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3화
파밧-!
선공을 펼친 건 양의문이었다.
양의문의 검은 정확히 송운의 심장을 겨냥해 파고들었고, 송운이 가볍게 몸을 비틀어 피했다.
“큭, 몸은 제법 날쌔구나.”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양의문이 아니었다.
양의문의 두 눈이 잠시 감겼다 뜨였다.
동시에 그의 검 끝에 매화꽃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이글거리는 꽃잎은 만지는 순간, 불타 버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수십 개의 매화꽃이 송운을 향해 비산하기 시작했다.
쌔애애액-!
카가강!
콰과과과과-!
몇몇 개의 매화꽃은 송운의 검에 의해 갈 곳을 잃고 마저 피지 못한 채 져야 했고, 나머지는 모두 애꿎은 땅에 박혀 터져 나갔다.
그렇게 땅이 모두 파이고, 나무가 부서져 나갔다.
오랜 세월 동안 아름답고 웅대하였던 화산파의 모습이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피해는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
다행히 송운의 몸을 스친 매화꽃도 호신강기로 인해 피해를 주지 못했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한번 피기 시작한 매화꽃은 마치 양의문이 거대한 매화나무인 것처럼 계속해서 피어오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목숨을 내건 자다. 죽기 전까진 검을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 정신 차려라, 송운!’
사방으로 퍼져 나간 양의문의 매화꽃은 이윽고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기 시작했다.
아래에선 모든 걸 불태우는 매화꽃이, 위에선 검기가 날카롭게 날이 선 채로 무인들에게 날아가며 피해를 입히기 시작한 것이다.
송운의 이마를 타고 굵직한 땀 한 방울이 떨어졌다.
‘……집중하자.’
송운이 자신의 머리와 심장을 눈앞에 그려내, 복부와 연결시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주변에 흐르던 자연의 기운들이 송운을 중심으로 뱅뱅 돌며 모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얼마가 흘렀을까.
송운의 상단전이 열리고, 중단전과 하단전이 동시에 열렸다.
그러자 극도의 집중력과 미세한 조절에 따라 그의 손끝에서 마치 실처럼 가느다란 검기가 뽑아져 나왔다.
파앗-!
하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송운의 눈앞에 점이 그려지며 마치 성좌처럼 양의문의 검의 궤도가 보였다.
그 검의 궤도와 함께 양의문의 기운이 움직이는 혈도까지 파악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또다시 양의문의 검 끝에 수 십 개의 매화가 피어오르는 장관이 펼쳐지던 그때.
‘됐다.’
퍼퍼퍼퍼펑-!
눈 깜짝할 사이 송운이 검을 쥔 손을 완만하게 내뻗었다. 이에 피어오른 매화꽃들이 모두 다 폭죽이 터지듯 터져 나갔다.
그리곤 검기로 둘러싸인 송운의 검이 정확하게 그 속을 파고들어 양의문의 목울대를 치고 들어갔다.
이곳의 그 누구도 그의 손놀림을 보지 못할 정도였다.
마치 빛과 같은 속도였다.
푸욱!
“……? 네 이…… 놈.”
툭-
양의문의 핏대 선 목이 바닥에 떨어지고, 마침내 송운의 검이 지잉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찌나 깔끔히 절단되었는지 목에선 핏방울조차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고, 끝을 맺었다.
“……장문인!”
앞을 막아 볼 새도 없이 주군이자 모든 것이었던 양의문이 죽음을 맞이했다.
가면 쓴 사내의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자신의 검을 그대로 심장에 내리꽂았다.
푸욱-
“컥…….”
가면 쓴 사내를 시작으로 몇몇이 그렇게 삶을 버리고 바람 앞에 놓인 등불처럼 애처로이 쓰러져 갔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막을 겨를도 없었다.
“……와아아! 승리입니다!”
“와아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어안이 벙벙하던 무림맹의 무인들이 큰 소리로 외쳤고, 남궁진혁의 얼굴에도 그제야 약간의 미소가 걸렸다.
