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4화
어느덧 중천에 걸쳐진 햇빛이 귀마병을 더욱 강렬하게 비추고 있었다.
멍하니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을 때, 텅 비어 버린 눈동자가 송하를 뒤쫓았다. 그 괴이한 외형에 송하의 두 동공이 그 어느 때보다 흔들렸다.
이 상황에서 비단 놀란 건 송하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에 있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르륵…….”
한동안 모두가 귀마병에 정신이 팔려 있을 무렵.
귀마병이 신음을 흘리며 송하를 향해 다가왔다. 그 소리는 컸지만, 행동은 은밀하고 빨랐다.
“핫!”
카앙-!
송하가 재빨리 귀마병을 피해 비 검으로 팔을 내려쳤다. 한데 마치 쇠붙이끼리 마주칠 때 나는 소리가 들려오자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휘두른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튕겨져 나왔다.
반면 귀마병의 팔은 너무도 멀쩡했다.
“……비, 비 검을 튕겨 냈어? 분명히 내려쳤는데!”
송하가 다루는 비 검이 익 검보다 더 짧고 넓으며 내구성이 촘촘하고 단단하다.
한데 그런 비 검을 튕겨 내다니?
그것도 생채기 하나 없이 말이다.
‘진짜 저런 게 가능하다고……? 말도 안 돼! 설마, 사술인 건가?’
직접 겪고 눈으로 확인했으면서도 차마 이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사술이나 환각이 아닌 이상에야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계속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던 그때.
송하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따스한 손이 송하의 왼쪽 손목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러자 혼란스럽던 마음이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이제부턴 정말 정신 똑바로 차리십시오.”
“……황보 소협?”
“이제부턴 모두 함께 협공입니다. 또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이니, 죽이는 데 치중하기보다는 우리가 나갈 길을 만드는 데에 집중하십시오.”
꿀꺽.
송하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내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주억였다.
“알겠어요.”
* * *
‘저게 바로 그가 말한 존재인가.’
곁에서 보고 있던 냉가혜가 귀마병을 향해 눈을 흘겼다.
냉가혜 또한 강시 말고도 다른 존재들이 있다며 이름만 들었을 뿐, 귀마병을 정확히 본 적은 없던 것이다.
강시를 다룰 줄 아는 자이기에 도움이 되리라 여겨 반신반의하며 받아들였는데, 강시보다는 되레 귀마병에 대해 더 큰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방금 전의 일격을 그녀 역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겉으로는 태를 내지 않았을 뿐, 냉가혜 역시 제법 놀란 상태였다. 검기 따위가 아닌 순수한 육체의 능력으로 검을 막아 낸 것이다.
기대하라더니 정말 기대 이상의 존재가 아닌가?
만일 저것이 혈사련을 공격해 온다면?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섬뜩했다.
‘저것을 잘 이용만 한다면 주변의 귀찮은 떨거지들 정도는 모두 해결할 수 있겠군.’
냉가혜가 혼자 속으로 판단을 내리고 있을 무렵.
누군가 냉가혜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놈들 제법 독하네. 킥킥.”
잠시 숨을 고르려는 듯 싸움의 중심에서 떨어져 나온 곽태보가 냉가혜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상태인지라 모습이 참으로 기괴했다.
“그런 말 할 시간에 나가서 한 놈이라도 더 쓰러뜨려라.”
“헤- 누님.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누님도 계속 지켜만 보고 있었잖아. 아닌가?”
곽태보의 말에 무표정한 얼굴로 냉가혜가 그를 바라본다.
“내가 껴야 할 연유가 무엇이지? 그 정도로 싸움이 밀리고 있지 않지 않느냐.”
“아아, 간만에 함께 싸우는 전투인데 우리끼리 재미 보려니 심심해서 그러지. 한데 저 송하라는 계집애, 진짜 송운이라는 놈의 동생이야?”
“맞다.”
“생각보다 예쁘장하게 생겼네. 혹시…… 안 죽이고 데리고 놀아도 되나?”
