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0화
혈교가 무너진 지 구 주야 째 되는 날의 해가 졌다.
‘……정말 이젠 내일이로구나.’
곽철우의 눈빛에 깊은 고뇌가 물든다.
잠시 떠다 놓은 물로 입을 축인 곽철우는 하루 동안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둬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몸을 이끌고 바깥으로 나왔다.
스륵-
곽철우가 움직이기 무섭게 그를 따라 누군가의 기척이 미세하게 들려왔다.
이젠 익숙해진 기척이었다.
신경을 끈 곽철우는 아무 일 없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 풍경을 둘러보며 시야에 화산파의 모든 것을 담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봐 온 풍경은 참으로 익숙했다.
스승인 양의조와도 자주 걸었던 곳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지.’
하나, 내일이 오면 이 모든 것들이 처참하게 붕괴되고 사라질 것이다.
이를 생각하니 다시 한 번 그의 가슴이 미어졌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너른 화산파를 한 바퀴 빙 돌고난 후에야 곽철우가 제자리에 멈추었다.
가장 결정적인 문 앞에서 말이다.
화산파를 들어올 때 거쳐야 하는 그곳을 자신이 열어 주어야 한다.
물론 그 과정까지 쉽지는 않을 터.
이미 깊은 밤이 되었는데도 지키는 이들은 삼십이나 있다. 그것도 절정 고수들이 말이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경비를 강화시킨 것이리라.
곽철우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서문에 이십, 그리고 남문에 삼십, 북문에 열, 동문에 이십이라…….’
경비병이라고는 하나 그들은 그저 세워 놓은 문지기에 불과하다.
화산파에는 천이백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모여 있다. 그중에 이백 명은 절정의 경지를 넘은 자들.
어쩌면 문을 열기 전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나 끝까지 이뤄야 한다.
그것만이 화산파가 저지른 만행을 용서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테니.
곽철우가 굳은 결심을 다지며 다시 발걸음을 옮길 무렵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어딜 그리 돌아다니는 게냐?”
양의문이었다.
‘역시 장문인은 장문인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긴 했지만 전혀 기척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의 등장에 곽철우가 잠시 놀랐지만, 곧바로 정신을 붙들었다.
“잠이 오지 않아 잠시 바깥바람을 쐬러 나온 길입니다. 장문인께서는 이 시간에 어인 일이십니까?”
“나야말로 화산의 모든 공간이 나의 것이거늘 돌아다니지 못하는 연유라도 있단 말이냐? 클클.”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면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천천히 마저 구경하십시오.”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핀 곽철우가 몸을 돌렸다.
“이 화산파는 훗날 네 것이 될 것이야.”
움찔.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오자 곽철우의 발걸음이 제자리에 멈추었다. 여태 들어 보지 못한 인자하고도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송구하오나 다시 여쭈어 보아도 되겠습니까?”
“말 그대로다. 내게는 후손도 없고, 그렇다고 이렇다 할 제자도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내 형님의 제자인 너에게 이 자리를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잠시 당황했던 곽철우가 떨려오는 마음을 가다듬고선 답했다. 곽철우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스승님의 아드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장문인께는 조카 되시는 분입니다. 그분을 몹시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분께 가겠지요. 저에게는 과분한 자리입니다.”
곽철우가 단호히 거절하자, 양의문이 그를 살살 어르고 달래기 시작했다.
“허어! 네가 큰 착각을 하고 있구나. 그 아이는 하나는 알고 열은 알지 못한다. 게다가 성격도 개차반이지. 겉으로 태가 나지 않을 뿐. 대체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다만……. 전혀 이성적이지 못해. 그런 녀석에게 우리 대화산파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는 법이지 않겠느냐?”
“……장문인.”
곽철우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양의문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비록 형님의 자리를 물려받긴 하였으나 적합자가 없어 그런 것뿐이다. 언제부터 이 화산파가 혈육끼리 세습을 하였단 말이냐? 그저 나는 형님의 유지를 받들어 이 화산파를 무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으려 했을 뿐이니라. 하나 그러기 위해서 우리 대 화산파는 결국 무림맹을 쳐야 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이 강호는 결국 강한 자가 지배하는 곳이니 말이야.”
계속되는 양의문의 말로 곽철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으득!
곽철우가 이를 꽉 깨물었다.
‘정신 차려라 곽철우!’
그저 입에 발린 소리일 뿐이다.
양의문은 그러고도 남을 자였다.
여기서 유혹에 넘어가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다.
“……오늘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송구하오나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장문인. 쉬십시오.”
“쯧, 그래. 그리해라.”
스륵-
곽철우가 자리를 뜨고 난 후, 가면 쓴 사내가 양의문의 곁에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봤을 땐 어떨 것 같으냐? 확실히 우리 편으로 남을 것 같으냐?”
“소신 역시 확실히 알지는 못합니다만…….”
“다만?”
“주군께서 이리도 생각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으니 마음이 완전히 떠나진 못할 것입니다. 어차피 본인 스스로 부정해도 결국 화산파의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어딜 간다고 한들 화산파라는 꼬리표는 떼지 못할 것입니다.”
“크하하하! 그래, 그래야지. 머리가 좋은 놈이다. 후기지수에 들었을 만큼 실력도 보장되었고…… 잘 키우면 조카 놈보다 더 쓸모가 있을 게야. 허튼 생각 품지 못하도록 잘 감시해라.”
“예. 주군.”
* * *
“……지원군이 설마 저분입니까?”
“어…… 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송하가 앞을 바라보며 아직 잠에서 덜 깬 채로 눈을 비비며 황급히 앞을 바라보았다. 다급히 자신을 깨운 황보운룡은 이미 검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여차하면 곧바로 그의 검이 적을 응징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였다.