“남은 자들은 모두 검을 버리고 투항하라! 그러지 않으면 오늘 이 자리에서 화산의 매화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텅- 터더더덩!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남은 화산파의 무인들이 각자의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이미 화산파의 핵심 세력이 무너진 마당에 버티다 잡히면 결국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을 이끌던 양의문과 그의 조카 양자청이 모두 죽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체 무엇을 위해 버틴단 말인가.
하물며 남은 무림맹의 무인들은 아직도 이백이 넘었다.
오롯이 송운 혼자 양의문을 처리해 버린 덕이다.
양의문과 생사결을 겨룬 송운은 아직도 건재하며 무림맹의 무인들도 역시 전부 최정예 부대다.
더 이상 희망은 없었다.
남은 이들 중 가장 높은 권한을 쥐고 있는 화산파의 일대 제자이자 장로인 하겸길(何謙吉)이 굳게 닫혔던 입술을 떼었다.
그저 말 한마디일 뿐이건만, 그의 목소리는 마치 태산과도 같이 무거웠다.
“이제라도 항복하면 화산파의 제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겠소이까?”
“…….”
남궁진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에 더 이상 불복하지 않겠소이다. 항복이오.”
하겸길의 갈라진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고, 화산파 무인들의 얼굴에 작은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때마침 하겸길의 뒤에서 조양(朝陽)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탓에 그의 얼굴이 더욱 그늘져 보이는 것은 그저 착각만은 아니리라.
툭.
오랜 세월 강렬하게, 때로는 아름답게 피어올랐던 붉은 매화가 지는 순간이었다.
第五章. 격전
모두가 술과 정사에 찌들어 잠든 묘시.
이른 새벽의 이슬이 차갑게 옷을 적셨다.
일반적인 잠입이라면 이 시간을 가장 피하려 하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몇 날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바로 지금이 대다수가 잠에 깊게 빠져드는 시간이었다.
심지어 문지기들조차 태만해져 있는 것을 전부 확인한 마당에 더는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누구…….”
퍽!
“컥……!”
서걱-
최대한 은밀하게 내기를 드러내지 않은 채 총 서른세 명의 무인들이 혈사련의 주요 인물들이 모여 있는 방 앞으로 집결했다.
은신술로 몸을 숨긴 채, 하나하나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경비병을 죽이며 앞으로 전진하다 보니 어느새 방 앞에 당도한 것이다.
스슥-
“신호하시는 대로 침투하겠습니다.”
반대편 기둥에 서서 몸을 숨긴 황보운룡의 얼굴이 장명도를 향했다.
함부로 소리를 내서는 안 되니 입 모양만으로 말을 전했고, 장명도가 알아들었는지 곧 고개를 끄덕였다.
* * *
“드디어 쥐새끼들이 왔나 보구나.”
쥐 죽은 듯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냉가혜의 눈이 번쩍 뜨였다.
냉가혜 특유의 냉엄한 눈빛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세상 물정 모르는 듯 곤히 잠에 빠진 두 아들의 볼을 쓰다듬으며 허공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과는 달리 손길만큼은 그 어떠한 것보다 부드러워, 상이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하나 그 모습이 익숙한지,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사내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어찌할까요?”
“조금 더 놔둬라. 아직은 이르다. 더 깊숙이 빠져나갈 수 없는 곳에 들어섰을 때, 그때가 죽일 기회이니. 나도 곧 나가겠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소가주님.”
* * *
장명도 일행의 계획은 완벽했다.
스릉-
채쟁-!
분명 다들 곯아떨어진 것까지 확인했다.
주변에 더 이상 기척이 없는 것도 확인했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계획이 어그러졌다.
검을 든 무인들이 나타남과 동시에 자고 있는 줄만 알았던 자들이 모두 멀쩡히 일어난 것이다.
곽태보와 정무봉, 추일공까지 모두 말이다.
“쥐새끼가 잠입한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구나.”
“이런 건 확실한 편이지.”
송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모든 계획은 완벽했는데……! 어째서……?”
으득.
“아무래도…… 중간에 정보가 샌 듯싶다. 내 잘못이다.”
장명도가 이를 갈았다.