곽태보의 능글맞은 말에 냉가혜가 비릿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역겨운 소린 집어치우고 싸움부터 끝내라. 네 계집질에 신경을 쓸 생각은 없으나, 산 채로 잡으면 포로다. 그리고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어.”
“쳇. 누님은 너무 쓸데없이 진지한 게 탈이라니까. 알았어. 그럼 정리마저 하고 올 테니 기다리라고.”
파밧-!
곽태보가 전투 속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카앙-!
채재쟁!
콰과과과-!
전투는 한창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빠른 속도로 점점 장명도 일행의 크고 작은 생채기가 늘고 있었다.
아니, 생채기만 늘면 다행일 정도였다.
이미 목숨을 잃은 자가 스물은 넘는 상황이었으니.
절반 이상이 당한 것이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마병은 기력을 잃지도, 쓰러지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몸이 단단하여 일반 검으로는 생채기를 입히는 것 자체가 힘겨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장명도와 송하, 그리고 황보운룡은 나은 상황이었다.
검기를 다룰 수 있는 덕분이다.
하나 그조차도 거의 방어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보니, 계속해서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결국 황보운룡이 그들을 향해 외쳤다.
“송 소저, 그리고 장 소협! 이 원을 중심으로 벗어나지 마십시오. 이 정도가 최대로 제가 닿을 수 있는 거리입니다. 이 사이에서 협공을 하면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알겠소. 그리할 테니 부디 죽지만 마시오!”
휘릭!
장명도가 정면으로 맹렬히 날아오는 검을 피하며 외쳤다.
“송 소저!”
“합!”
서걱.
장명도가 쳐 낸 검은 때마침 뒤에 있던 송하의 왼쪽 손목을 향했고, 옷깃이 스치며 잘려 나갔다.
아주 적은 부위지만 손목이 슬쩍 베였는지 핏물도 함께 튀었다. 이를 보고 있던 황보운룡이 결국 이성을 누르지 못하고 발끈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늦었으면 손목을 베였습니다! 제가 조심하라 일렀지 않습니까?”
처음 보는 황보운룡의 모습에 되레 더 당황한 것은 송하였다.
“나도 알아요! 최대한 조심하고 있는 거라고요! 황보 소협 눈엔 앞의 적이 안 보여요? 벌써 쓰러진 이들만 수십이라고요!”
황보운룡이 송하의 두 눈을 바라봤다.
처음에 보았던 생기 넘치던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메말라 있었다. 이미 어깨 쪽에는 자잘한 자상이 그어져 있었고, 가진 내공의 절반 이상은 사라진 채였다.
입술도 바짝 말랐고 목도 바짝바짝 타오는 것이 모든 걸 다 내려 두고 쉬고 싶을 지경이다.
그만큼 이젠 서로 지칠 만큼 지친 상태였다.
까앙-!
황보운룡이 결국 눈앞으로 날아오는 암기를 검으로 걷어 내며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곧, 반드시 지원군이 도착할 겁니다. 그때까지만 버텨 주십시오. ……화를 내어 미안합니다.”
그의 모습에 송하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사방에 널린 시신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죽음은 아니지만, 처참하게 널린 시신들의 모습을 차마 아무렇지 않게 볼 자신이 없었다.
죽음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냉혹한 곳.
그곳이 바로 무림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송하가 비익검을 내려다보았다.
핏물을 잔뜩 뒤집어쓴, 마치 처음부터 붉었던 것처럼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눈꺼풀이 무겁고, 온몸은 물먹은 솜 같은 느낌이다.
‘……그만두고 싶어. 그냥 이대로 죽으면 편할까?’
흐려지는 정신 속에서, ‘포기할까?’ 라는 마음이 들 무렵.
송하의 마음에 문득, 번쩍 하고 불이 튀었다.
집에서 자신을 믿고 기다리고 있을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둘째 오빠와 여전히 다른 전장에서 싸우고 있을 자신의 첫째 오빠, 송운이 떠오른 것이다.
자신이 잘못된다면 분명 부모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을 터다.
