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0화
툭툭.
“쌔액-”
“흐음, 호흡을 하는 것 보니 숨은 붙었구나. 그 와중에 급소는 비꼈다니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는지…… 쯥, 허……! 이거 대체 하필 왜 내 앞에 떨어진 게야? 그렇다고 다 죽어 가는 놈 버리고 갈 수도 없고……. 에잉.”
몸에 가해지는 가벼운 충격에 의식의 흐름이 조금씩 돌아올 즈음.
송운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시렁구시렁하는 것이 젊은 사람의 것은 아니고 나이를 제법 먹은 노인 같았다.
아무래도 이승의 것인 듯하니 죽은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산 건가.’
송운은 곧장 눈을 뜨고 싶었지만 무거운 눈꺼풀은 들어 올려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몸 역시 천근만근이다.
찔렸던 오른쪽 배는 아직도 욱신거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의 말대로 아마 사혈은 피한 듯했다. 더불어 한 가지 더 다행이라면 떨어질 때의 충격을 선천지기가 스스로 감싸며 흡수한 것 같았다.
더불어 당금도 조금씩 움직이며 스스로를 치료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 여파로 몸에서 느껴지는 선천지기는 많이 증발해 있었지만, 그것이야말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면 다시 모을 수 있는 것이니 크게 걱정이 되진 않았다.
살았다는 게 작금 가장 중요한 현실이다.
‘한데 대체 어떻게……?’
그렇게 되니 애당초 독고백이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일까? 라는 것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희미한 정신을 붙들며 들렸던 마지막 말은 너무 띄엄띄엄 이어져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무엇 하나 제대로 알 수 없는 현실이 답답해져 온다.
이 정도로 큰 부상을 입어 본 적이 얼마 만이던가.
처음 독고백을 만났던 그 날이 문득 떠올라 가슴이 저려 왔으나 속으로 재빨리 떨쳐 냈다.
그러고 나니 떨어지기 직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하…….’
속으로 헛웃음까지 날 지경이었다.
자신을 향해 살 검을 내민 것도 모자라, 여태 가족들을 괴롭혀 왔던 모든 것들의 원흉이었다.
게다가 둔탁한 목검으로 사람 몸을 찌를 수 있는 게 과연 가능은 한 이야기던가? 그렇다면 독고백은 그동안 왜 자신을 살려 두었던 것일까.
여러 생각이 한 번에 휘몰아쳐 오니 정신이 다시 혼미해지는 듯싶었다.
그런 송운이 다시 기절하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여전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쯔쯧, 아직이다, 이놈아. 조금 더 푹 자 두어라.”
노인이 송운의 혈자리를 눌렀고, 마지막 말과 함께 송운의 정신이 암전됐다.
* * *
잿빛과 푸르스름한 빛이 하늘을 함께 채운 시간.
밤새도록 하늘을 밝히던 달이 지고, 해가 보이기 직전의 때.
독고백이 하늘을 멍하니 바라봤다.
제법 오랜 세월을 이 세상 속에서 섞여서 살아 보고 군림도 해 보았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일까.
많은 고뇌에 잠길 무렵.
홍월림이 독고백에게 질의해 왔다.
“주군. 곧 날이 밝습니다. 어찌할까요.”
독고백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동이 트는 대로 호북성으로 향할 것이다.”
“그럼 그리 일러두겠습니다. 하온데…… 주군께선 정녕 괜찮으신 겁니까……?”
“네 눈에는 그리 비치는 것이냐?”
홍월림이 독고백의 상태가 걱정되는 듯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주억였다.
“안색이 썩 좋지 못하십니다.”
“아까 전 송운과 싸우며 조금 무리가 되었나 보군. 오랜만에 검을 직접 잡아 그런 것일 테니 걱정 말거라.”
무던히 말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홍월림이 저도 모르게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묻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아시는 분이…….’
지난 몇 해간 지켜본 독고백은 독고백답지 않았다.
송운에게 스스로 찾아갔던 그 날도, 역시 자신이 잘못 느낀 것이 아니었다. 말은 그리했지만 마음에는 무언가 작은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를 알아챈 건 독고백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이자, 근심이다.
그럼에도 홍월림은 뒷말을 차마 삼킬 수밖에 없었다.
