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1화
계획했던 칠 주야 중 어느덧 절반이 흘렀다.
연회장 주변이 온통 술 냄새와 남녀 간의 은밀한 정분을 나누는 냄새로 가득 들어차 냉가혜의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들에겐 나이가 적고 많음, 혹은 신분 따위는 그리 중하지 않은 듯했다.
‘……참으로 더럽구나.’
괜히 속이 울렁이는 것 같았다.
더는 그 속에 있는 것을 포기한 냉가혜가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긴 했지만 이곳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명은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빠른 걸음으로 연회장에서 빠져나온 냉가혜는 누구의 집인지도 모를 곳의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그나마 가장자리를 벗어나 나오니 찬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식혀 주었다.
하늘 위로 뜬 초승달을 바라보며 냉가혜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남편을 두었지만 그다지 사랑하진 않는다.
그저 아버지의 대를 잇기 위해 자식을 낳았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성욕보다는 야망이 더 컸고, 여인으로 태어났으나 타고난 정복욕이 그녀를 여기까지 키워 냈다.
그때, 그녀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옴을 느꼈다.
“소가주님. 보고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잠시 곤란한 눈빛을 한 사내는 한참 머뭇거리다 입을 떼었다.
“그것이…… 아무래도 밖에 쥐새끼들이 몰려온 것 같습니다.”
하나 정작 냉가혜는 침착하고 차분한 눈빛이었다.
“쥐새끼들이? 어디 소속인 것 같았더냐?”
“워낙 적이 많으니…… 어디라고 딱 집어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송구합니다.”
“아니다. 그것이 네 잘못은 아니지. 어차피 모두 처리하면 그만이다.”
사람을 죽이라는 말에도 냉가혜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기가 풀풀 날렸다.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적이 있으면 친다.
그리고 다시 새로 위치를 다진다.
그것이 여태껏 그녀가 이 자리까지 올라오게 만들어 준 단순하지만 쉽지 않은 방법이다.
“급작스레 세력을 키우고 있으니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차라리 우리가 먼저 나서서 치는 것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일단 기다려라. 섣불리 움직이면 놈들도 더 경계를 강화시킬 터이니.”
“……예. 그리하라 이르겠습니다. 소가주님.”
사내가 물러가기 무섭게 좀 전의 불쾌하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냉연한 눈빛만이 남았다.
* * *
이른 새벽.
아직 동도 트지 않을 무렵, 제법 많은 인영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타다닥!
얼마나 지났을까.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각자 줄지어 움직이는 그들의 눈앞에 놓인 것은 다름 아닌 웅장한 위용을 온몸으로 내뿜고 있는 화산이었다.
‘드디어 오늘이구나.’
송운이 고개를 들어 화산을 바라보았다.
높디높은 화산은 조금만 발을 잘못 디뎌도 까딱하면 목숨을 잃기 십상인 곳이다.
송운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뒤를 돌아보니 많은 이들이 어둠에 가려 몸을 숨기고 있었다. 각자가 기운을 숨긴 채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럽게 저 문이 열릴 그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대략 삼백 명 정도 되는, 오룡일봉은 물론이요, 이번 혈교와의 대전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고수들이 대거 투입된 작전이었다.
송운이 평서란의 손을 한번 꼭 잡았다.
‘부디 큰 피해가 없어야 할 터인데…….’
작전의 시작은 저 문이 열리는 그때다.
어차피 이미 이곳까지 많은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을 양의문이라면 눈치챘을 터.
만일 계획이 어긋나면 곧장 그대로 진격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주변의 공기가 잔뜩 긴장감으로 에워쌌다.
“……곽 소협이 잘 해낼까요?”
평서란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송운에게 물었다.
“믿고 기다리면 되는 것이오. 우리가 당장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 없구려.”
앞으로 남은 시간은 반각.
어둠이 그들을 잠식하고 있었다.
第四章. 매화꽃이 지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초조한 목소리가 이번 작전의 우두머리인 남궁진혁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장로님, 더 기다리면 늦습니다. 아무런 기척이 없지 않습니까? 이미 곽철우의 계획이 들키고 상황이 종료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도록 하지. 아직 조금의 시간이 더 남아 있네.”
“하나, 그리되면!”
“어허, 목소리를 낮추게. 적진의 코앞이지 않은가.”
이를 제지한 건 남궁장호였다.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비장해 보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남궁장호와 남궁진혁의 마음도 타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움찔.
‘내부의 움직임이 있다. ……썩 좋지 않군.’
송운이 조용히 사방으로 퍼뜨린 내기를 운용했다.
아직까지 잠잠했던 기운이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바깥으로 새어 나오지 않는 미세한 살기들이 내부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결국 송운의 닫혔던 입이 열렸다.
“움직여야 합니다.”
“하나 송 소협. 일단 기다리는 것이…….”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곧바로 뛰쳐나갈 준비를……!”
송운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을 채 마치기도 전이었다.
끼익-
쾅!
우당탕탕!
굳게 닫혀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곤 한 인영이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졌다.
털썩.
“누군가 나, 나왔다. 문이 열렸습니다!”
“모두 경거망동 마라!”
“……아.”
누가 튀어나왔는지도 모를 그때, 팽후영의 바싹 마른 입가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거리는 멀었지만 누군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오룡일봉이 모두 같았다.
동시에 송운이 그대로 쓰러진 자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 속도가 너무도 빨라 차마 그 누구도 말릴 틈은 없었다.
“곽 소협!”
“형님-!”
“송…… 소협. 곧 ……쿨럭! 무, 문이 닫힐 겁니……쿨럭! 어서 들어가십시오!”
