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7화
낙월추의 눈이 강렬히 빛났다.
그래서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의 투지가 송운에게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무인으로서의 순수한 욕망과 열망.
그것들로 똘똘 뭉쳐진 낙월추를 본 것이다.
‘놈은…… 적일지언정, 기세만큼은 진정 무인이 가진 것이로구나. 그래, 우선은 이것부터 완전히 끝을 내자.’
그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 낸 송운의 머릿속이 흑야에 대한 단어가 지워지며 새하얘졌다.
사아아-
송운이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하자, 이내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이를 본 낙월추가 씨익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만족의 미소였다.
‘그래, 송운. 진즉에 이렇게 나왔어야지. 주군의 마음을 빼앗은 실력을 내게 보여라. 그렇지 않다면 오늘 너는 반드시 죽는다.’
* * *
‘……뭐지?’
좀 전과는 다르게 완전히 변해 버린 공기에 냉가혜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그렇게 차례대로 정무봉, 그리고 추일공 등등이 알아챘다.
낙월추와 송운 사이에 변질된 기운을 말이다.
하나 당장이라도 폭풍이 몰아칠 것 같은 기세와는 달리, 둘 사이의 반응은 밋밋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로의 얼굴을 노려보며 그저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한 자세를 유지했다. 간혹 움직이는 것조차도 격한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서로를 견제하려는 의지는 농후했다.
그렇게 제법 따분한 시간을 보내길 한 식경이 조금 지났을까?
지켜보는 이들의 긴장감이 슬슬 떨어질 무렵.
파삭-
낙월추가 미세한 움직임을 드러냈다.
선공을 친 것이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송운을 향해 날아갔다.
카앙-!
퍼버벙!
하나 이를 그대로 맞아 줄 송운이 아니었다.
송운은 재빨리 피해 내며 호신강기를 두른 손으로 맞받아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두 사람의 행위로 인해 주변의 공기가 요동쳤다. 파공음이 주변에 서 있던 이들의 귓가를 찢을 듯 덮쳐 왔고, 그것은 단순한 소리로 끝나지 않았다. 서둘러 내공으로 귀를 보호한 자들만이 먹먹한 정도로 그칠 수 있었다.
다행이라면 송하와 황보운룡, 그리고 장명도 일행 모두는 이미 사정거리를 벗어난 상태라는 점일 터다.
아주 잠시 송하와 송운의 눈빛이 오간 것을 느낀 낙월추가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흐음…… 제법이군. 그것을 본다고 하여 쳐 낼 수 없는 것을. 역시 주군이 인정한 자라 이건가? 당시보다 훨씬 더 진보했구나. 검으로 막았다면 네놈의 심장에 구멍이 뚫렸을 텐데…… 정말 아쉽군.”
낙월추는 연신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여전히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상태였다.
누군가 보면 미친놈인가 싶기도 할 터였다.
하나 그 누구보다도 낙월추는 당금의 상황을 십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멍하니 그들의 기이한 싸움을 보고 있던 그때. 정무봉과 냉가혜의 눈동자가 솔방울만 해지면서 동시에 외쳤다.
“전부 물러서!”
“모두 물려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절정 이하의 무인들은 죄다 물리란 말이다! 못 들었느냐!”
“아, 예……!”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퍼엉!
파바바밧-!
“끄아아악!”
“커, 커억……! 쿨럭!”
“이런 젠장! 남은 모두는 다 물러서라!”
송운의 검 끝에서 터져 나간 검기가 사방으로 비산했기 때문이다.
몇몇의 무인들은 간신히 피해 냈지만, 혈사련의 무인들 대다수는 피하지 못하고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야만 했다. 개중에는 급소를 맞아 즉사한 이도 있었고, 다행히 사혈을 피해 목숨을 건진 자도 있었다.
실로 엄청난 피해였다.
단 한 방, 한 방이 모두 엄청난 위협이 되고 있질 않은가.
‘위험해.’
