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9화
第七章. 끝나지 않은 피바람
아주 잠시 동안이나마 꿈을 펼치려 했던 혈사련은 결국 송운의 손에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그뿐이랴?
혈사련을 도우려 했던 자들까지 모조리 한날한시에 같이 세상을 등졌다.
이날의 기억은 지상에 새겨진 일자로 남은 거대한 자국이 아니었다면 모든 것은 애당초 일어나지 않았던 일처럼 꾸며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나 이를 가만둘 사람들이 아니다.
호사가들은 역시나 이때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떠들기 시작했고,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것 역시 순식간이었다.
산서성의 중심이 되었던 태원 상가는 이번 일을 계기로 몰락을 맞이했고, 자연스럽게 운양 상단에 흡수되었다.
또한 몇몇 개의 성에서 혈사련으로 몰려들었던 자들도 더는 입을 열지 않고 각자 조용히 본인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전 중원이 다시 새 꿈과 평화를 맞이하는 듯했다.
* * *
“아버지, 어머니. 저 돌아왔습니다.”
송운이 가장 먼저 얼굴을 내밀고 송악과 홍예령에게 다가갔다. 곁에는 당연히 평서란도 있었다.
“그래. 어디 몸 상한 곳은 없느냐? 그렇지 않아도 새아가보다 복귀가 늦어져 걱정했다.”
무뚝뚝한 듯 보이면서도 걱정을 표하는 송악의 모습에 송운의 입가에도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예전의 아버지였다면 있을 수 없을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 한데 송후는 어디 있습니까?”
이에 답한 건 고운 미소를 짓고 있는 홍예령이었다.
“송후는 황궁의 일이 많아 조금 늦는다더구나.”
그때, 놀라울 정도로 발전한 부자 사이를 뒤로하고 송운의 뒤로 누군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헤헤…… 나도 왔어. 아빠, 엄마.”
익숙한 얼굴에 입술 사이로 붉은 혀를 내밀고 있는, 점점 꽃이 피어오르는 듯한 여인.
송씨 가문의 유일한 홍일점, 송하였다.
“세상에…… 송하야!”
그 모습에 홍예령이 앞뒤 가리지 않은 채 그녀를 향해 달려가 와락 안았다.
이제는 신장이 제법 많이 커 한 품에 들어오지 않는 송하임에도 홍예령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송하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며 잔소리 신공을 펼쳤다.
“어쩜 이리도 늦어졌단 말이니? 이 어미가 보고 싶지도 않았던 게야?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거니? 아휴! 세상에, 얘 몸 야윈 거 봐.”
홍예령이 송하의 손을 잡고서 몸 구석구석을 살피자, 송하 역시 그런 홍예령의 손을 꼬옥 잡았다.
“엄마도 참……. 나 이제 어린애 아니라니까?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잘 돌아왔잖아요. 나 이제 정말 말썽 안 피울게, 엄마.”
하나 송하 역시 조금 칭얼대면서도 코끝이 벌게지는 것이 스스로도 제법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이리라. 항상 어리게만 보였던 막냇동생이 처음으로 아주 조금 의젓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 말 정말이지? 앞으론 이리 오래 집을 비워서는 아니 된다. 네 아버지도 얼마나 걱정을 하셨다고.”
“헷. 그래도 조광이 오빠랑 운이 오빠, 그리고 황보 소협 덕분에 하나도 안 다치고 잘 다녀왔어.”
“황보 소협은 또 누구니?”
송하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홍예령에게 송하가 조심스레 황보운룡을 끌어왔다.
그러곤 송하의 폭탄 발언이 이어졌다.
“이 사람! 실력도 제법 높은데다가 날 가장 많이 지켜 준 사람이야. 그리고…… 내, 내가 진심으로 아주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푸흡-! 무, 뭐라?”
“소, 송 소저!”
“송하야?”
놀란 건 홍예령과 송악뿐만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놀란 듯 보이는 건 당사자인 황보운룡인 듯싶었다.
모두가 혼란에 휩싸인 사이.
이를 정리한 것은 다름 아닌 송악이었다.
