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8화
챙그랑-!
날카로운 환성의 검날이 낙월추의 등을 뚫고 하늘을 향했다. 반면 낙월추의 검은 갈 곳을 잃은 채 허망하게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동시에 허공을 바라보던 낙월추의 눈동자와 손아귀에서 힘이 풀렸다.
“큭, 크하하하…… 쿨럭! 역시 네놈은…… 날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네놈이라면…… 필히 나의 주군을 즐겁게…… 해…… 드리겠지…….”
웃으며 피를 토하던 낙월추가 눈을 찌푸리며 감았다.
“마지막 유언은 다 한 것인가? 어차피 네 주군에 대한 것은 물어봐도 답하지 않겠지.”
송운의 질의에 낙월추는 피로 범벅이 된 입가에 그저 희미한 미소를 띠울 뿐이었다. 이를 마지막으로 송운은 정확히 낙월추의 심장에 꽂힌 환성을 뽑아냈다.
촤악-
푸아아악!
그러자 칼에 막혀 있던 엄청난 양의 핏물이 뿜어져 나오며 허공에 흩뿌려졌다. 그 피는 당연히 코앞에 서 있던 송운의 온몸에도 튀었다.
하나 전투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총…… 삼십.’
바닥에 고인 핏물들이 마치 화살촉처럼 날카롭게 변해 곳곳을 향해 날아간 것이다.
파바바박-!
털썩!
“커흑……!”
“쿠웩!”
“끄악!”
미세하게 조정된 그것들은 숨어 있던 흑야를 향해 날아갔고, 곧 사방에서 죽어 가는 신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낙월추를 따랐던 흑야를 모두 잡아낸 것이다.
“오, 오빠!”
그제야 송운이 큰 한숨을 내쉬며 송하를 향했다.
기다렸다는 듯 송운의 뒤편에서 말없이 주먹을 꽉 쥔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송하가 송운의 곁으로 뛰어왔다. 죽음을 맞이하며 쓰러진 낙월추를 받아 든 송운은 그를 한적한 바닥에 눕혔다.
“괜찮으십니까? 송 소협!”
“전 괜찮습니다. 송하야, 너는 다친 곳은 없느냐?”
“응. 난 보다시피 정말 멀쩡해. 오빠가 아니었으면 정말 죽었을지도 몰라. 오빠는 정말 괜찮은 거지……?”
온몸이 피투성이인 탓에 송운의 것인지, 적의 것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을 수준인지라 송하의 두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걱정 말거라. 이 오라비의 혈흔은 아니니.”
송운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렇게 피가 난무하는 상황에서도 송운은 단 하나의 상처도 입지 않았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으나, 당금은 그런 것까지 생각할 시간 따위는 없는 듯했다.
송하와 송운 남매의 눈물겨운 상봉이 이루어지고 있을 무렵.
장명도가 그 둘 사이에 멋쩍은 듯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이보게, 운이. 자네 정말 괜찮은가?”
“아, 내 정신이 없어 자네를 잊을 뻔했군. 이러면 안 되는 것인데…… 미안하네. 명도 자넨 괜찮은가? 내 부탁을 들어주어 진심으로 고맙네. 이렇게 위험한 것인 줄 알았다면 자네도, 송하도 모두 들어가라고 하지 않았을 것인데……. 참으로 미안하게 되었네. 내 돌아가면 반드시 사례를 톡톡히 치르겠네.”
송운의 말에 장명도가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허, 거 무슨 소리인가? 우리는 친우가 아닌가? 이럴 때 도우라고 있는 사람이네. 그런 말은 하지 말게. 애당초 사례를 받고자 움직인 것이 아니란 말이야.”
“물론 그것은 잘 알고 있으나…….”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비록 사람을 잃긴 하였으나, 크던 은혜를 갚을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되었네. 거참. 안 하던 말 하려니 쑥스럽구먼. 하나 이번 일은 나만 한 게 아니야. 황보 소협 역시 큰 힘이 되었네. 진정 사례는 황보 소협에게 하시게.”
“황보 소협. 끝까지 내 동생을 지켜 주어 고맙고 또 고맙네.”
그 둘의 사이에 껴 있던 황보운룡이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난색을 표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 역시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제가 좋아서 한 일입니다.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런 황보운룡의 팔을 확 휘어잡은 건 송하였다.
