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2화
“후우…… 후욱……!”
검을 거둬들인 송운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하나 그럼에도 결코 예전처럼 피를 토한다거나 쓰러지거나 하는 모습 따위는 없었다.
이미 경지를 뛰어넘으며 몸으로 한번 학습한 것을 응용한 덕분이다. 빠르게 선천지기를 이용해 기를 사용함과 동시에 몸 내부까지 감싸면서 내기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몸이 안정되는 것을 느낀 송운이 주변을 다시 살폈다. 천천히 기로 훑어보니 다행히도 무림맹 무인들 측에는 피해가 닿지 않은 듯했다.
그 속에서 살아남은 화산파 무인들은 절반이나 남았을까?
사방에는 살육의 증거가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하나 그 중심에 서 있는 송운의 모습에는 단 하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다.
좀 전과는 달리 그런 송운을 보는 대다수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비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이렇게 광범위한 공간을 단 한 번에 베어 버릴 수 있는 무인이 이 세상에 얼마나 존재하겠는가?
무림맹 무인들조차 멍한 시점에, 여세를 몰아붙이려는 듯 남궁진혁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선 목소리에 내기를 담아 외쳤다.
“지금 당장이라도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 것이다! 우리는 너희를 벌하러 온 것이 아니라 현 화산파의 장문인 양의문과 그를 지지하는 자들을 벌하러 온 것이니, 살고자 하는 자는 무기를 버려라! 그리하면 훗날 무림맹에서 너희들을 거두고 선처할 것이다.”
남궁진혁이 말을 멈추고, 조금의 시간이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질 무렵.
투둑-
챙그랑-!
이내 몇몇 무인들이 무기를 손에 놓고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시작은 몇 명이었으나 계속해서 그 숫자는 늘고 있었다.
“이런 멍청한 놈들 같으니라고! 대체 어딜 가는 것이냐! 당장 검을 들어라!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 자는 내 훗날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양의문의 두 눈이 벌겋게 변한 채로 외쳤지만, 이미 마음을 돌린 화산파 무인들에게는 무용지물인 듯했다.
스릉-!
“뒷걸음질 치는 놈들은 가장 먼저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양의문의 곁에 서 있던 가면 쓴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무기를 버리고 문파를 버린 채 도망가려는 이들의 앞길을 막아선 것이다.
그를 알아본 몇몇은 도망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움찔거렸지만 그뿐이다.
다시 나아간다.
서걱-
가면 쓴 사내의 검에 첫 번째 무인이 베이고 열 명이 차례대로 쓰러졌다.
이 모든 게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었다.
“비, 비켜! 난 살 거야! 살 거라고!”
“막아라. 죽어도 모두 이곳에서 함께 죽어야 할 것이다!”
“예. 장문인.”
순식간에 장내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이제는 어느 쪽이 아군인지 적인지 모를 만큼 화산파가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검과 피의 지옥 속에서 양의문의 눈에 익숙한 자가 들어왔다.
자신의 조카인 양자청이었다.
“그래, 자청아! 나와 함께…….”
양의문이 손을 내민 순간, 양자청의 입에서 한겨울 밀물처럼 차가운 한마디가 그의 가슴에 들이쳤다.
“송구합니다, 숙부님. 저는 훗날을 기약해야겠습니다.”
반가움을 표하던 양의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입꼬리를 부들부들 떨며 화가 난 듯, 나지 않은 듯 괴이한 표정이었다.
“다시 한번……! 다시 한번 말해 보거라.”
“송구합니다. 숙부…… 컥?”
하나 양자청의 대답은 이어지지 못했다.
스걱-
털썩.
양의문은 기다란 검이 양자청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고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양자청마저 눈앞에서 죽음에 이르자, 양의문이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이성은 통째로 날아갔다.
“감히…… 감히 나의 화산파를-! 크아아아악! 오늘 이곳에서 아무도 살아서 나가지 못하리라!”
쿠과과과과-!
순식간에 양의문의 몸 주변으로 형성된 살기의 폭풍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를 중심으로 지면이 흔들리고 주변의 나무가 휘청거렸다.
그 여파에 제법 많은 무인이 휩쓸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아군과 적군의 의미는 없었다.
조화경에 다다른 자의 폭주는 그야말로 재앙 그 자체였으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송운과 평서란이 외쳤다.
“모두 피하십시오!”
“내기로 막을 치고 뒤로 물러나세요!”
“아무래도 안 되겠소. 내가 나서야 할 듯싶소. 란 매는 모두를 이끌고 뒤로 물러나 계시오.”
“하나 운 가가……!”
아무리 송운이라고 한들 저 광란의 폭주를 어찌 막을 수 있을까?
그 누구보다 송운에 대한 걱정이 가장 큰 평서란으로서는 쉽사리 따를 수 없는 말이었다.
게다가 이미 한 번 그를 두고 혼자만 살길을 찾아 떠난 적이 있지 않던가.
그럼에도 송운은 굳건했다.
“날 믿소?”
단단하며, 굳은 의지가 비치는, 그리고 반짝반짝 빛나는 송운의 두 눈이 평서란의 눈동자에 담겼다.
자신을 믿어 달라는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들어차 있었다.
그는 언제나 소중한 것을 지킬 때 가장 빛이 났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불안감을 무시하고 보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끝까지 잡아야 하는 걸까.
스륵.
결국 평서란이 꽉 붙잡고 있던 송운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절대 다치지 마세요.”