나름대로 침착해 보이려고 하는 송악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커흠-! 우, 우선 다들 들어가도록 하자꾸나. 손님을 이리 오래 기다리게 해서야 되겠느냐?”
“꺅! 아빠, 그럼 허락한 거지?!”
송하의 철없는 발언에 결국 송악이 발끈해 버렸지만 말이다.
“허어?! 대체 뭐, 뭘 허락한단 말이냐!”
“나, 혼인할래!”
* * *
송하의 폭탄 발언으로 인한 거대한 폭풍은 곧 잠잠해졌다. 단지 송하의 생각만이 아닌, 황보운룡의 마음 역시도 확인을 해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었으나 그 역시 조심스레 수긍을 해 버린 것이다.
따님을 주신다면 이 집의 세 번째 아들이 되겠다며 말이다.
결국 두 사람의 확고한 마음을 확인한 송악과 홍예령은 우선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방으로 돌아갔고, 송하와 황보운룡마저 각기 방으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송운이 방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송운을 불렀다.
“저…… 큰 공자님! 큰 공자님 앞으로 서신이 하나 당도했는뎁쇼.”
“그렇습니까? 발신인은요?”
“그게 발신인이 딱히 적혀 있지 않아서……. 그저 백이라고만 적혀 있습니다요.”
백이라면?
송운의 안면에 반가운 기색이 비쳤다.
하인이 송운에게 하얀 서신을 건네주자, 송운이 급히 이를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아이고, 큰 공자님도 참.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요. 그게 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럼 쇤네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방으로 돌아온 송운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서신을 펼쳐 보는 일이었다. 서신에는 정갈히 적힌 백의 서체가 보였다.
운 동생에게.
오랜만에 네 얼굴이 보고 싶구나.
나는 지금 산서성 오태산(五台山) 정상에 있다.
-백-
내용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오태산이라면……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인데.’
굳이 산서성의 오태산으로까지 오라고 한 연유가 무엇일까.
더군다나 이렇게 서신까지 준 것은 처음이었다.
송운은 조금 의아한 마음이 들긴 했으나, 원체 거점을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니기에 이내 수긍을 하였다.
‘가 보면 알게 되겠지.’
얼굴만 보고 오면 되겠다는 생각에 하인 한 명에게만 슬쩍 언질을 넣고선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한시라도 빨리 그를 만나 그때의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송운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곧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 *
산서성 오태산 정상.
누군가 무표정에 거만한 자세를 유지한 채 의자에 앉아, 차고 거센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그의 바로 뒤는 제법 높고 가파른, 보기만 해도 아찔한 절벽이었다.
그 아래로는 길게 흐르는 계곡이 보였다.
“주군, 날이 찹니다.”
“괜찮다. 시킨 일은 잘되고 있느냐?”
“예. 모든 조치를 취했으니, 무림맹이 눈치채는 건 금방일 겁니다.”
“좋구나. 운 동생은 아직인가?”
“……이제 곧 당도할 겁니다.”
“어서 왔으면 좋겠구나.”
자신을 바라보는 송운의 표정은 어떠할까.
차가울까.
혹은 반가울까.
그도 아니라면 증오일까.
‘어떠한 반응이 나오건 상관없다. 오롯이 즐거움이 있다면 그만일 뿐.’
하나 그런 마음과는 다르게 독고백의 얼굴에 아주 찰나의 순간, 씁쓸함이 훑고 지나갔다.
휘이잉-
때마침, 아주 거친 북서풍이 독고백의 주변을 휩쓸었다.
“……쿡쿡.”
“주군?”
그의 웃음소리에 곁에 서 있던 홍월림이 독고백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아니다. 곧 운 동생이 도착하겠구나. 맞이할 채비를 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 * *
오태산의 정상에 다다른 송운은 크게 숨을 한번 들이 내쉬었다. 오랜만에 볼 독고백을 떠올리니 가슴이 들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 집중된 송운의 안력에 독고백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모습이 잡혔다.
타닥!
송운이 발끝에 힘을 줘 속력을 좀 더 내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닿는 건 순식간이었다.
“백 형!”
“이제야 왔구나.”
독고백이 미소 지으며 송운을 반겼다.
어딘지 모르게 어린아이처럼 들뜬 송운의 모습이다. 하나 이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으리라.