항상 침착함을 유지하던 냉가혜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이미 송운과 송하의 눈빛이 오가면서 송하 쪽의 무인들은 한참을 멀리 벗어난 지 오래였다. 다만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그 누구도 그들을 말리거나 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냉가혜가 이성을 붙잡고 송하를 향해 가려는 순간.
송운이 그 앞길을 막았다.
콰앙!
“네놈들은 저쪽에 손을 댈 수 없다. 그러려거든 날 죽이고 가야 할 것이다.”
송운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하고 나긋했다.
하나 그럼에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마치 제자리에 그대로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멈추었다. 그렇게 느낀 것만이 아니라 정말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만큼 당금 송운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어마어마했다.
모든 걸 힘으로 눌러 내릴 정도로 말이다.
현재 이곳에서 몸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건 단지 낙월추 뿐이었다.
냉가혜를 비롯해 살아남은 혈사련 전부와 정무봉도, 추일공도, 곽태보도!
그 누구도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호랑이의 기세에 눌린 먹잇감과도 같은 신세가 된 것 같았다.
냉가혜의 눈빛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어…… 째서? 그 정도로 송운이 엄청난 자란 말인가?’
송운은 아직 이립도 되지 않은 무인이다.
한데 그러한 놈에게 이렇게 수많은 무인이 사로잡혔다는 사실이, 냉가혜와 정무봉, 그리고 곽태보와 추일공을 정신적으로 무너뜨리게 하고 있었다.
혈교의 교주를 혈혈단신으로 죽였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하나 전장에서의 일은, 특히 소문이라는 놈은 눈덩이와도 같아 점점 널리 퍼질수록 불어나는 것이 특징이다.
호사가들이 먹고살 수 있는 것도 다 그런 것을 불리고 불려 사람들의 호기심과 상상을 자극시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소문을 완연히 다 믿기보다는 적당히 걸러, 필히 무림맹 고수들과의 합공 덕에 혈교의 교주를 쓰러트릴 수 있었을 거라 어림짐작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송운을 껄끄럽게 본 것은 그가 가진 무공 이외에 황실의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생각했기 때문이다.
급격히 벌어진 두 세력의 대립에 화가 난 건 당연히 낙월추였다.
자신의 싸움이라 하지 않았던가?
“큭, 송운. 그렇게 한가롭게 기운을 낭비할 때인가? 당장 눈앞의 적인 나부터 상대해야 할 텐데? 혈사련 네놈들은 모두 다 물러나 있으라 하였다.”
“닥쳐라. 우린 동맹을 맺은 것이지, 네놈 따위의 명을 들으려 한 것은 아니니…… 컥.”
한 명의 혈사련 무인이 나서서 외쳤으나 그의 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낙월추의 무형검기에 의해 목이 뚫렸기 때문이다.
“웃기는 놈들이로고. 지금부터 끼어드는 자는 동맹 따위 집어치우고 모조리 죽여주마. 목숨이 아깝지 않거든 덤벼라. 타핫!”
낙월추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송운에게로 곧장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역시 낙월추의 검이 먼저 송운의 등을 파고들고, 낙월추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나타났다.
카가각-!
하나 이에 당할 송운 역시 아니었다.
재빠르게 낙월추의 동선을 읽은 송운이 몸을 피하며 되레 그의 뒤편을 노린 것이다.
‘역시.’
하나 낙월추도 이미 이럴 거라 예상했는지, 그 역시 허공에 몸을 띄운 채로 송운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쿠과과과-!
휘오오오-
송운도 그와 동시에 함께 검기를 날리니, 강력한 기운이 서로 맞닿아 엄청난 회오리와 함께 땅을 파고들며 주변에 있던 모래와 돌들을 감아올렸다.
단순한 기운이 아니라 살기가 담겼기에, 나무들은 갈가리 찢겨 나갔다. 곁에 있던 혈사련의 무인들 역시 흔적 없이 그 폭풍에 휘말려 죽음을 맞이했다.
피와 모래.
그 외에도 무엇인지도 모를 것들이 멋대로 뒤섞여 사방에 흩뿌려졌다.