‘어쩐지…… 얼굴이 낯이 익은데…….’
송하가 두 눈을 찌푸리며 상대를 쳐다보았다.
어젯밤, 아침 일찍 도착할 손님이 있으니 기다리라는 서신을 받았긴 했다.
하나 이제 겨우 인시 초나 되었을까?
그러니 당연히 황보운룡으로선 경계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한둘도 아니고 하나하나가 절정 고수에 가까운 삼십의 무인들이니 긴장을 안 하는 게 더 이상했다.
“반갑습니다. 이번 작전에 함께할 장명도라 합니다. 이거 받으십시오.”
장명도가 손을 뻗어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양조광의 인장이 선명히 찍힌 서신이었다.
촤락!
다급하게 서신을 펼쳐 본 송하가 글을 다 읽고 나서야 양측의 분위기가 완만해졌다.
“아…… 이거 괜히 오해했네요. 미안해요. 우리 큰오빠 친구분이시라고요?”
“하하! 맞습니다. 운이와는 친한 친구지요. 몇 해 전 운이의 약혼식 때 얼핏 본 기억이 있는데…….”
장명도의 말을 듣고 송하가 기억을 떠올렸다.
짝!
“아! 그때 그 잘생긴……! 합!”
송하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입을 스스로 가렸다. 황보운룡을 뒤늦게 인식한 것이다. 얼핏 쳐다보니 황보운룡의 표정이 아주 미묘하게 변했다는 걸 느낀 송하가 말을 얼버무렸다.
“아, 그러니까…… 아무튼 기억에 있어요. 회원장가의 소가주님이라고 하셨죠?”
“맞습니다. 제대로 기억하시는군요!”
사실 송하는 어제 읽은 서신에 있던 그대로를 기억해 냈을 뿐이다.
어렸을 적에 만난, 그것도 오빠의 약혼식에서 잠깐 스친 이를 어느 집안 사람인지까지 기억할 리가 없지 않은가.
송하가 약간 민망했는지 달궈진 볼로 답했다.
“그, 그래요. 아무튼 오빠가 제법 든든한 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더니 사실이네요. 들어오세요……. 가 아니라, 생각해 보니 이곳은 들어올 곳이 없죠. 괜히 마을에 있는 것보다는 안전할 것 같아서 노숙 중이었거든요. 다들 일단 앉으세요.”
송하가 연속으로 실수를 하자 민망했는지 발끝으로 땅을 파며 자리를 권했다.
“그러도록 하죠. 모두 앉거라.”
“예, 소가주님.”
* * *
“그러니까 녀석들이 개파식 비슷한 연회를 벌렸다는 거군.”
모든 정황을 전해들은 장명도의 표정이 처음과는 달리 진중해졌다.
“맞아요. 앞으로 사 주야 정도 더 열릴 거예요. 작금이야말로 우리가 칠 수 있는 적기이죠. 아무래도 술과 여자에 빠져 제법 많은 인원이 해이해졌을 테니까요.”
송하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주억인 장명도가 입을 열었다.
“놈들의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이번엔 송하보다 황보운룡이 더 빨랐다.
“……단련된 무인만 사백 명 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연회라고 전부 다 불러오지 않은 것 같다는 점입니다. 그 외의 사백 명은 상단의 사람들, 혹은 그곳에 속한 경비병 정도인 것 같습니다. 혈사련에 속한 무인 중에 일류 고수 이상의 사람은 삼백 명하고 조금 더. 그중에 또 절정 고수가 백십, 그리고 초절정 고수가 적어도 일곱 정도인 것 같더군요.”
“생각보다 작은 규모는 아니군요.”
일반적으로 대규모 문파가 천 명에서 천오백 사이를 오간다고 봤을 때, 혈사련의 규모는 절대 작은 편은 아니었다.
아마 다른 성에 있는 무인들까지 모두 모였다면 무인만 팔, 구백 명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저들을 모두 다 이길 수 있을까?
송하와 황보운룡 역시 이 때문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으음…… 아무래도 대책 없이 움직이다간 정말 개죽음밖에 안 될 것 같습니다. 확실히 승기를 잡기 위해서는 지원군을 좀 더 요청해야겠군요.”
장명도가 말하자 송하가 반문했다.
“대체 어디서요? 당장 올 수 있나요? 지금이 기회예요. 연회는 앞으로 사 주야밖에 안 남았어요. 만약 적들이 지원군을 부른다면, 도착하기 전에 머리를 전부 다 쳐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고요.”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산서성에 혈사련의 우두머리 급이 모두 모여 있다. 때문에 이번 작전만 잘 끝마친다면 어쩌면 이대로 혈사련을 다시 붕괴시킬 수 있을 터.
머리가 사라졌는데 몸통이 혼자 움직일 순 없을 테니 말이다.
“걱정 마. 우리가 먼저 지원군을 부르고, 곧바로 치면 이쪽이 당연히 더 빠를 수밖에 없을 테니.”
“하지만 한시가 급한 일이에요.”
“송 소저, 불안하겠지만 저 방법 말고는 확실하게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황보운룡마저 장명도의 말에 동의를 해 버린 상황에서 송하가 반대할 수는 없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몇 번 더 우겼을 테지만 이번 일이 얼마나 위험하고 중대한 일인지 알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휴…… 대신 발 빠르게 움직여 주세요. 잘못하면 죄 없고 약한 일반인들까지 다칠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사파는 그런 거 안 따진다면서요?”
“당연히 그래야지. 걱정 마라, 송하야. 나 역시 친우의 동생을 죽음에 달하는 위험에 빠뜨릴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