“믿어 주어 고맙소. 내 꼭 무사히 귀환하리다.”
송운은 평서란에게 한번 미소 지은 뒤,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몸짓은 마치 한 마리의 새와도 같이 가벼웠다.
* * *
송하와 황보운룡, 그리고 장명도가 한자리에 뭉쳤다.
희미한 달빛조차 먹구름에 가려 사방이 어둑한 상황인지라, 작은 초롱불에 의지한 그들은 눈앞에 놓인 종이에 온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일까?
평소와는 달리 송하의 눈빛도 제법 진지해져 있었다.
셋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장명도였다.
사방을 다시 둘러보며 안전을 확인한 뒤였다.
“간신히 구해 놓은 연회장 내부 구조요. 다 죽일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어차피 혈사련의 우두머리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으니 그놈들만 치면 남은 녀석들은 알아서 무너질 터.”
장명도의 눈에는 자신감이 차올라 있었다.
‘이 상황에 자신감은 독이다. 근거가 필요해.’
황보세가 역시 스스로의 외공에 지나치게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탓에 혈교에 쉽게 무너진 것이다.
외공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내공에도 깊은 조예를 지녔다면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붕괴되진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황보운룡이었다.
모두의 안전이 달린 문제인 만큼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리라.
하나 그렇다고 해서 우려하는 바를 그대로 말한다면 상대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황보운룡이 말을 돌렸다.
“……장 소협, 그들이 우두머리를 치는 것만으로 무너질 거라 보십니까?”
“그렇소. 아직 놈들은 오합지졸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상태요. 혈사련으로 다시 화합의 장을 마련하였으나, 이십여 년 전 그들은 스스로 자멸한 전적이 있지 않소? 설령 우리가 잡히더라도 곽태보에게 의뢰를 받았다고 둘러대면 그때부턴 내부의 싸움이 될 게요. 서로를 끊임없이 의심하다 결국엔 알아서 무너지겠지.”
“만일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더 악에 받쳐 버틴다면 어찌할 셈입니까?”
황보운룡의 말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한 것일까.
장명도가 고개를 주억이며 말을 이었다.
“그때야말로 진정 죽을 각오를 하고 싸워야 할 것이오. 또한 만약을 대비해 곧바로 후방조가 올 수 있게 지원군을 요청한 상태이고…… 소림사에도 서신이 당도했을 테니 뒷일은 보장되었소. 내 황보 소협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잘 알고 있으나, 나 역시 나와 내 친우의 여동생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소.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장명도의 답을 다 듣고 난 후에야 황보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가올 새벽은 어때요? 어차피 밤낮 가릴 것 없이 취해 있는 녀석들인데, 그 시간이라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번엔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송하가 먼저 제안했다. 한시라도 빨리 상황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리라.
어찌 그 마음을 모를까.
그럼에도 장명도는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은 날이 영 좋지 않다. 아직 준비도 다 마무리되지 않았고…….”
“그럼 언제요? 이제 겨우 삼 주야 남았어요. 더 놔두면 점점 세력이 집결할 거예요.”
송하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느껴진다.
“내일이다. 내일이면 완벽하게 준비가 끝난다. 그러니 하루만. 딱 하루만 더 내게 시간을 다오. 송하야, 내 마음 역시 너와 같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한다.”
송하의 눈동자가 황보운룡을 향했지만 그 역시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결국 비 맞은 강아지마냥 송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알겠어요. 그렇게 해요.”
* * *
“당신이 양의문입니까?”
양의문 앞에 선 송운은 정제되지 않은 기를 그대로 몸으로 받아 냈다.
그럼에도 멀쩡할 수 있는 건, 송운이 내공으로 온몸을 칭칭 둘러싼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던 이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양의문도 놀라운 건 마찬가지인 듯했다.
하나 이러한 상황에서 괜한 호기심을 표현했다간 순식간에 당하고 말리라.
양의문이 송운에게 점점 다가가며 놀라움을 숨긴 채 외쳤다.
“오냐. 내가 바로 그 양의문이니라! 이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감히 나의 화산파를 망치려 들다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감히 우리 대화산파를 넘봐!”
구구구궁-
양의문의 잘 다듬어졌던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붉은 핏발을 세운 눈동자는 온통 악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인간의 이성을 저버린, 결국 자신의 욕망을 이겨 내지 못한 자의 모습이었다.
그걸 지켜보던 송운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서둘러 외부로 살포되고 있는 양의문의 살기 섞인 기운을 가라앉혔으나, 그로 인한 여파인지 여전히 주변은 진동하고 있다.
더는 안 된다.
“여기서 멈추십시오.”
“크크큭, 내가 너 따위 애송이의 말을 들어야 하는 연유가 무엇이냐?”
“장문인께서 멈추지 않는다면 화산파의 미래도 없습니다. 하나 이제라도 멈추신다면 화산파의 몰락만큼은 막아 달라 청을…….”
“닥쳐라! 더는 말로 하지 않겠다.”
스릉-!
송운의 설득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양의문이 먼저 검을 뽑아 들었다. 죽을지언정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대문파의 장문인답게 양의문의 기운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내력이 약한 이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서 있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흉폭함이었다.
자칫 저 기운에 말려들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광폭한 기운이 줄기줄기 뻗어 오자 남궁진혁이 외쳤다.
“살고 싶거든 모두 십 보 이상 물러나라! 어서!”
“……예!”
잠시 머뭇거리던 이들도 모두 발을 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