송하의 말대로 계획은 완벽했다.
한데 들켰다는 것은 도중에 정보가 샜다는 뜻이었다.
어디서,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대체 누구로부터 정보가 흘러나간 것일까?
그 누구보다 충성심이 강한 이들로만 구성된 일행이지 않은가.
잠시 혼란에 빠져 있던 그때, 익숙한 음성이 장명도의 귓가를 날카롭게 때렸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했습니다.”
황보운룡의 목소리가 채찍이 되어 장명도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래, 이러고 있을 여유가 없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최우선이다.’
동시에 황보운룡이 흔들리는 송하의 눈을 바라보며 그녀의 어깨를 세게 붙잡았다.
“송 소저! 정신 차리십시오. 여기서 이러면 다 죽습니다.”
그 순간, 늙고 허리가 휜 노인의 눈에 안광이 번쩍하고 비쳤다.
공손우경이었다.
미리 냉가혜에게 소식을 접해 들은 공손우경이 송운의 여동생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번 작전에 껴 달라고 부탁을 했던 것이다.
“호오? 송 소저라…… 혹시 송운인가 뭔가 하는 개자식이랑 연관이 있는 겐가?”
흘러가는 듯 내뱉은 공손우경의 말에 송하가 격렬히 반응했다.
“개자식이라니! 이 빌어먹을 미친 노괴야! 그 더러운 입으로 우리 오빠를 모욕하지 마!”
송하의 사나운 반응에 공손우경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킥킥, 그래그래! 네년이로구나, 송운의 여동생이라는 년이? 혹여 실수할까 했는데, 이리 반응을 격하게 해 주니 고맙구나.”
“이 미친놈이 감히 어디에 대고 삿대질이냐!”
“네놈은 나를 상대해야 할 텐데? 어딜 보는 거지?”
자꾸 송하를 자극하는 공손우경의 모습에 보다 못한 장명도가 나서려 했으나, 누군가 그의 앞을 막았다.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모습의 곽태보였다.
그의 살기 어린 눈빛은 마치 당장이라도 모든 걸 부숴 버리겠다는 듯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네 이놈!”
채쟁-!
카가가각!
더 이상 말은 불필요했다.
곧바로 검과 검의 대화가 펼쳐졌고, 장내는 혼돈에 휩싸였다.
“하악……! 하악……!”
얼마나 많은 검초가 오갔을까.
계속되는 전투로 인해 송하의 숨이 점점 가빠왔다.
그나마 초고수 반열에 접어들었기에 이 정도로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송하의 지친 모습에 공손우경의 눈빛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끈적하고, 음험해졌다.
“송운 그놈도 무위가 높더니 동생이라는 년도 제법이군. 좋다. 내 특별히 두 마리를 추가해 주마. 이놈들아, 저년이 죽거나 다치면 재미가 없어지니 살살 다루어라. 클클.”
그러자 송하의 앞에 웬 이상한 시체 같은 외모의 두 명이 튀어나왔다.
쿵-! 쿵-!
이미 백여 명에 가까운 무인들이 송하 일행을 둘러싼 상태.
그것도 버거운데 거기에 갑자기 추가된 기괴한 자들의 모습에 송하는 물론이고, 황보운룡과 장명도를 비롯한 무인들의 눈빛에 당황이 서렸다.
“저건…… 대체 뭐야? 사람? 아니, 설마…… 강시?!”
송하는 얼핏 예전에 오빠들의 대화를 주워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얼핏 겉으로 보기엔 사람 같으나 두 눈엔 생기가 없고 시퍼런 피부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자들이라고 했어……. 하지만 저들은 사람처럼 유연해 보이는데?’
그런 송하의 궁금증을 해결해 준 건 유감스럽게도 공손우경이었다.
“강시라고 보기에도 사람이라고 보기에도 어려운 물건이니라. 크흐흐흐, 네년의 오라비가 내 진짜 강시들을 모두 죽여 버렸지. 그 일만큼은 죽어서도 잊지 않을 것이야. 네년의 시체는 내 요긴하게 써주마. 클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