“이…… 이러다간 다 죽습니다. 어서, 어서 후퇴를 명해 주십시오!”
“이런 개 같은!”
곽태보가 소리쳤으나 바뀔 것은 없었다.
여전히 송운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그와 대적하고 있는 낙월추 역시도 전혀 자신들을 생각해 줄 것 같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점점 흐르고, 이미 주변의 건물들은 모두 무너져 내린 지 오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무봉의 결정은 쉽사리 나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으아아아!”
결국 명을 기다리고 있던 혈사련의 무인들마저 참지 못한 채 너도나도 풀린 다리를 이끌고 그 주변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으득.
정무봉의 이가 갈리고 잔뜩 거머쥔 주먹에선 피가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이성을 붙잡고 냉가혜를 바라보았지만, 그녀 역시 제정신은 아닌 듯 보였다. 그토록 단단해 보이던 성이 한번 금이 가니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곽태보도, 추일공도 역시 혼란스러워 보이는 듯했다.
‘……이런 망할! 잘난 척은 평소에 있는 대로 다 하더니!’
어떤 선택을 하건 당금은 정무봉 자신에게 달린 상황이다. 결국 그쪽에서 시선을 뗀 채 홀로 다시 생각에 빠졌다.
조금 더 지체하면 남은 사람도 모두 잃는다.
이러려고 만든 자리가 아니었다.
결국 정무봉의 입에서 쓰디쓴 명령이 떨어졌다.
“살아남은 자들은 전원……! 후퇴한다.”
“후퇴하랍신다! 모두 후퇴하라!”
“후퇴하라!”
결국 계속해서 몰려오던 혈사련의 무인들이 모두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송운의 미간에도 슬쩍 주름이 졌다.
‘일단 혈사련은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송운은 잠시 시공검을 휘두를까 하였지만, 이내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필 그들이 물러나는 주변으로 송하와 황보운룡, 그리고 장명도의 일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세한 조정이 가능해졌다고 한들, 앞을 베지 않고 어찌 뒤를 베랴?
정무봉이 나름대로 머리를 쓴 것이리라.
송운의 눈빛에 아쉬움이 몰려왔다.
당장 낙월추와 싸움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만큼의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더는, 시간을 끌어서는 아니 된다.’
생각의 정리를 끝맺은 송운이 하단전에 모인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상단전과 중단전 역시 열기 시작했다. 어차피 낙월추의 실력은 송운보다 한 수 아래거나, 혹은 동급이다.
이렇게 된 이상, 둘이 아닌 하나만 노려야 했다.
‘한 방을 노린다. 그리고 놈들을 뒤쫓는다. 이대로 혈사련을 놓쳐서는 아니 돼.’
송운이 숨을 깊게, 그리고 빠르게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뱅뱅 돌던 기운들이 자연스럽게 송운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곧 다시 송운의 손끝으로 모여들었다.
‘뭐지? ……몸에 쌓인 내공이 아니야? 아니다. 분명 내공이 맞는데? 내공이면서도 내공이 아니다?’
그 모습에 낙월추가 적잖이 놀란 듯 보였다.
송운이 만들어 내는 그것은 자신이 아는 것과 얼추 같으면서도 달랐다.
도대체 저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 낙월추의 고민과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송운과 하나 된 환성이 검기로 온통 둘러싸인 채 낙월추를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쐐애애액-!
‘검로가 너무 쉽다. ……그렇다면?’
연달아 날아든 세 번의 검날은 모두 진짜였다.
하나 그 길은 모두 쉽게 낙월추의 눈에 보였다. 처음엔 ‘겨우 이 정도로?’라고 생각했던 그의 머리가 마치 둔기로 맞은 것처럼 띵하니 울렸다.
허수, 혹은 허패.
진짜 검은 송운의 왼손에 들려 있었다.
푹-
“헙……!”
헛숨을 들이켠 낙월추가 제자리에 멈추었다.
마치 그 주변으로 모든 사물이 멈춘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