게 받은 것 같은데 육신에 난 상처들은 네놈의 몸이 뭔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선천지기들이 스스로 회복시켜 놓았으니 곧 다 나을 게다. 뭐, 그만큼의 수명은 줄겠지만……. 아무튼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알 영문이 없으나 마음을 다스려라. 만병의 근원은 심(心)이니라.”
심.
‘심이라…….’
송운이 힘겹게 떴던 눈을 다시 감았다.
노사의 말이 옳다.
돌이켜 보면,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충격이 더 컸다. 감당하기 힘든 배신의 아픔을 스스로 이겨 내지 못하자, 선천지기기 저절로 회복기에 들어간 것이다.
스륵-
송운의 두 눈이 감기며 곧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 * *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덧 송운의 코에 맛있는 냄새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소한 내음이 송운의 후각과 뱃속을 괴롭혔다.
꼬르륵-
“아! 일어난 김에 이제 알아서 밥은 먹거라. 쯧, 죽어 가고 있는 놈을 굶길 수도 없고, 몇 날 며칠 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느냐? 내가 이 나이에 웬 고생인지. 본좌가 본래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닌데…….”
여전히 구시렁대는 노인은 죽 한 그릇을 퉁명스럽게 내밀었다. 풀뿌리와 짐승의 고기로 보이는 것이 섞인 듯했다.
송운은 냉큼 그것을 받아 들었다.
“예. 송구합니다. 윽……!”
“그렇다고 해서 상처가 다 나은 것은 아니니 주의하고. 낄낄.”
움직이며 배가 눌렸는지 송운이 신음을 내뱉자, 노인이 그 모습을 비웃는다.
‘하아.’
조금 얄미울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름도 모르는 자신을 돌봐 준 은인이 아니던가?
일단은 은혜를 갚는 것이 먼저다.
조심스럽게 뜨거운 죽을 받아 든 송운이 한입 입으로 넣을 무렵이었다.
“한데 네놈이 혹시 송운이라는 놈이냐?”
꿀꺽!
노인의 질문에 뜨거운 죽을 식히지도 못하고 그대로 목구멍에 삼켜야 했다.
송운의 두 눈이 솔방울만 하게 커졌다.
“헉, 쿨럭……! 저, 저를 아십니까?”
송운의 머릿속에 갖가지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눈앞의 노인이 독고백처럼 목적을 지니고 자신을 살린 것은 아닐지, 애당초 이것 역시 독고백의 계획은 아닐지 하는 의심들 말이다.
하나 곧 노인에 의해 정신을 바짝 차릴 수밖에 없었다.
따악!
“내가 먼저 묻지 않았느냐? 이 고얀 놈, 요즘 것들은 어찌 이리 버르장머리가 없는 겐지.”
“마, 맞습니다. 아! 한데 독고백, 아니 혹시 수상한 자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이번엔 반대로 송운의 질문에 노인의 안색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여태껏 보지 못했던 눈빛이었다.
하나 살기 같은 잡스러운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들었다.”
“예?”
노인이 고개를 내저으며 손을 뻗자, 작은 새 한 마리가 그 손 위에 걸터앉았다.
짹짹-!
“그자가 세상을 아주 쑥대밭으로 만드는 중이라 하더구나.”
송운의 몸이 마치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벌떡 일으켜 세워졌다.
“그런……!”
“그자가 설마 이제 와서 다시 움직일 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거늘. 어찌 이런 일이 생긴 겐지…….”
“지금 당장 제가 가 봐야 합니다.”
“쯔쯧, 너는 독고백 그자를 알고 있는 게로구나.”
“……조금, 아주 조금 압니다. 아니, 사실 제가 아는 게 그자가 맞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니 저는 가 봐야 합니다. 아, 절 돌봐 주신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어르신.”
송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노인이 송운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곤 일어나려던 송운의 어깨를 손가락 하나로 눌렀다. 그러자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
조화경을 뛰어넘은 이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어찌 이럴 수가?’
반면, 노인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래서 말이다. 네가 날 좀 도와야겠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놈이 누워 있는 사이, 이미 우리 무당파의 절반이 당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인데, 크게 한 방 먹었지. 하필 내가 자리를 비운 시기에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하기야 내가 거기에 있었다고 해도 얼마나 크게 바뀌었을지……. 그자라면 혈혈단신으로도 무당파를 박살 내는 데는 충분했을 게야. 더불어 꽤 오랜 세월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얼마나 더 무공이 발전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나.”
송운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졌다.
“하면 당장이라도 무림맹으로 가서 도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 무림맹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