감히 주군의 일에 나서서 이렇다 저렇다 입을 떠벌릴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면 앞으로의 행보는 어찌 되시는 것입니까?”
“전부 다 부숴 버릴 거다. 물론 그 전에 송운이 날 막으면 이 세상은 구원받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전부 파괴되겠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독고백의 두 눈에 광채가 들었다.
“가자꾸나. 이 빌어먹게 재미없는 세상. 내가 재미있게 직접 만들어 줘야겠다.”
독고백의 새빨간 혀가 붉은 입술을 축였다.
* * *
“맹주님! 맹주님!”
“……왔는가? 총 군사, 우선 앉게.”
다급한 제갈염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백능이 조용히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급하게 자리에 앉은 제갈염이 가장 먼저 꺼낸 이야기의 화두는 독고백이었다.
“독고백이 나타났습니다.”
“독고백이라 하면……?”
“예. 아주 오래전 그 종적을 감추고 후일에 대해 말이 많은 그 천하제일 일무신, 독고백입니다.”
“정녕 그자가 맞는가?”
“그렇습니다. 본인이 스스로를 독고백이라 하였고…… 실력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금까지 대적한 무인들은 모두 반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합니다.”
“자네, 그 말이 정녕 허언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일무신이 어찌 사람들을 해하고 다닌단 말인가?”
그의 무위는 실로 무인이라면 충분히 존경할 만큼 대단한 것들이었다.
어느 순간 그 종적을 감추어 세간에선 수많은 일화들이 가득한 일무신, 독고백.
한데 그런 일무신이 무슨 연유로 무인들을 죽이고 다닌단 말인가?
놀란 건 제갈염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작금 일무신이 지나간 마을은 죄다 폐허입니다. 어린아이, 아녀자, 노인을 제외하고선 모든 것을 다 죽이고 다닌다 합니다. 호북성에서 고개를 내밀었으나, 워낙 신출귀몰한 데다 대적할 자가 없어 속수무책이라 하니, 뭐라도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뜩이나 아직 혈교가 휩쓸고 간 흉터도 다 아물지 못하였다. 그 피해는 보지 않아도 훤했다.
‘독고백…….’
백능 역시도 비슷한 시대에 활동했으나 직접 본 적은 없는,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신비로운 무인이다.
백능의 목소리에 짙은 번뇌가 깔렸다.
“으음…… 일단 장로들을 모두 불러 주게. 이대로 가만히 놔두었다간 더 큰 피해로 힘들어질지도 모르니. 사람을 모아야겠네.”
“예, 알겠습니다.”
* * *
무림맹 장로들이 소집되자 무림맹 전원이 하나로 뭉쳤다. 평소였다면 둘 혹은 셋으로 갈려 싸웠을 그들이지만, 이미 무림맹은 이번 혈교와의 전쟁과 화산파의 압박으로 인해 많이 약해진 시기였다.
이런 상태에서까지 갈라져 싸운다면 정말 무림맹이고 뭐고 아무것도 남는 게 없을 것이란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아직까지 단 한 명도 독고백에게 상처 하나 낸 자가 없습니다. 무당파 코앞까지 쳐들어가 마치 보란 듯이 절반만 박살 내고서 유유히 떠난 자입니다.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모두 덤볐으나 실패했지 않습니까? 이건 무조건 합공을 펼쳐야 합니다.”
가장 먼저 남궁장호가 말했다.
오늘만큼은 이에 반박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되레 그의 말에 힘을 싣기 바빴다.
“……무당파는 시작에 불과했소. 흑야라는 놈들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오. 남쪽 지방은 가뜩이나 전멸이던 것이 완벽히 박살이 났소. 북쪽으로 올라오는 것 역시 순식간일 것이외다.”
“하면 전면전에 대체 누가 나설 것이오? 힘을 합하는 것은 좋으나, 결국 누군가는 앞장을 서야 할 터인데…… 크흠.”
장로들끼리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치를 볼 무렵, 그때 먼저 나선 것은 다름 아닌 공대복이었다.
“이번 일에는 저희 개방이 앞장서겠습니다.”
“허? 개방도가? 무엇으로 말인가?”