검붉은 피를 토해 내는 곽철우의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더는 지체할 시간 따위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챈 송운이 외쳤다.
“젠장, 모두 들어가십시오!”
그 말을 기점으로 더 이상의 지체는 없었다.
사태의 위급성을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모두가 화산파의 문으로 들어서려던 그때.
안에서부터 묵직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양의문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수백여 명의 화산파 무인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크큭, 결국 무림맹 네놈들과는 이리 생사를 나누는구나. 애당초 이렇게 될 일이었지. 한데 설마 이런 귀여운 짓을 벌일 줄이야.”
스릉-!
“닥쳐라! 화산파가 배반하지만 않았어도 이번 전쟁에서 그리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대를 도발하는 말에 남궁진혁이 먼저 욱하여 검을 빼 들었다.
하나 이는 곧 남궁장호에게 막혔다.
“흥분을 가라앉히어라.”
“하나 아버지! 저놈이……!”
“놈은 작금 누구보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무너지기를 바라고 있을 게다. 저런 어쭙잖은 도발에 넘어가지 마라.”
그들이 기 싸움을 벌이는 동안 양측이 모두 팽팽하게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하나 이조차 얼마 가지 않았다.
“기어코 우리 대화산파의 젊은 인재를 버리게 만든 점은 절대 그냥 지나치진 않을 것이다.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해 줄 터이니.”
송운의 눈동자 속에 어딘지 모르게 분에 차 보이는 양의문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거기에 붉게 비치는 안광은 그야말로 악귀 같았다.
“모두 쳐라.”
“쳐라!”
그 말을 시작으로 양측이 서로 엉키는, 그야말로 혈전이 시작되었다. 주변이 피바다로 물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일이 어렵게 꼬였구나.”
송운은 곧바로 튀어 나가려던 몸을 돌렸다.
그러곤 잠시 곽철우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며 급히 몇 군데의 혈 자리를 짚었다. 이미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곽철우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걸로 출혈을 막고 어지럽혀진 내기의 날뜀을 진정시킬 수 있을 터.
작금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치였다.
턱.
그런 송운의 손 위에 곽철우의 손이 놓였다.
보는 사람조차 힘겨워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송…… 소협…… 덕분에 마음이 조금 놓입니다. 우욱!…… 본 파의 추악함을 보여…… 정말 미안합니다.”
“곽 소협. 움직이지 마십시오. 마무리 짓고 오겠습니다. 부디 조금만 더 버텨 주십시오.”
“감…… 사합니다.”
스르륵.
송운의 말에 곽철우가 조금은 편안해진 표정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곽철우가 기절한 것을 확인한 송운은 그를 한 곳에 눕혔다.
‘꼭 살릴 테니 절대 죽지 말고 버티고 계십시오.’
송운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전장은 피투성이가 된 상황이었다.
좀 더 주위를 살피니 사방으로 날뛰고 있는 평서란과 오룡일봉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직까진 눈에 띄는 상처를 입진 않은 듯 보였다.
약간의 안도의 한숨을 내쉰 송운이 다시 시야를 돌렸다.
그 외로 제법 많은 무인이 쓰러지고 목숨을 잃은 상태.
다행이라면 대다수는 화산파의 복장을 한 자들이라는 점일 터다. 그들의 붉은 혈은 곳곳에 피어 자란 나무들과 돌 사이에 마구 튀어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무림맹 측의 무인들에게 피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이쪽 역시 인원에 비하면 크고 작은 상처를 많이 입은 상황이었다.
숫자로 치면 화산파가 훨씬 유리한 상황이니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이대로 가면 승산을 점칠 수 없게 되는 상황이다.
‘……후우.’
송운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그러곤 왼손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결국…… 시공검을 사용하는 게 가장 빠르단 말인가.’
워낙 광범위한 검법이다.
자칫하면 같은 아군조차 베어 버릴 수도 있는 검.
다행이라면 예전과는 다르게 날뛰는 시공검을 어느 정도 스스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일 터다.
그러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아군의 피해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고민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평서란에게 다가간 송운이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무조건 내 뒤에 있으시오. 앞은 위험할 테니.”
그 말을 알아들은 평서란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되는 마음에 말리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만큼 좋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송운이 마음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눈을 한 그가 곧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기 시작했다. 가장 화산파의 무인들이 많이 있으면서, 아군이 적은 쪽을 노리기 위함이다.
파악을 끝낸 송운이 목소리에 내력을 실어 허공에 읊조렸다.
“모두 피하십시오. 어서!”
마치 곁에서 말하듯 생생하게 들린 송운의 목소리에 모두가 생명에 대한 위협을 감지했다.
이미 한번 송운의 경지를 눈으로 직접 겪은 몇몇 무인들이 다급하게 외치기 시작했다.
“피해라!”
“모두 물러나라!”
사방이 외침으로 정신없을 그때.
송운이 조용히 검파를 쥐었다.
‘너는 내가 만들어 낸 존재다. 그것이 비록 살의를 담은 검일지라도. 내가 원하는 곳에서만 그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곤 속으로 마음을 가다듬은 송운이 발검하며 감았던 두 눈을 번쩍하고 떴다. 동시에 그가 들고 있던 검이 거대한 허공을 가로질렀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서걱-
“끄륵…….”
“꺼어억……!”
쿠과광!
그 검 한 번으로 인하여 반경 십 리에 있던 물체들은 사람, 바위, 나무 할 것 없이 모조리 썰려 나갔다.
참으로 거대하고도 기괴한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