“맞아! 우리 황보 소협이 진짜 큰 도움이 됐…… 아!”
“우리 황보 소협……?”
송하는 스스로 말해 놓고도 놀랐는지 얼굴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어졌다.
더불어 송운의 얼굴에 당황이 필 무렵.
정신없는 그 틈을 파고든 건 장명도였다.
“한데 자네, 그사이 실력이 일취월장하였구만. 나로서는 감히 가늠도 되지 않을 정도야. 이런 실력으로 자네를 돕고자 했다는 것 자체가 민망해질 정도네.”
“아, 그건…….”
“하하! 됐네, 이 사람아. 변명 같은 걸 들으려고 말한 건 아니니. 오히려 내가 다 뿌듯하고 좋아서 하는 말이야. 한데 대체 저자는 누구지? 도중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혈사련은 아닌 듯한데…….”
장명도의 손끝이 이미 목숨을 거둔 낙월추를 향했다.
“참으로 놀라운 실력을 지닌 자였습니다.”
황보운룡이 경이로운 표정으로 낙월추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송하와 송운의 눈길 역시 그를 향했다. 낙월추의 표정은 마치 모든 것을 내려두고, 평안한 듯 보여 더욱 무서웠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라니…….’
아니, 오히려 생과 사를 오가는 싸움을 그는 끝까지 즐겼다.
아마 낙월추는 혈마보다 조금 더 높은 실력을 지녔을 것이다.
이미 이 점만으로도 실로 놀라웠다.
한데 그런 그가 주군으로 받들고 있다는 이는 필히 엄청난 무력을 가진 자일 터.
‘분명 흑야와 관련이 있는 이다.’
그걸 뒷받침해 주는 건 방금 전 멀찍이서 나설 듯 나서지 못하며 주시하고 있던 삼십 명이다.
아마 흑야의 잔당들이리라.
이를 떠올리자 생각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지금껏 상대한 흑야로 추정되는 이들은 하나같이 높은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낙월추 역시도 송운이 최근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당금 차가운 시신이 된 것은 바로 자신일지도 몰랐다.
그런 낙월추 정도 되는 실력자들이 앞으로 몇이나 더 있을까.
얼마나 많은 자들이 그에 귀속되어 있단 말인가?
전혀 잡히지 않던 실체가 눈앞에 조금씩 드러나니 오히려 더욱 그 존재가 두려워졌다.
‘흑야…… 흑야. 이제야 무언가 잡힐 듯싶구나.’
무섭지만 반드시 찾아내어 없애야 할 악의 집단.
잠시 고뇌에 빠져 있던 송운의 어깨를 누군가 잡았다.
장명도였다.
“자네 정말 괜찮은 겐가? 어디 아픈 건 아니고?”
“아, 내 잠시 생각을 하느라…… 아무래도 나는 이대로 곧장 혈사련을 마무리 지어야겠네.”
“당연한 말일세.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면 되겠는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송하를 집까지 좀 부탁하네.”
“음?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설마…….”
“그편이 더 빠를 거야.”
“안 되네. 우리도 가겠네. 자네만 보낼 수는 없으이.”
송운이 거절하려 하였으나 이번엔 황보운룡과 송하 역시 고개를 내저었다.
“저 역시 돕겠습니다. 굵직한 자들을 상대하긴 버거울지언정, 자잘한 놈들까지는 도움이 제법 될 겁니다.”
“나도 오빠를 혼자 보내진 않을 거야.”
“아니요. 모두 먼저 돌아가세요. 그 몸으로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모두가 나서려 했지만, 송운이 단호하게 잘라 내며 각자 입은 상처를 향해 가리킨다.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 테니, 어서 돌아가서 치료부터 받으십시오.”
이미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터라,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송하의 시선이 황보운룡의 상처로 향한다.
버티고는 있으나, 생각보다는 쉽지 않은 부상임은 분명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본인의 몸에도 제법 성치 않은 상황이다. 혈을 짚어두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피가 터져 나왔을 터였다.
그건 장명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알겠어. 대신 오빠도 부디 몸조심해. 알겠지?”
“걱정 말거라.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결국 모두를 돌려보내고 홀로 남은 송운이었다.
* * *
타다닥!