‘그래. 운이 오빠보고 살아 돌아오라 해 놓고 내가 죽어서 갈 수는 없어. 어떻게든 살아서 가족 품으로 돌아갈 거야. 반드시!’
생각이 빠르게 전환된 송하의 눈에 다시 생기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채쟁-!
그러곤 날아오던 검을 쳐 내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절대 안 죽을 거야. 두고 봐.”
송하의 두 손이 비익검을 꽉 틀어쥐었다.
* * *
계속되는 싸움에 상당히 지칠 만도 하건만, 여전히 귀마병만큼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지독하구나. 애당초 인간이 아니니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긴 하겠지만…… 이대로 가면 반각 안에 모두 죽는다.’
황보운룡이 이를 꽉 깨물었다.
더 이상 끌면 내공이 완전히 바닥날 터.
마음이 다급해진 황보운룡이 서둘러 안력에 힘을 실었다.
‘저기다!’
그리고 머지않아 주변을 파악한 결과, 저들이 만들어 낸 인간 방벽 중에 가장 허술한 곳을 찾을 수 있었다.
황보운룡이 서둘러 송하와 장명도의 곁으로 뛰어갔다.
그러자 묘하게 셋이서 나란히 등을 댄 자세가 되어 버렸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장명도였다.
“황보 소협. 더 이상 각개 격파는 무리요. 생각보다 놈들의 무위가 높소. 특히 곽태보, 그자! 실력이 보통내기가 아니오.”
장명도가 멀리서 실실 웃고 있는 곽태보를 바라보았다. 몇 수를 겨뤘으나 장난을 치는 듯하면서도 단 하나의 검도 허투루 내지르는 적이 없다.
오히려 그가 자신을 가지고 노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미 절반 이상 내공을 소비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바로 저 틈을 파고들려 합니다. 모두 힘을 합하여 저곳을 뚫으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 겁니다.”
“확실한 것이오?”
“마침 저쪽이 아까 들어온 길목과 일치합니다. 믿어 주십시오.”
“잘못 움직이면 정말 다 죽는 것이요. 판단을 잘 내려야 하오.”
“……알겠어요. 뭘 어찌하면 돼요?”
장명도가 주춤하고 있을 무렵, 송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장명도도 더는 토를 다는 것을 포기했다.
황보운룡이 목소리를 낮추어 읊조렸다.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다섯을 세면 제가 먼저 저곳을 향해 뛰어가 저 셋을 칠 겁니다. 하면 송 소저와 장 소협께서 제 뒤를 받치며 따라오면 됩니다.”
“알겠어요. 하지만 이건 우리뿐만이 아니라 아직 남은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야 해요. 우리만 살아서 나갈 수는 없어요.”
“하나 송하야, 그리되면…….”
“알아요. 움직임이 커져서 실패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거. 하지만 우리만 살 수는 없어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말을 마친 송하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장명도 역시 자신의 가문 사람들이 소중하지 않을 리 없었다.
결국 고개를 주억였다.
단 몇 명이라도 함께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살리는 게 맞다.
“그럼, 제가 먼저 길을 뚫을 테니 모두 함께 뒤따라오셔야 합니다.”
장명도가 가장 먼저, 남은 열 명의 무인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무인들인 만큼, 전달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로의 눈동자가 마주치자, 황보운룡이 다섯을 셌고 정확히 다섯을 세는 순간 미리 보아 둔 그곳을 향해 달려들었다.
“커억……!”
서걱!
“쿨럭!”
순식간에 달려든 황보운룡의 검을 피하지 못한 혈사련의 무인들이 쓰러졌다.
‘됐다!’
속으로 쾌재를 외친 황보운룡의 뒤로, 장명도와 송하 일행이 재빠르게 달려갔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곳을 뚫고 나간 황보운룡의 두 눈이 위아래로 크게 요동쳤다.
“어딜 가려는 게냐? 흘흘.”
공손우경을 비롯한 귀마병 열 구가 그들의 길을 막고 서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