“오랜만이야, 형. 그때 그렇게 갈 줄 알았으면……?”
파박-!
“큿……! 설마 보자마자 대련인 건가?”
하지만 더는 송운이 말을 하려는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독고백이 무섭게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독고백의 손에 들려 있던 목검이 송운의 손목을 내려찍으려던 건 순식간이었다.
따닥!
간발의 차로 그의 검을 막아 낸 송운이 독고백과의 거리를 벌렸다.
이어 천진난만한 표정인 송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랜만의 대결이라면 나야 환영이지.”
자신보다 높은 이와의 대련은 필히 무언가 조언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로 인해 지난번 대련에서도 송운은 큰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던가?
송운이 기쁘게 이를 받아들였다.
겉으로도 태가 날 만큼 말이다.
내내 무표정하던 독고백의 입가가 뭉개졌다.
‘……순진한 것.’
이에 독고백이 더 독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처음의 한 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말이다.
그의 검은 이미 목검이 아니었다.
날카로우면서도 차가운 성질을 지닌 그것이 환성을 내려찍었다.
채재쟁-!
카가가가각!
쇠붙이끼리 부딪치며 엄청난 불꽃이 튀겨 올랐다.
“윽……!”
묵직함이 손목에 전해지며 동시에 이가 절로 악다물렷다.
‘형답지 않아. ……손속이 조금 과한데.’
지난번의 대결에 비하자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차이다.
게다가 자신이 잘못 느낀 것인지 살기마저 느껴졌다.
그때, 송운의 귓가에 들려선 안 되는 말이 들려왔다.
“그동안 너와 네 가족들을 위협한 자들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건 갑자기…… 왜 말하는 거야? 흑야……! 설마 형, 흑야를 알아?”
“……알기만 할까.”
결정적인 말이 날아왔다.
“네가 쫓던 그 흑야. 내가 바로 그곳의 수장이다.”
그것도 독고백의 입에서 직접 튀어나왔다.
마치 무거운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얼얼함이 전해져 온다.
미끌-
순간, 환성을 쥐고 있던 송운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렸다.
“……백 형!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그간 가족을 위협하고, 전 중원을 위기로 몰아넣었던 흑야의 우두머리가 독고백이었다는 사실은 송운을 충격에 빠지게 하기엔 충분했다.
이성까지 무너져 내린 송운이 그를 이길 리는 만무했다.
결국 송운의 기세가 곧 바닥을 쳤다.
카강!
송운이 받치고 있던 환성이 밀려나면서 송운의 오른쪽 복부에 독고백의 검이 박혔다 빠진다.
촤아아악-!
“커헉! ……우웨에엑! 거…… 짓말 하지 마! 그럴 리가…….”
“네놈이 혈마와 낙월추를 상대하고 아주 기고만장해졌구나. 내가 널 살려 둔 연유는 그저 재밌기 때문이었다.”
독고백의 목소리는 그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중저음이었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이다.
“……백……!”
송운의 입에서 아주 작지만 분노 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에는 핏기가 가득 차올라 붉게 변해 있었다.
하나 그뿐.
송운의 몸은 이미 전신이 돌에 눌린 것처럼 묵직한 채 말을 듣지 않았다. 선천지기로 둘둘 막았음에도 오장육부가 뒤틀린 듯 토기가 올라왔다.
“참고로 말하자면 내 진짜 이름은 독고백이다. 저승에 가서 깊이 새겨 두어라.”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그의 냉랭한 목소리가 송운의 귓가를 때린다.
‘……안 된…… 다!’
그렇게 의식마저 흐려질 무렵.
“너라면 반드시 살아 돌아와 날 더 즐겁게 해 주겠지. 반드시 더 강해져서 돌아오거라. 송운.”
툭.
말을 마친 독고백이 송운을 절벽 아래로 내밀었다.
희미해진 정신으로 마지막으로 송운이 본 것은 그의 차가운 표정이었다.
후두두둑!
첨벙!
주변의 돌멩이들과 함께 구른 송운이 계곡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독고백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조용히 읊조렸다.
“가자. 이젠 이 세상에 제대로 된 인사를 할 차례다.”
“예. 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