열심히 달려가던 정무봉과 추일공, 그리고 곽태보와 냉가혜 모두가 얼이 빠진 상태였다. 대체 어찌 된 상황인지 아직까지도 머리론 정립이 되지 않고 있었다.
단지 생각이 하나 있다면 최대한 빨리 이곳을 떠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 이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애당초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으니, 쫓아온다면 금세 쫓아올 거리였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낙월추가 많은 시간을 끌어 주는 걸 바라는 것뿐이다.
한데 그도 끝장인 듯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네놈들을 두고 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느새 그들의 눈앞에 송운이 나타난 것이다.
“젠장…… 젠장!”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인지 서둘러 값비싼 물품들을 챙기고 있던 정무봉이 연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송운이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모두가 달라붙으면 살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그나마 멀쩡한 곽태보가 조심스레 뒤로 움직였다.
헛된 꿈을 품었던 자신을 잠시나마 원망하며 말이다.
그런 생각도 잠시.
송운이 검에 기운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이미 어느 정도 생성이 된 듯 보이는 그 기운은 점점 더 거대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가장 앞에 있는 냉가혜를 향해 있었다.
“이런 씨……! 냉가혜, 뭐 해! 어서 막아서라고!”
곽태보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냉가혜를 향해 소리쳤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기만 할 뿐, 별다른 미동조차 없었다.
‘이미 틀렸다.’
추일공은 얼어붙었고, 정무봉은 이미 챙기던 물품을 품에 안은 채 뛰쳐나가고 있었다.
“제기랄! 다들, 다들 피해!”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걸음.
서걱.
콰과과과-!
주변에 있던 모든 것들이 휩쓸리기 시작했다.
* * *
달그락.
극한으로 어두운 그곳에서, 누군가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무도 보지 않고 듣지도 않는 그곳에선 단지 그의 세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죽음에 대한 반응은 오늘따라 유독 더 예민했다.
‘……결국 녀석마저 그리된 것인가.’
평소 때와는 다르게 독고백의 표정이 진중했다.
가장 장난기가 많고 스스럼없이 대하던 자.
그러면서 자신의 휘하에 있는 이들 중 가장 영민하고 강했다. 오히려 스승인 암영조차 뛰어넘을 만큼 무공에 대한 조예가 깊고 뛰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충성심은 암영보다 더 높았다.
아니, 그 누구보다 높았다.
‘그런 주제에……!’
쩌정-!
내려 둔 찻잔 위에 손을 얹자, 연약한 유리가 견디지 못하고 두 조각으로 갈라져 바스라 졌다.
자신은 아직 죽으라는 명을 내린 기억이 없었다.
한데,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대체 무엇일까.
송운의 모습과 낙월추의 모습이 희미하게 엇갈리며 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후……후후후. 후하하하!”
그제야 미친놈처럼 독고백이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반 각 정도 흘렀을 즈음.
타다닥!
끼익-!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면서 밝은 빛이 독고백을 덮쳐 왔다.
“……주군!”
다급하면서도 다분히 흐트러진 음성.
더불어 그답지 않게 거칠어진 호흡은 그의 심리 상태를 충분히 표현해 주고 있었다.
암영이었다.
그가 하려는 말은 굳이 귀로 듣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암영 또한 이를 알았다.
“……그래. 나도 느꼈다.”
“송구합니다. 제가 괜히 월추를 보내는 바람에 일이 이리되었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주군!”
“쿡쿡. 그 말 후회 안 할 자신 있느냐?”
별것 아닌 말이었지만, 어둠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암영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오르며 숨이 턱턱 막히기 시작했다.
무형의 살기가 자신의 온몸을 옥죄기 시작한 것이다.
“……끄으윽!”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온몸을 바들바들 떠는 암영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독고백이 손을 휘저었다.
“커헉!”
그 행동 한 번에 모든 살기가 물러가면서 막혔던 숨통이 트였다.
하나 진정 놀라운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암영은 뒤이어 자신의 귓가에 들려온 말을 한참 동안 곱씹어야 했다.
“남은 흑야를 모두 불러들여라. 그리고 대기하라 일러라. 이번엔 내가 직접 나설 것이다.”
독고백의 새하얀 안면에 지독하리만큼 무덤덤한 표정이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