“다행히 타구진을 익힌 자들이 제법 많이 살아 있습니다. 저희 개방도들을 최대한 많이 이끌어 타구진을 펼쳐 시선을 끌어 보겠습니다.”
“거, 그쪽도 아직 안정이 제대로 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괜찮겠는가?”
점창파의 장로가 썩 좋지 않은 표정으로 공대복을 바라보았다. 결국 이번 혈교와의 전쟁에서 힘들게 한 장본인 중 하나가 개방이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하는 걱정보다는 개방을 쉽사리 믿기 어려운 것일 터. 그런 불신의 목소리에도 공대복의 표정에서 굳은 의지가 비쳤다.
“당연히…….”
하나 그것조차도 곧 묻혀 버렸다.
“다들 진정하게. 이번엔 내가 직접 나서겠네.”
백능이 나섰기 때문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발언이었기에 더욱 당혹스러웠다.
“매, 맹주님!?”
“맹주님! 그건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한시가 시급한 상황일진대, 아니 될 것이 무에 있는가? 맹주라는 이름으로 여태 무게만 잡을 줄 알고, 무림맹의 무인들과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네. 이는 다 나의 탓일세. 후세에 전해질 이런 치욕스러움을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네.”
“하오나……!”
제갈염과 남궁진혁 등이 당황한 채 나섰지만, 이미 백능은 마음을 굳힌 듯 단호했다.
“독고백은 이미 그 무위가 사람의 경지를 벗어난 자일 확률이 몹시 높아. 나 역시 당대엔 이름을 크게 떨치지 못하여 그자를 직접 보진 못하였으나, 당시 천하십대고수라 불린 이들을 모두 무릎 꿇린 자이네. 그리고 조용히 은거에 들어갔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자가 나섰다면 필히 무언가 심경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일 게야.”
백능의 말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마지막 쐐기를 박는 백능의 결정타가 날아왔다.
“이곳에 당금 나보다 무위가 높은 자가 누가 있는가? 나는 말 그대로 무림맹을 대표하는 사람이네. 그쪽에서도 본인이 직접 나섰다면, 우리 무림맹 역시 내가 나서는 것이 격에 맞는 대우가 되지 않겠는가? 일무신, 그자 역시 내가 나오길 바라고 있는 것일 수도 있네. 이번만큼은 내가 나서는 것이 맞아.”
이는 자칫 거만한 듯 보이지만 사실이었고,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하면, 저희 개방도들이 그 뒤를 뒷받침하겠습니다. 그것만은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맹주님.”
공대복이 간청했으나, 백능이 고개를 내저었다.
“개방은 훗날 우리 무림맹의 단단한 정보력이 되어 주어야 해. 이번 일에는 내가 직접 나서는 것으로 알고 이만 물러나게나. 모두 쉬도록 하게. 내일은 벅찬 하루가 될 듯허이.”
처음으로 무림맹의 회의 장내가 모두 숙연해지는 순간이었다.
* * *
그 시각 사천성.
“아무래도 일무신……. 그자가 정녕 무서운 자이긴 한가 보오.”
“실상 우리 쪽은 거의 전멸이요. 그러면서도 일정 선을 넘고 있지 않으니……. 마치 놀림을 당하는 것 같아 자존심까지 죄다 뭉개지고 있소이다.”
으득!
독비량이 이를 꽉 깨물었다.
이 주야 째.
홀로 온 전장을 누비며 신출귀몰한 독고백과 싸우던 사천성의 세 문파가 모두 골머리를 썩고 있던 참이다.
그러던 그때.
무림맹으로부터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장문인! 곧, 곧 무림맹에서 맹주님이 오신다 합니다!”
“뭐라?! 맹주님께서 직접!?”
“결국…… 맹주님께서…….”
당천립과 독비량이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고, 유일하게 여위만은 놀란 듯하나 차분한 목소리를 유지했다.
그동안 혈교와의 전쟁에서 제법 큰 피해를 입은 상황인지라, 세 문파를 다 모아 두고도 전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황이기는 했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맹주인 백능이 직접 이곳에 오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는 무림맹의 역사상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여위가 속으로 간절히 염불을 외기 시작했다.
‘아미타불…… 부디 이 거센 폭풍이 무사히 지나가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